[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⑦ 충절의 상징 사육신묘역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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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⑦ 충절의 상징 사육신묘역

1456년(세조 2년) 6월 2일의 일이다.성균사예 김질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했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 성삼문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했습니다. (중략)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을 타일러 보라. (중략)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해 상왕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 했습니다. (중략)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 하위지, 유응부도 알고 있다’ 했습니다.“ _ <세조실록> 권4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육신(死六臣)

세종의 둘째 왕자인 수양대군은 야심만만한 호걸이었다. 그는 1453년 병약한 형 문종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마자 10월에 쿠데타를 감행해 실력자 좌의정 김종서를 살해한 후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어 영의정 황보인 등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동생 안평대군 역시 유배시킨 후 사사(賜死)했다.

1455년(단종 3년) 6월 수양대군이 결국 허울뿐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집현전 출신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문신과 무신이 단종 복위를 결의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 세조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는 자리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劒, 칼을 차고 왕과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으로 임명하자 그 자리에서 거사,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주장으로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세조가 연회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하고 또 왕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박팽년과 성삼문의 주장으로 거사를 미루게 되었다. 이 사실을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알리니 정창손이 즉시 사위를 대궐로 데리고 가서 고변한 것이다.

이 일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이 체포됐다. 세조가 직접 나서서 국문(鞫問)했다. 살을 태우고 뼈를 부러뜨리는 혹독한 고문이 뒤따랐다. 사건 5일 만에 그 전모를 밝힌 공식 주모자 명단에 이개·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박중림·권자신·김문기·성승·유응부·박쟁·송석동·최득지·최치지·윤영손·박기년·박대년 등 17인이 올랐다. 그러나 순서대로 여러 사람의 이름만 거론했을 뿐, 사육신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

단종 복위 계획의 주동자가 육신으로서 확실히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6신전(六臣傳)’을 통해서다. 여기에 비로소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순서로 6신의 이름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그중에서도 거사 주모 역은 성삼문과 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 이 세 사람이 삼주역(三主役)이다.

 

사육신(死六臣)의 충절과 의기

명나라 사신 초청 연회에서 별운검을 세우지 않도록 한 데다 세자가 불참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온 상황에서도 유응부는 거사를 결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미루는 바람에, 마음이 변한 김질이 고변하여 낭패를 보게 된 것이다.

국문장(鞫問場)에서 유응부는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복(自服)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일갈하면서 무장의 기개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 17인은 6월 8일 대부분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을 받았다.

문제는 현재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의 조성 경위가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세조가 주모자들의 아들들을 모두 교형에 처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조각난 시신을 수습해 이곳까지 옮겨와 육신묘를 처음 조성한 과정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위치한 사육신묘역 전경. 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강기석

다만 이곳에 언제부터인가 박씨지묘, 유씨지묘, 이씨지묘, 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六臣墓)’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경우는 후에 가묘로 모셨다.

1782년(정조 6년)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이 찬하고, 글씨는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강기석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년)에 왕이 노량에 군사검열을 가는 길에 육신묘의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을 위한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1691년에는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 ⓒ강기석
의절사 정문인 불이문(不二門). 19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강기석
의절사 앞마당에 있는 6각의 육신묘비. 사육신묘역에 설치됐던 민절서원이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그 자리에 1954년 서울시가 세운 것이다. 상단에는 김광섭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중·하단에는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강기석
성삼문의 묘. ⓒ강기석
육신의 묘군(墓群). ⓒ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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