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⑧ 정순왕후 넋 서린 ‘동망봉(東望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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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⑧ 정순왕후 넋 서린 ‘동망봉(東望峰)’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7인의 주모자는 자살하거나 고문당하다 죽거나 상관없이 결국 모조리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했다. 자식들도 목 졸려 죽었고 처첩은 노비로 나갔다. 불똥은 상왕으로 물러나 앉아 있던 단종에게도 튀었다. 단종도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 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절개와 충절

1454년 한 살 어린 단종에게 시집왔던 정순왕후 송 씨도 대궐에서 쫓겨났다. 그녀의 아버지 송현수는 사사(賜死) 당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아직 자식도 만들지 못한 결혼 4년차 어린 두 부부는 50여 명의 군졸이 엄히 호송하는 가운데 영도교(永度橋, 청계천 7~8가 사이)까지 와서 영이별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날 하늘도 슬펐는지 빗발이 흩날렸다고 한다. 떠나는 단종은 “중전, 부디 오래 살도록 하시오. 내 소원은 그것뿐이오”라며 송 씨를 걱정했고 송 씨는 “신첩은 오로지 전하의 뒤를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눈물로 남편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염의를 하고 동대문 밖 숭인산 위 정업원(淨業院) 근처 초막에 살면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함께 왔던 시녀 3명과 후궁 2명도 머리를 깎고 정순왕후와 함께했다.

원래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여생을 보냈던 곳인데 정순왕후가 갔을 때는 이성계의 계비 강 씨 소생 셋째 딸 경순공주가 거기에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이성계의 계비 소생 방석, 방번을 죽이고 경순공주의 부군 이제도 죽였는데 이성계가 홀로 된 딸의 머리를 깎아 주고 정업원으로 보냈던 것이다.

정업원과 동망봉 내력을 설명하는 안내판. ©강기석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9월 순흥으로 귀양 가 있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또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분노한 세조는 금성대군 등 주동자는 물론 순흥군 일대 주민들을 도륙내고 순흥부 자체를 폐쇄해 버렸다. 차제에 세조의 측근 공신들은 단종을 사사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고, 여론을 업은 삼사는 드디어 단종 사사를 주청하게 된다.

세조는 못 이긴 척 금부도사 왕방연을 파견한다. <세조실록>은 ‘1457년 음력 10월 21일 금부도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단종이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에는 도사 일행이 단종을 죽인 것으로 다르게 기록한다(단종의 시신은 영월군 호장(戶長) 엄흥도가 수습해 임시 매장, 59년 후인 1516년(중종 11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동쪽을 멀리 바라보며 내뱉은 그리움, 동망봉

이성계의 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 정업원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던 정순왕후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따라 울었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이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부른 것이다.

정순왕후는 그 후 1521년 6월 4일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명의 임금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64년이나 더 살았다. 그녀를 돕기 위해 마을 여인네들이 산 아래 남정네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여인시장’을 열어 채소 등을 조달해줬으며 그녀가 직접 염색일로 생계를 도모했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살던 정업원 터, 매일 동쪽을 보며 울었다는 동망봉, 염색일을 했다는 우물터 ‘자지동천’이 지금도 남아 단종애사를 전하고 있다.

 

지하철 6호선 창신역, 정순왕후의 흔적을 따라

지하철 6호선 창신역에서 내려 3번 출구나 4번 출구로 나가 동망봉터널 위쪽으로 난 찻길을 구불구불 따라 300m쯤 올라가면 청룡사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정업원 옛터다.

청룡사 입구. 청룡사는 고려 922년(태조 5년)에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명을 내려 창건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강기석
청룡사 경내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우화루. ©강기석

1771년(영조 47년) 영조 자신이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검은색 돌 위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터)’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뒷면에는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신묘년(1771년 영조 47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고 씌어 있다.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터)’라고 쓴 비석을 담은 비각. ‘앞의 봉우리, 뒤의 바위여, 천만 년 영원하라’는 비각 현판도 영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강기석

청룡사 바로 위 고갯길 사거리에서 오른쪽 달동네 골목길을 통해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동망봉(東望峯)이고, 왼쪽 아파트 동네 쪽으로 오르락내리락 500여m 가면 쌍룡아파트 단지 한쪽에 명신초등학교가 있는데, 그 옆에 원각사가 나오고 그 바로 아래가 정순왕후가 염색일을 했다는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샘)이다. 정순왕후는 이곳 원각사에서 단종의 3년상을 치렀다고 하며, 자주동샘은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샘이다.

동망봉 표지석. ©강기석
동망봉 동쪽 풍경. 지금은 영월은커녕 아파트만 그득하다. ©강기석
동망봉 쪽에서 내려다본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 ©강기석
지봉 이수광 선생의 ‘비우당(庇雨堂)’이 있었던 터에 정갈한 초가집을 재현해 놓았다. 단종을 모시는 원각사 바로 밑에 있으며 이 집 뒤쪽에 자주동샘이 있다. ©강기석
바위에 새겨진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샘)’. ©강기석
지금은 말라버린 자주동샘. ©강기석

단종과 정순왕후 송 씨의 복권 문제는 중종과 효종 때 시작됐고 사망한 지 241년만인, 1698년(숙종 24년)에야 비로소 복위됐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진다는 것이다.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군, 정선군, 삼척군 등 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청룡사에서 동망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10여 개의 점집이 보인다. 아마도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영혼일수록 영험이 있다는 무가의 속설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