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1 –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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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21 –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

음력 11월, 동짓달 바닷바람은 유난히 맵다. 가없이 펼쳐진 회색 바다에 간간이 출렁이는 파도소리는 더욱 을씨년스럽다. 점점이 박힌 섬들 너머에서 적군이 어느 순간 바다를 까맣게 뒤덮고 몰려온다면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이순신의 마지막 전쟁, 노량해전

1598년 음력 11월 19일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양력으로 치면 12월 16일이 된다. 이날 장군의 전사로 7년 임진왜란의 유혈극은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끝이 났다.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으로 사망하자 왜군 철군령이 내려졌다. 그때 순천 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고립무원에 빠졌다. 육지와 바다에서 수륙협공을 받고 있던 고니시 군대 1만5000여 명은 식량과 의복 등 군수물자를 보급 받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왜군들은 조선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동상(凍傷)에 걸려 수도 없이 쓰러졌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1598년 9월 전라도 완도 옆 고금도(古今島) 진영을 떠나 남해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 총병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일패도지(一敗塗地)의 수모를 겪지 않으려는 양측은 예리한 창과 두꺼운 방패를 앞세워 한판 승부를 겨뤘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서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각종 총포가 불을 뿜었고 이에 맞선 왜군은 조총으로 사정거리(50m 정도) 내 조준사격을 했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 화약 냄새 진동하는 검붉은 연기 속에 양측 병사들의 고함과 북, 징소리, 수장되는 적군의 비명으로 바닷물이 출렁였다. 조선 수군의 불화살을 맞아 분멸되는 세키부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고니시는 부하 8명을 진린(陳璘)에게 보내 돼지와 술, 조선군 수급(首級) 등 뇌물을 바치고 도망갈 길을 터달라며 애원했다. 진린은 손쉬운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을 가졌으나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뒤늦게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구원을 받아 조명연합 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 했다.

<초서체일기(草書體日記)>에 따르면 조명연합군이 예교(曳橋, 순천 왜성)의 적을 장도 뒤에서 10월 2일부터 나흘 동안 맹공격을 했으나, 불행히도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 9척 등 모두 128척을 가진 명나라 수군은 그중 39척이 불에 타는 피해를 당했다. 조선 수군도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현감 유형(柳珩),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 강진현감 송상보(宋相甫) 등 5명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고, 사도첨사 황세득(黃世得)과 군관 이청일(李淸一) 등 2명은 전사했다. 수병도 29명이 전사했다.

왜교성(순천 왜성) 천수각 터. ⓒ김동철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최후의 날

드디어 11월 18일 밤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해 조명연합 수군 200여 척과 대치했다. 예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 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과 소통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번득였다. 고성의 다치바나 시게무네(立花宗茂),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모두 노량 앞바다로 집결하여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 역시 최후의 결전을 할 요량이었다. 이순신은 18일 밤 자정이 되자, 문득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그리고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며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었다. 이 기도는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讎若除 死則無憾)’이란 명언으로 길이 남아있다.

운명의 날인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도와주면서 전투를 독려해 나갔다. 왜 수군 선박 200여 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觀音浦)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 장군은 오전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즉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 또한 후세에 길이 남아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와 그 군사들은 번잡한 틈을 타서 남해도 남쪽으로 퇴각해 시마즈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본국으로 철수했다.

노량해전도. ⓒ김동철

남원 출신 의병장 조경남(趙慶南, 1570~1641년)은 <난중잡록>에서 ‘장군은 친히 북채를 쥐고 북을 치면서 선두에서 적선을 추격하였다. 이때 적선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왜병 조총수가 일제히 조준 발사를 하여 총을 맞았다’고 했다.

장군이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자 곁에 있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은 활을 잡고 있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말하기를 “결국 일이 이렇게 되다니! 참담하구나!” 하며 울분과 탄식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사지어차 망극망극(事至於此 罔極罔極)!’한 상황이었다.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은 전라좌수영 대첩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명의 수군 도독 진린이 공의 죽음을 배에서 듣고 의자 밑에서 세 번이나 엎어지면서 밑바닥을 치고 통곡하였다. 이제는 같이 일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장군을 떠나보내는 천리통곡의 길

장군의 유해는 남해 이락사(李落祠, 이충무공 유허지)에 잠시 안치한 후 남해 설천면 노량리 화전에 있는 현 충렬사(1633년 초가 한 칸으로 세운 사당)로 옮겨졌다. 도독 진린 및 명나라 여러 장수들은 만사(輓詞)를 짓고 애통해 하며 백금 수백 냥을 모아서 장제를 치렀다. 이때 명나라 군사들은 조상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조선 백성들은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달려 나와 거리에서 통곡하여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남해 이락사(李落祠) 현판과 비각의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다’는 뜻의 대성운해(大星殞海) 현판은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 휘호를 내린 것으로 1973년 4월부터 이 사적지가 정화되어 ‘호국의 성지’로 보존되었다.

남해 이락사 비석 대성운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액자. ⓒ김동철
선조실록 11월 23일자 기록“승정원에서 군문도감의 낭청(郎廳, 종6품 실무관)이 보고하는 바 ‘진린의 차관(差官)이 와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하자 선조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또 진린이 ‘이순신이 죽었으니 그 후임을 즉시 임명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고 말하자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어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다음날 선조는 “통제사 후임을 비변사에서 천거하라”고 하고 11월 25일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11월 30일 선조는 “이순신을 증직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우라”고 했다. 12월 1일 비변사는 선조에게 “장례를 치러 주고 자식들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보고하고 12월 4일 이순신을 우의정으로 증직하고 12월 11일에는 이순신의 영구가 남해에서 아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또 선조는 명군의 수장 형개(邢玠)의 권유로 남해로 내려 보낸 이순신 사제문(賜祭文)을 끝내면서 “실은 나는 그대를 버렸으나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승, 저승 맺힌 원한을 무슨 말로 다 하리오” 즉 ‘여실부경 경불부여 통결유명 운하기우(予實負卿 卿不負予 痛結幽明 云何其吽)’라고 회한을 비쳤다. 이순신을 그렇게 핍박했던 선조는 이승과 저승을 달리한 장군에게 마지막 애도의 뜻을 표했다.

12월 1일 발상(發喪)하여 장군의 시신이 붉은 명정을 앞세우고 남해에서 아산으로 운구길에 오르자 소달구지에 실은 목관을 보고 천리길의 많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부모를 여읜 듯 통곡했다. 이른바 ‘천리통곡’이다.

 

끝없는 죽음의 의문 그리고…

이순신 연구가인 이종락 작가가 쓴 <이순신의 끝없는 죽음>에서 이상한 점을 제기했다.

“1598년 11월 19일 장군이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한 뒤 시신은 이락사로 옮겨졌다가 충렬사로 다시 가매장되었다. 그리고 12월 11일 남해에서 아산으로 도착할 것이란 비변사의 보고도 있었다. 그런데 시신이 1599년 2월 11일 아산의 금성산 얼음목에서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고향에서 장사지냄)할 때까지 약 80일이 소요되었다. 남해 충렬사 가묘에서 최장 12일 안치되어 오다가 1598년 12월 1일경 발상하여 아산으로 바로 이장하였다(약 8일 소요)고 전하므로 남는 60일의 공백 기간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위장전사설의 근거가 된다.”

이종락 작가는 또 ‘시신이 왜 고금도(묘당도)로 갔을까’를 제기한다. 1597년 7월 원균의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명나라 조정은 수군 도독 진린에게 5000명의 수군을 붙여 조선에 파병했다. 명 수군은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를 거쳐 1598년 7월 16일 고금도(묘당도)에 도착하여 이순신 통제영과 함께 조명연합 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다. 묘당도는 고금도와 좁은 해협 사이로 매립돼 연륙된 작은 섬이다. 현재 등자룡(鄧子龍)을 제향하는 옥천사가 있고 충무사 옆에는 관왕묘비가 있으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은 일제 때 파괴되었다.

이곳 월송대(月松臺) 가묘 터에는 장군의 시신이 2개월 동안 가매장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60일 동안의 공백은 이곳에서 초분(草墳)을 하기 위해서 이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완도군 청산도에서는 지금도 시신을 초분한다고 하는데 초분은 마을 밖 가묘에서 시신을 짚이나 이엉으로 덮고 3년 동안 부패시켜 조상의 불경스런 썩는 냄새를 없앤 다음 백골이 된 시신을 선영에 이장하는 풍습이다. 마침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목이 발견되었다.

선조실록 31년(1598년) 12월 11일의 기록“선조에게 예조판서가 말한다. ‘등총병(鄧總兵)의 치제관(致祭官, 임금이 죽은 부하의 제사를 관리하도록 한 관리)을 이미 차출하였으므로 곧 내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의 상구(喪柩, 상여)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의 장지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제사를 올리는 순위는 서로 구애된다고 생각되지 않아 이순신에게는 예조의 낭청(郎廳, 종6품 실무관)을 먼저 보냈고 등총병에게는 이축(李軸)을 오늘이나 내일 보내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조는 말한다. ‘중국 장수를 먼저 장사 지내고 우리 장수는 뒤에 하는 것이 예의상 옳다. 등총병에게 먼저 치제관을 보내라’고 하였다.”

 

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

관음포 전투에서 같이 전사한 이순신과 등자룡의 시신은 남해 충렬사에 함께 안치하였으나 장례절차나 선영운구 등 우선순위는 등자룡이 먼저였으므로 장군은 뒤로 밀렸다. 등 부총병의 시신이 한양을 향해서 운구되자 비로소 묘당도에 가매장된 장군의 시신이 아산으로 운구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2월 25일 한성에 도착한 등 부총병의 시신을 3월 6일 국장으로 장례토록 하고 몸소 거둥하여 극진하게 문상했다. 그 후 등자룡 시신은 명나라로 운구되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준 명나라에 대한 존명사대(尊明事大) 사상이 뼛속까지 박힌 선조에게 ‘소방(小邦)의 장수’ 이순신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7년 동안 남해 제해권 장악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장군의 눈물겨운 노력은 과소평가되었다.

남해 충렬사 이순신 가묘. ⓒ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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