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0 – 멸사봉공 이순신과 ‘갑질’ 진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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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20 – 멸사봉공 이순신과 ‘갑질’ 진린

1598년 8월 명나라 병부상서(국방장관) 겸 총독군무 형개(邢玠)는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남해안에 웅거하는 왜군을 일거에 섬멸할 방책으로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구상했다. 육군을 전라도 방면의 서로(西路),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中路),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東路) 세 갈래로 나누고 여기에 수로군을 편성하여 네 갈래로 총공격을 하는 작전이었다. 육군은 8월 18일 한양을 출발했고 진린(陳璘)이 맡은 수군은 이보다 앞선 7월 16일 충청도에서 서해로 남하하여 완도 옆 고금도(묘당도)의 이순신 수군 진영에 합류했다.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

동로군 총병관 마귀(麻貴)는 한성에서 출발, 충주와 안동을 거쳐 경주에서 조선군의 선거이(宣居怡)와 합류하여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친다(제2차 울산성 전투). 중로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한성에서 출발, 청주와 상주를 거쳐 성주에서 남하,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친다(사천성 전투). 서로군 제독 유정(劉艇)은 한성에서 출발, 공주를 거쳐 전주에서 조선군의 권율(權慄)과 합류하여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친다(왜교성 전투). 수로군 도독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은 충청도에서 출발, 전라도 남해안에서 이순신(李舜臣)과 합류하여 배후에서 서로군을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동로군의 울산성 전투는 승리 직전까지 갔으나 패배했고 사천성 전투 역시 패배했다. 왜교성 전투의 경우 서로군과 수로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조명연합군은 3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최종 결전인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군을 궤멸시켰으나 나머지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군은 탈출에 성공했고 조선 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 이로써 7년 전쟁은 어느 한쪽의 승자(勝者)도 없이 끝이 났다.

명나라는 1596년 말, 명과 왜의 오랜 강화협상이 깨지고 1597년 2월 왜군이 재침(정유재란)하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양호와 권율의 연합군은 울산성을 공격했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명군은 사로병진책이란 최후의 일격을 가할 비책을 마련한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수로군에 소속되었다. 실제 조선의 총책은 경리 양호로, 그는 한양에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經理衙門)을 설치하고 선조가 이양한 전시작전권을 행사했다. ‘천자(天子)’의 나라인 명나라를 극진히 섬기는 선조는 양호는 물론 명군 장수들을 접견할 때마다 먼저 절을 하는 등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 조선군 수뇌부 앞에 선 명군의 기세는 등등했고 마치 하인 부리듯 거만을 떨었다.

진린은 1598년 4월 요동에 도착했고 중순 한성에 들어왔다가 7월 16일 이순신 진영이 있는 고금도에 도착하여 조선 수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진린의 임무는 등자룡, 이순신과 함께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육군을 세 갈래로 나누고 해군의 수로를 더하여 네 갈래로 총공격을 가하는 ‘사로병진책’ 지도. ©김동철

멸사봉공(滅私奉公) 의 이순신

포악하고 사나운 성품의 진린에 대해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上)이 청파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장차 이순신의 군사가 안타깝게도 패하겠구나. 진린과 진중에 함께 있으면 행동을 견제당할 것이고 의견이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이 학대당할 것이다.”

1598년 6월 26일 <선조실록>에도 진린에 대한 기록이 있다.“상(上)이 동작강(東雀江) 언덕까지 행행하며 진린 도독을 전별하면서 두 번 읍(揖, 공경예의)하고 다례와 주례를 행하였다. 진린이 말하기를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들 중에 혹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신식(申湜)에게 이르기를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비변사에 일러서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진린과 두 번 읍하고 물러 나와서 환궁하였다.”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 진린에게서 가히 점령군과 같은 거만스런 위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그 윗선인 형개와 양호에게 선조가 취한 굴욕의 자세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이런 진린이 원리원칙의 ‘깐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진영에서 작전을 수립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히 마찰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따르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낮은 자세를 취했다.

<이충무공전서> 권9의 기록이다.“7월 16일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장군은 조선 수군의 함대를 이끌고 먼 바다까지 나가서 진린의 명 수군을 안내했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성대히 마련하여 구원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했다. 호의를 받은 진린은 ‘이순신이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라며 감탄했다.”

<선조 수정실록> 1598년 8월의 기록이다.“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 지 3일만인 7월 19일 절이도(折爾島, 거금도)해전이 벌어졌다. 18일 적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를 접하고서 이순신 장군은 전 함대에 출동 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곳에서 철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 함대가 절이도(거금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를 뚫고서 금당도로 나올 때 이순신 함대는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시켰다.”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戰果)에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 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천군(天軍)’이라는 대국의 원군(援軍)이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이충무공전서> 권9의 기록이다.“‘대감(진린)은 명나라 대장으로 이곳에 와서 왜적들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모든 승첩은 바로 대감의 승첩인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대감에게 드리는 것이니 황제께 이 공을 아뢴다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니 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의 손을 잡고 ‘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허명(虛名)이 아니었소!’ 하고 종일토록 취하며 즐거워했다.”

 

명나라도 움직인 장군의 우국충정

이순신 장군은 수급(首級)은 주되 진린과 합동해서 왜의 퇴로를 막을 심산이었다. 허나 명군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자세로 남의 일 보듯 했다. 이순신 군영은 고금도 덕동에, 진린은 묘당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고금도와 묘당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 연육(聯陸)되어 걸어서 갈 수 있다. 그래서 고금도는 묘당도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명군이 주둔한 인근 조선 수군 및 백성들은 명군의 약탈과 행패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갑(甲)의 농간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이 겁탈당하고 은비녀, 은수저, 옷감 등 값나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빼앗겼다. 민폐가 심해지자 장군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역시 <이충무공전서> 기록이다.“명나라 군사들이 자못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참다못한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에게 모든 가옥을 한꺼번에 헐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옷과 이부자리도 배로 끌어내어 싣게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진린이 부하를 시켜 그 연유를 물었다. 이순신이 답하기를 ‘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기다리듯 하였는데 오히려 귀국의 군사들은 행패와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 여기 남을 수 없어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진린은 깜짝 놀라 달려와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를 청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대인이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하니 도독이 ‘어찌 내가 안 들을 리가 있겠소’라고 했다. 이순신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소. 그러니 만일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겠소이다’ 하니 진린이 쾌히 승낙했다. 그 이후로부터 이순신은 명군의 처벌권을 가지게 됐고 범법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니 명나라 군사들도 이순신을 도독보다 더 무섭게 알게 돼 백성들이 편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공(戰功)을 두고 명나라 장수들 사이에 견제가 심하였다.

1598년 9월 10일 <선조실록> 기록이다.“진 도독이 신을 불러 ‘육군은 유정 제독이 총괄하여 통제하고 수군은 내가 당연히 총괄하여 통제해야 하는데 지금 듣건대 유 제독이 주사(舟師, 수군)를 관장하려 한다 하니 사실인가?’ 하기에 신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이 주사를 정돈하여 바다로 내려가서 기회를 틈타 왜적을 섬멸하려 하여도 매번 도독에게 중지당하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은 유정과 진린 사이에 끼여 운신의 폭이 아주 좁았다. 그런데다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을 시켜 금과 비단, 술과 고기, 장검 등 선물을 가져와서 진린에게 안기고 갔다. 그러면서 “이순신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철군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전했다.

진린 입장에서는 왜군의 선물도 듬뿍 받고 이순신이 바치는 적의 수급도 받아 꿩 먹고 알 먹는 재미를 보는 게 최상이었다. 전투는 어차피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승전(勝戰)의 장수인 이순신에게 맡겨놓아도 된다는 심산이었다. 이순신은 명실상부한 연합작전의 수행을 위해서 진린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진린을 위해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순천 왜성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 ©김동철

1598년 9월 15일 <난중일기> 내용이다.“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일시에 군대를 움직여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서 잤다.”
9월 16일 “나로도에 머물면서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
9월 21일 “왜적들의 배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즉시 도독 진린에게 바쳤다.”

진린의 마음이 점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군의 우국충정에 감동을 한 것이다. 진린은 이순신을 부를 때도 존칭인 ‘이야(李爺)’라고 불렀다. 야(爺)는 남자의 존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야(李爺) 같은 장수가 조선에 있는 게 아깝소. 명나라에 가서 장수를 해야 하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진린은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선조에게 이순신의 뛰어난 전공을 알렸다. 신종은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직함을 내리고 명조팔사품(明朝八謝品)을 하사했다. 장군에게는 이렇듯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진실된 우국충정의 성심(誠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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