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계절의 생동감 – ‘서울촌놈’의 양평살이 ④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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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계절의 생동감 – ‘서울촌놈’의 양평살이 ④

산골에 찾아오는 봄의 기운

시골이나 산골에 사는 사람은 3월 초쯤 되어야 겨울의 침잠과 적막감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다. 이때부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시골생활에서 가장 큰 기대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계절이 봄이다. 그러나 산골의 봄은 더디다. 앞산의 잔설과 집 뒤쪽 응달의 얼음은 해마다 3월이 되도록 끈질기게 버티다 하순께야 녹는다. 앞산 잣나무 숲에 듬성듬성 박힌 활엽수에는 노란색에 가까운 옅은 연두색 싹이 보일 듯 말 듯 나오기 시작하고 이어 4월로 접어들면 그 싹에서 노란 기운은 사라지고 연두색이 짙어진다. 봄이다.

이즈음이 되면 밤하늘의 별빛바다는 싸늘한 듯 더욱 총총해 보이고 대기는 맑고 투명해진다. 겨우내 얼었던 땅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부드럽게 풀어져 녹황색 작물을 키울 준비를 갖춘다. 이제 땅도, 잡초도, 사람도 부산해진다. 겨우내 먹이가 부실했던 고라니들이 살그머니 내려와 씨 뿌려 싹 틔어놓은 부드러운 열무를 잘라먹는 것도 봄볕이 따사로운 이즈음이다. 인색한 사람들은 곧바로 망을 쳐 이들의 접근을 막는다.

이처럼 3월 하순에 씨를 뿌려 키운 열무 싹이 고라니들에게 먹힐 즈음이 되면 산골짜기 주변과 숲속에서는 야생화들이 앞을 다투며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가장 앙증맞은 봄꽃이 노루귀다. 잔설을 헤치고 나온다는 뜻에서 ‘파설초’라는 멋진 별명을 얻은 야생화다. 그밖에 작디작은 별꽃이나 제비꽃, 너도바람꽃이 노루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얼굴을 내밀고 얼레지, 피나물, 현호색, 우엉취도 초봄의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게다가 집 주변에도 꽃다지, 애기똥풀, 할미꽃, 붓꽃이 어지럽게 피는데 그중에 달갑잖은 민들레도 빠지지 않는다. 민들레, 특히 서양민들레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까지 완강한 뿌리로 버티는 바람에 뽑아버리기 어렵다. 시골에 살면서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풀과의 전쟁’인데 이 싸움에서 공적 1호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서양민들레다.

앙증맞은 봄꽃 노루귀. 제일 일찍 피는 봄꽃 중 하나로 잔설을 헤치고 나온다고 해서 ‘파설초’라는 별명을 가졌다. 색상은 보통 흰색과 보라색이 많다. ⓒ홍수원

봄의 소식, 대자연의 선물 야생화

이사 온 이후 지금까지는 필자도 봄철만 되면 숲속과 중미산 골짜기인 삼각골을 헤집고 다녔다. 호미 들고 텃밭에 앉아있던 집사람은 늘 잔소리를 한다. 땅에 빌붙어 살겠다고 시골 온 사람이 그 땅에서 생산에 힘을 보탤 생각은 안 하고 산속으로 쏘다닌다고. 하지만 필자는 씨 뿌리고 거름 주고 잘 가꿔 수확하는 일이 도무지 신기하지도, 즐겁지도 않아 텃밭에는 거의 얼씬도 하지 않았다.

중미산에서 내려오는 한줄기인 삼태봉이 집 뒤쪽에 버티고 있고 울창한 잣나무 숲에 에워싸인 탓인지, 사람 손이 닿아 예쁘게 자라는 꽃나무나 작물 따위가 대단찮게 보인다. 한마디로 대자연의 거센 기세와 섬세한 변화, 절묘한 조화에 압도된 나머지 인공의 결실과 인위의 아름다움이 작게 보이는 것이다.

봄철에 산골짜기와 숲속을 누비고 다닐 때는 늘 김태정의 <쉽게 찾는 우리 꽃> 봄 편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봄에 산과 들에 피어나는 200여 종 꽃의 속명과 개화기, 색깔, 특징을 설명하고 사진까지 곁들여 쉽게 찾아볼 수 있게 꾸며놓은 ‘식물도감’ 같은 것이다. 이 도감 덕분에 골짜기 주변과 숲속에서 60여 종의 야생화를 찾거나 가려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야생화 중 피나물이라는 노란 꽃이 인상적이었다. 양귀비과에 속한다는 이 꽃은 4월 초부터 깊은 산속 그늘에서 핀다. 녹음을 준비하는 초봄은 온통 연녹색으로 바뀌는데 특히 그늘속의 녹색 바탕은 피나물의 밝은 노랑을 한껏 돋보이게 만든다. 임도를 따라 중미산 중턱까지 올라가면 이곳저곳 군락지가 보이지만 계곡 아래쪽 숲속 그늘에 한 그루 외롭게 피어있는 모습을 처음 발견하게 되면 그 선명한 색상 때문에 절로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맑고 푸르른 여름의 소리

이처럼 대춘(待春)의 설렘 속에 골짜기와 숲속을 헤매는 사이, 야생화 군락들은 더욱 현란한 자태를 뽐내고 늦봄의 신록도 한층 싱싱해진다. 그러나 초여름으로 접어들면 점차 짙고 촘촘해지는 녹음에 눌려 들꽃의 아름다움도 빛을 잃는다. 이제 산은 녹음이란 두툼한 외투를 걸친 것 마냥 한결 뚱뚱해진 모습이 된다. 텃밭 작물도 늦봄인 5월 하순에 제일 먼저 상추와 쑥갓이 자주 밥상에 오르고 6월에는 오이와 토마토를, 한여름인 7월부터는 고추와 가지를 맛볼 수 있다. 녹음과 작물도 풍성해지지만 온갖 이름 모를 벌레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린다.

괭이와 삽을 들지 않은 죄(?)도 큰 데, 상추와 쑥갓을 뜯고 고추와 오이를 따오는 심부름마저 마다했다가는 밥도 얻어먹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자주 텃밭을 오가지만 그때마다 종아리 쪽이 보이지도 않는 벌레들에게 물려 고생을 한다. 한번 물리면 사나흘씩 가려워 물린 부위가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긁는다. 벌레들은 텃밭뿐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기승을 부린다. 한여름엔 반바지 차림으로 마당에 나와 30분쯤 바람을 쐬다 보면 온몸이 물리기 십상이다. 여름철 시골살이의 큰 어려움 중 하나다.

그래도 한 해 중 여름은 산골이나 시골에 풍성함과 생동감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논밭에는 알곡과 푸성귀가 자라고 중미산 중턱까지 깊숙이 파고든 집 앞 골짜기에는 물과 그늘이 많아 소문 듣고 찾아온 피서객들로 보름 남짓 북적거리고 소란스럽다. 이때 오랜만에 들리는 높은 톤의 아이들 목소리가 참 정겹다.

한여름이 되면 소문 듣고 찾아온 가족 단위 피서객으로 집 앞 계곡이 소란스럽지만 높은 톤으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싫지 않다. ⓒ홍수원

요란하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시끌벅적한 계곡 물가가 조용해지면 결실의 계절로 접어드는 신호다. 녹음을 자랑하던 활엽수 수풀은 연녹색을 거쳐 황록색으로 바뀌고 하늘은 높고 푸르러진다. 그리고 이내 가을의 문턱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을 뒤덮은 울창한 녹음으로 산이 갑자기 뚱뚱하게 살이 찐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가 되면 논밭에선 알곡과 푸성귀가 자라고 활엽수 수풀은 연녹색을 거쳐 황록색으로 바뀔 준비를 한다. ⓒ홍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