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결실의 계절 – ‘서울촌놈’의 양평살이 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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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결실의 계절 – ‘서울촌놈’의 양평살이 ⑤

가을, 그 결실을 마주하는 자세

계절은 에누리가 없어 입추(立秋)와 처서(處暑)의 중간쯤인 8월 중순을 기점으로 한여름 더위가 누그러지며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들거린다. 이때부터 텃밭에선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매미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며 하늘은 높고 푸르러진다. 논에는 이즈음에 이삭 팬 만생종 벼가 결실을 재촉하고 황금물결을 이루며 50여 일 뒤의 수확을 기다린다. 모두 차고 넘칠 듯이 풍성하지만 그 속에는 정점에서 내리막에 접어드는 쇠락의 서글픔도 함께 잠겨있다.

가을로 접어들면 언제나 그렇듯이 앞산 잡목들은 진녹색을 감추며 서서히 옅어진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안다는 일엽지추(一葉知秋)도 이즈음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연녹색은 다시 녹황색을 거쳐 노란 단풍을 선보일 것인데, 거실에서 바라보는 잡목 숲의 색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지금까지 하루가 다르게 색이 변하는 수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탓에 그저 신기함만 가득하다. 그동안 도시생활에서는 잡목 숲을 차분하게 살펴볼 여유를 가져보지 못한 탓이리라.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에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은 감나무다. 집 왼쪽으로 잣나무 숲에 바싹 붙어있는 감나무는 9월에 들어서자 가지마다 옅은 주황색의 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키다리 잣나무의 그늘을 피해 햇볕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인다. 그리고 초가을의 햇볕 속에서 주황색 감은 붉은색으로 점점 바뀌고 곧 물러지면서 까치의 간식거리가 된다.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내고 한국전쟁 중 월북한 화가 겸 수필가인 김용준은 자신의 호(號)를 앞세운 에세이집 <근원수필>에서 감나무 예찬론을 이렇게 펼치고 있다.

“나무껍질이 부드럽고… 꽃이 초롱같이 예쁜 것 하며… 단풍이 구수하게 드는 것과 낙엽이 애상적으로 지는 것 하며… 그야말로 화조(花朝)와 월석(月夕), 즉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감나무가 끼어서 풍류를 돋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느 편으로 보아도 고풍스러워 운치 있는 나무는 아마도 감나무가 제일일까 한다.”

‘단풍이 구수하게 들고 낙엽이 애상적으로 진다’는 표현은 요즘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정서다. 어찌되었든 감나무는 큼직하고 두툼한 입이 녹색에서 황색과 홍색을 거쳐 갈색으로 바뀌면서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절기를 짐작하게 만드는 지표 구실을 한다. 해마다 세밑에는 미리 긁어 모아둔 감나무 낙엽과 솔가리에 설해목을 얹어 태우면서 새해를 맞았는데, <근원수필>을 읽기 전까지는 감나무 낙엽을 태우면서 ‘애상적으로 낙엽 진’ 기운은 느끼지 못했다.

감나무 예찬론자는 감나무 단풍이 ‘구수하게’ 들고 낙엽은 ‘애상적으로’ 진다고 표현한다. 늦가을 거의 연시가 되다시피 한 감들이 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홍수원

산골의 단풍이 집 주변 은행나무의 황단풍과 함께 절정을 이루는 것은 벼를 베는 10월 중순경이다. 집 앞쪽 계곡인 삼각골을 따라 올라가보면 골짜기 양쪽으로 당단풍과 단풍나무가 많아 단풍 색상이 꽤 은은하고 곱다. 단풍은 주로 붉은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황갈색의 색조도 섞여있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런 단풍이 집 앞에서 계곡을 따라 상류쪽으로 1㎞ 남짓 되는 거리에 듬성듬성 박혀있어 장관은 아니라도 그런대로 볼 만하다.

바위와 계류, 은은한 단풍이 어우러진 중미산 골짜기. 단풍은 붉은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황갈색의 색조가 섞이면서 묘한 조화를 이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을 풍긴다. ⓒ홍수원
계곡 물가에 가까이 붙어 자라는 단풍나무는 10월부터 붉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해 하순께 그 절정에 이른다. ⓒ홍수원

사계절이 쉬이 머물다 가는 산골

아무리 산골이라 하지만 작으나마 논밭이 있어 벼와 들깨, 고추, 무, 배추가 자라고 있는데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결실은 외면하고 단풍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좀 겸연쩍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앞서도 변명삼아 털어놓은 것처럼 푸성귀를 재배한답시고 ‘씨 뿌리고 거름 주고 잘 가꿔 수확하는 일’이 신기하지도, 즐겁지도 않아 텃밭에 가지 않았다.

땅에 빌붙어 살겠다고 시골로 온 사람이 생산 활동을 외면한다는 집사람의 지청구에는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요리조리 피해나갔다. 그러니 수확의 계절에 결실을 살피고 보듬는 일은 뒷전으로 두고 계곡의 홍단풍과 집 주변 은행나무의 황단풍, 감나무의 ‘구수한’ 단풍이나 계속 들먹이다 보니, 산골생활의 단조로움을 텃밭 가꾸는 재미로 이겨내는 집사람에겐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어디서 주워들은 문자 하나를 소개하자면 ‘산가추색한유거 홍엽만산염천지(山家秋色閑幽居 紅葉滿山染天地)’란 말이 있다고 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산속의 집에 묻혀 조용히 사는데, 붉은 잎들은 산마다 가득 온 세상을 물들이네’라는 뜻이다.

필자의 삶이 ‘가을빛으로 물든 홍엽만산’의 산골에 파묻혀 산다는 것은 분위기상으로는 비슷하나 ‘유거(幽居)’의 깊은 뜻은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그저 단조롭고 따분한 삶을 이어갈 뿐이다. 그리고 골짜기 바람 싸늘해지고 눈발 날리는 초겨울이 다가오면 이런 따분함에 적막감까지 더해져 산골의 밤은 더욱 깊고 길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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