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2 – 이순신 죽음의 미스터리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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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22 – 이순신 죽음의 미스터리

1595년 1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 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또 1596년 12월 11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 가케하시 시치다유 梯七太夫)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 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權慄)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월 13일) 울산 남쪽 서생포(西生浦)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가토 기요마사는 도원수 권율이 독전 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 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살신성인, 눈물겨웠던 장군의 인생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조정의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군수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숨통을 끊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 구명탄원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뒤 권율의 진영이 있는 경상도 초계(합천)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4월 13일 충남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그러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成服, 초상났을 때 상복을 입음)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월 14일 막내아들 면(葂)이 아산에서 왜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한 사실 등으로 장군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초주검의 상태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고문당한 후 병든 몸으로 141일 동안 아팠으며 176회 고통을 하소연하였다. 특히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날부터 9월 16일 명량해전까지 58일간 고통으로 병 치료를 받았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백 번, 천 번 통곡(慟哭)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장군에게 한 순간의 휴식이나 한 치의 개인적인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 나라의 안위(安危)를 책임져야 한다는 주문이 쇄도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함부로 울어서도 안 되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아! 참으로… 모진 삶이었다. 결국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온몸을 던짐으로써 나라를 지켜내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산화(散華)했다.

 

절대왕조시대, 장군의 존재가 위협이었던 선조

장군의 처지가 이렇다 보니 그의 전사(戰死)와 관련 분분한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살설, 의자살설(擬自殺說), 위장순국설(僞裝殉國說) 등이 난무한다.

자, 하나의 가정이다. 노량해전에서 살아서 개선장군(凱旋將軍)이 된들 온전히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치솟는 인기는 곧 선조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불충(不忠)의 근거가 될 뿐이었다. 세자 광해군에 빌붙은 북인 세력으로 볼 때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은 자파세력 확장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절대왕조시대에 지존(至尊)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다 대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운용하는 이순신이 반역(反逆)이라도 꾀한다면? 한성을 포위하고 왕위를 이양시키는 군부 쿠데타라도 일으킨다면? 이 시나리오는 선조에게 최악의 악몽(惡夢)이 될 것이다. 선조는 어느 한 세력이 커지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때론 견제하고 때론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하늘에 태양은 오로지 자신 하나로 족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쟁의 영웅 맥아더 원수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고 미국 국민의 절대적인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만약 그가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 인기몰이를 했다면 트루먼 대통령의 심기가 과연 편했을까. 그래서 트루먼은 히든카드로, 맥아더와 가장 친한 유럽군 총사령관 출신 아이젠하워 장군(1952년에 대통령이 됨)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끝까지 군인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정치권을 기웃거리지 않았지만, 트루먼은 또 다른 다크호스를 준비해 두며 맥아더를 견제했다. 상대가 오랑캐는 아니지만 이른바 동양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장군이 전사한 뒤 80년 후 숙종 때 대제학 이민서(李敏敍, 1633~1688년)는 김충장공(의병장 김덕령, 金德齡) 유사에서 ‘북을 치던 부관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순신은 스스로 투구를 벗고 돌격북을 치면서 싸움에 맞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冑自中丸以死)’고 했다.

 

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대제학 이민서는 또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 비문에서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원인은 당파(동인과 서인) 간의 대립과 항쟁으로 점철된 당쟁의 희생물(黨禍)’이라고 했다. 그 후 1678년 편찬한 시문집 <서하집(西河集)> 17권 ‘김장군전’에서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1596년 역모했다는 무고로 처형됨) 모든 의병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郭再祐)는 군대를 해산하고 군직을 떠나 벽곡(辟穀, 곡식을 끊고 솔잎, 대추, 밤 등으로 생식한다는 뜻으로 은둔하여 신선이 됨)을 하며 당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이 말에서 의자살설(疑自殺說)의 미묘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숙종 때 좌의정인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 1658~1722년)은 가승발(家乘跋)에서“공은 용의주도하게 방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왜 몸을 버리고 죽어야 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되 공이 성공한 뒤에도 몸이 위태해질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當矢石而不避). 어허! 참으로 슬프도다. 과연 그랬을까(嗟乎或其然乎今).”

한술 더 떠 위장순국설(僞裝殉國說)까지 나왔다.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인데 남천우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2008년 미다스북)에서 위장 전사를 주장했다.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을 때 배 안에는 아들 회(薈, 32세)와 조카 완(莞, 20세)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들과 모의하여 전사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순신이 아산 어라산에 실제로 죽어서 묻힐 때까지 15년 80일 동안 은둔 칩거하여 더 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해 충렬사 가묘(20일), 묘당도 월송대 가묘(2개월), 아산 금성산 묘(15년)는 모두 가매장한 것이 아니고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고의로 만든 위묘(僞墓, 가짜 묘)라는 말이다. 과연 그랬을까. 보는 눈이 수도 없이 많았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전투에도 같이 참전했는데 과연 위장이 가능했을까.

묘당도 월송대 가묘. ©김동철
묘당도 월송대 가묘. ©김동철
현충사 이순신 장군 묘. ⓒ김동철

다음은 명과 왜, 조선 3국의 전사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 25일“진린(陳璘)의 게첩(揭帖)에서 ‘한창 왜적이 포위할 때 내 배는 큰 북을 치고 먼저 진격하고 등자룡(鄧子龍),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할 때 두 장수는 죽었다’고 했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해남현감 류형(柳珩, 1566~1615년)은 장군이 전사한 15년 후 “장군은 추격 중 왜적선의 선미에 엎드린 조총수로부터 6발의 총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하였다”고 하였다.

왜의 시각을 담은 <일본사(日本史)>는“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대를 선두에서 추격하다 선미에 엎드린 철포병(鐵砲兵)의 일제사격으로 심장 왼쪽 가슴에 피탄하여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시마즈 함선 300척 가운데 250척이 침몰하고 겨우 50척이 빠져나왔다. 시마즈는 그의 아타케부네(安宅船)가 대파하자 다치바나 시게무네(立花宗茂)의 배로 옮겨 탔다.”

정조 때 오경원(吳慶元, 1764년~?)이 쓴 명과의 외교록인 <소화외사(小華外史)> 기록이다“등자룡이 큰 공을 탐내 선봉에 서서 분격하는데 뜻밖에 뒷배에서 화기를 잘못 발사하여 등자룡 배의 돛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왜군들이 배에 올라타 등자룡을 칼로 마구 쳐 죽였다. 이순신은 나아가 앞서가던 진린이 포위되자 이를 구하려고 금빛 갑옷을 입은 왜장을 활로 쏘아 맞히니 왜병이 진린을 놓아주었다. 이순신이 와서 구출하여 진린은 탈출했으나 이순신은 총을 맞았다.”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1562~1623년)은 <충민사기(忠愍祠記)>에서 “진린이 26일 개선하여 한양에 올라오자 선조는 한강진까지 출영하였으며 이순신의 충렬(忠烈)에까지 이야기가 미치자 나는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였다”고 말했다.

이때 진린은 선조에게 “성(城)을 버리고 군사를 잃은 무리들이 공신이라 자임하여 자기 방창(房窓) 아래에서 늙어죽건만 이순신에게는 그 혁혁한 충렬과 큰 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몸을 버림에까지 이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보답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장군의 죽음과 관련해 여러 설이 난무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순신을 불신했던 선조라는 ‘거대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명량대첩 후 기사다“경리 양호는 이순신이(원균의 칠천량 패전 후) 군량과 병선을 조처하여 명량해전에서 승첩을 올린데 대해 황상(明神宗)에게 상문(上聞)하여 성단(聖斷)을 받아 포상하겠다”고 하자 선조는 “우리의 도리로서 미안하여 사양한다”고 양호에게 말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1598년 4월 14일 남해에서 활약중인 이순신이 보낸 치계(馳啟 파발보고서)를 보고 경리 양호와 선조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경리분부왈(經理分付曰) : 양호가 말하기를이순신용력살적(李舜臣用力殺賊) : 이순신이 그처럼 전력을 다해 왜적을 참살하고 있으니
이차아심가희(以此我甚嘉喜) : 나는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겨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급속장상고무(急速獎賞鼓舞) : 급히 명 황제의 포상을 요청하고 사기를 고무시킬 것이다

전왈(傳曰) : 선조는 말한다국군신불능토적 상번천조(國軍臣不能討賊 上煩天朝) : 우리나라 장수들은 능히 왜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천자의 조정을 번거롭게 만들고 있다
유죄당사 무공가록(有罪當俟 無功可錄) : 이의 유죄를 기다릴지언정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단 말인가
수혹포참소령적(雖或捕斬少零賊) : 비록 사소한 왜적을 잡거나 참살하였다 하더라도
차불과변장직분내사(此不過邊將職分內事) : 변방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이불능섬일적진(而不能殲一賊陣) : 아직까지 하나의 적진도 섬멸하지 못하고
참일적장 당재가치지중(斬一賊將 當在可治之中) : 한 명의 적장도 참수하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죄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
우하감이위공(又何敢以爲功) : 그런데 어찌 감히 공적을 만든다는 말인가

이렇듯 선조는 대국 명나라가 불쌍한 소방(小邦)을 구해준 은혜, 즉 재조번방(再造藩邦)과 사대지성(事大至誠)으로 똘똘 뭉쳐있었으므로 이순신이 23전 23승으로 남해 제해권을 확립한 것도 가볍게 여겼다. 게다가 왜적을 때려잡지도 못한 주제에 포상을 올리는 일은 황제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평가했다. 노량해전이 끝난 뒤 도독(都督) 진린(陳璘)의 보고로 명 황제 신종(神宗)은 이순신에게 팔사품(八賜品)을 수여했고 수군도독(水軍都督)으로 임명했다. 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이다. 사자무언(死者無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수군도독 임명인장. ©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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