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IT 이야기] 디지털 치매 유발자, 패스워드증후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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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IT 이야기] 디지털 치매 유발자, 패스워드증후군

2015.12.31 · 엄판도(전 경향신문 기자) 작성
패스워드증후군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너무 많은 사이트에서 각기 다양한 기준으로 강요하는 비밀번호가 스트레스 요인. 보안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요? ©scyther5/Shutterstock

직장인 박유진(27세, 여) 씨는 근무시간에 직장 상사의 눈을 피해 회사 근처 은행을 찾았습니다. 스마트폰에 깔린 카드 앱을 업데이트하는 과정에서 자동 로그인 기능이 해제돼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5회 연속 오류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박 씨는 “평소 사용하던 비밀번호 조합에 이 숫자, 저 숫자를 바꿔 넣어봤는데 계속 틀려 계정이 잠겼다”며 “직접 방문해야 바꿀 수 있다고 해서 근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입한 사이트마다 자주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해 더욱 헷갈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비밀에 싸인 비밀번호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 주변에 ‘비번(비밀번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현관문부터 노트북, 거래용 공인인증서까지 외워야 하는 비밀번호가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특히 최근 들어 금융기관은 물론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대문자, 숫자, 특수기호’가 포함된 비밀번호 조합을 요구하면서 스트레스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최근 한 신문사가 성인 남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가 ‘한 달간 비밀번호를 네 번 이상 바꾸고 있다’고 했답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비밀번호를 변경하는 셈입니다.

‘비번 스트레스’의 주범은 사이트마다 제각각 다르게 요구하는 비밀번호 조건입니다. 포털 사이트 비밀번호의 경우 네이버가 ‘6자리 이상’인 데 비해 다음은 ‘8자리 이상’입니다. 네이버에서 6자리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이용자가 다음을 이용하려면 숫자를 추가하거나 새로운 비밀번호 세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78%가 ‘비밀번호 세트를 3개 이상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패스워드증후군과 디지털 치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겪는 스트레스를 일컫는 ‘패스워드증후군’, 비밀번호를 자주 잊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디지털 치매’ 같은 신조어까지 나왔답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80.4%가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월 평균 1~3회 재설정한다’고 답했습니다.

비밀번호를 연속으로 틀린 뒤 재설정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스트레스로 꼽힙니다. 전문가들은 ‘비번 스트레스’가 2013년 ‘3·20 사태’로 불리는 농협 전산망 해킹이 발생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손영동 교수는 “해킹과 집단소송으로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기업들의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높아진 상황”이라며 “비밀번호에 특수문자까지 요구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손 교수는 “사이트의 안전도를 높이기보다 이용자 개개인에게 너무 많은 보안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당분간은 불편하더라도 이용자가 자체적으로 여러 세트의 비밀번호를 관리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