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⑩ 활쏘기 터 황학정(黃鶴亭)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⑩ 활쏘기 터 황학정(黃鶴亭)

1 황학정 전경
궁술 연습을 위해 지어진 황학정 전경. ©강기석

심신수련의 활쏘기 터, 황학정

동이(東夷)족의 ‘이(夷)’자가 큰 활을 쏘는 사람의 형상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으로부터 안시성의 양만춘, 조선 건국자 이성계 등 활쏘기 달인들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다. 정조대왕 같은 이는 실제 당대 명궁이었다고 한다. 이제 국궁이 아닌 양궁으로 활의 종류가 바뀌긴 했다. 하지만 지금도 각종 활쏘기대회에서 한국팀이 우승을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인이 활쏘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소리가 괜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선시대 무과(武科) 시험에서도 활쏘기는 주요 과목이었다. 무인들 뿐 아니라 성균관 유생 등의 선비들도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했다. 이런 까닭에 한반도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활터가 분포했다. 한양에는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서촌)에 등과정(登科亭)‧등룡정(登龍亭)·운룡정(雲龍亭)·대송정(大松亭, 太極亭)·풍소정(風嘯亭, 白虎亭)이 있어 이를 ‘서촌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렀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들은 1894년 갑오경장 때 활이 군대의 무기체계에서 제외되고 일제가 전통 무술까지 일체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그중 등과정 터만이 황학정(黃鶴亭)에게 자리를 내어준 채 오늘날까지 흔적으로 남기고 있다.

황학정은 원래 1898년 오히려 국민의 심신단련을 위해 활쏘기를 장려해야 한다는 고종의 뜻에 따라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궁술 연습을 위해 지은 사정이다. 고종 자신도 그곳에서 활쏘기를 즐겼다. 그러나 일제는 1913년 경희궁 터에 경성중(서울고)을 세우면서 경희궁의 여러 건축물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황학정은 1922년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해체돼 가장 가까운 등과정 터로 옮겨 온 것이다.

황학정 자리가 옛 등과정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바위 각자. ©강기석
황학정에서 바라 본 과녁. ©강기석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300여m쯤 가면 사직단이 나오고, 사직단 담장 끝을 돌아 인왕산 둘레길을 또 200m쯤 숨차게 오르면 황학정이 나온다. 그 직전에 단군을 모신 단군성전(혹은 백악전)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은 아니지만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정부 표준 단군 영정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한번 되새김질해 봄직하다.

단군성전. ©강기석

조선의 마지막 택견 수련터

황학정을 둘러 본 후 내쳐 200m쯤 더 숲길로 올라가면 우리의 전통무예인 택견의 조선 마지막 수련터가 나온다.

황학정에서 택견 수련터로 가는 산길. ©강기석

택견은 태권도와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있다. 태권도는 오키나와에서 비롯된 당수도가 일본 본토로 전수되는 과정에서 공수도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것을 배운 조선 유학생들이 해방 후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태권도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반면 택견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송덕기(1893~1987년)라는 분에 의해 재현됐고 신한승-이용복으로 전수됐다.

택견꾼들이 뛰어 넘으면서 수련했다는 감투바위. ©강기석

옛 한양에서는 사직골, 구리개(을지로), 왕십리, 애오개, 굴레방다리에서 택견을 많이 했는데 이들 마을들이 우대, 아랫대 두 편으로 나뉘어 겨루는 결련택견을 했다고 한다. 우대란 한양 성안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 곧 사직동 일대를 말하고, 아랫대란 동대문과 광희문, 왕십리 등을 일컬었다. 보통 우대에는 서리들이 많이 살았고 아랫대 사람이라고 하면 하급장교 이하 군총들을 지칭했다. 그러므로 택견의 마지막 수련터가 반드시 인왕산 자락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으나, 사라질 뻔한 택견을 복원하게 해준 송덕기 옹이 살았던 이곳을 택견의 마지막 수련터로 기념코자 하는 것은 눈감아줄 만한 일이라 하겠다.

택견과 수련터를 설명하는 안내문. ©강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