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6 – 이순신에게 안위를 맡기려 했던 선조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다시 쓰는 징비록 26 – 이순신에게 안위를 맡기려 했던 선조

<선조실록> 1592년 6월 26일의 기록이다“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요동으로 가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요동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압록강 상류도 역시 아주 위험하다. 바다로 해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밀히 의논하고 보고하도록 하라.”

선조의 하명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지금 적들이 평양에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바닷길로 간다면 적에게 막힐 것 같습니다. 황해감사로 하여금 바닷길을 정탐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 결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조가 답했다.

“그렇게 하면 늦을 것이다. 설사 나중에 가지 않더라도 준비하여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 배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윤두수가 선천과 곽산의 바닷길을 거쳐 남행하길 청하자 선조는 이렇게 답했다.

[banner id="26217"]

“만약 간다면 물길로 가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로 가서 머문다면 역시 군사를 모집하여 나라의 부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선조는 왜놈들에게 죽느니 명나라에서 죽겠다며 요동으로 내부(內附, 망명)하려 했다. 평안도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은 “아니되옵니다.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大駕離東土步地 朝鮮非我有也)”라고 극구 만류했다. 선조는 “내부는 본시 내 뜻이라(內附本予意也)”고 받았지만 결국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된 이유는 명나라 조정의 시큰둥한 반응을 담은 전갈 때문이었다.

“조선 왕이 요동으로 온다면 요동의 관추보(寬酋堡) 빈 관아에 거처하게 하고 시종은 100명을 넘지 않아야 한다.”

변방인 관추보는 명나라와 여진의 경계지역으로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선조는 명나라의 속내를 읽고는 요동 파천을 ‘없었던 일’로 마무리했다.

1592년 4월 30일 한성을 떠나 개성, 평양을 거쳐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의주 목사의 관아에 자리를 잡았다. 말이 왕의 임시 거처인 행재소(行在所, 행궁·이궁의 다른 이름)이지 텅 빈 성과 같이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주 백성들은 왜군이 평양성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조리 산속이나 바닷가로 피난을 갔다. 그래서 의주 관아 여종이 왕의 수라상을 준비했는데 비빈들과 대신들은 땔감이 없어 생쌀을 하루 두 끼 씹어 먹었고 말들은 꼴이 없어 쓰러지거나 굶어 죽었다.

선조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근처 압록강만 건너면 명나라였지만 요동으로의 망명마저도 포기해야하는 몸이 됐다. 왜군에 쫓겨 먼지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도망치다시피 한 지난 2개월간의 장정(長程)을 되돌아보니 처지가 너무나 한심했다. 남자로서 하도 부끄러워서 내시(內侍) 앞에서조차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북방 변경까지 몰린 선조는 의주 용만관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풀어냈다.

용만서사(龍灣書事)국사창황일(國事蒼黃日) : 나라일이 심히 어지러운데
수능곽이충(誰能郭李忠) : 누가 감히 (당나라의) 곽자의와 이광필 되어 충성하겠는가
거빈존대계(去邠存大計) : 큰 계책 위해 도성 떠났으나
회복장제공(恢復仗諸公) : 회복은 그대들한테 달려 있소
통곡관산월(痛哭關山月) : 변경에 뜬 달에 통곡하고
상심압수풍(傷心鴨水風) :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네
조신금일후(朝臣今日後) : 조정 대신들은 오늘 이후에도
상가경서동(尙可更西東) : 여전히 동인, 서인 싸움만 할 것인가

선조의 친필 시. ©김동철

진퇴양난(進退兩難), 최악의 위기에 몰린 선조는 온갖 궁리 끝에 남해안을 방어하고 있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지난 4월 신립(申砬)과 이일(李鎰) 등 가장 믿었던 당대 최고 장수들이 그만 허망하게 왜군에게 패전한데 따른 반동 작용이었다. 그래도 이순신은 남해안에서 연신 승전보(勝戰譜)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종묘사직을 버리고 여기까지 쫓겨 왔으니….’

선조는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고 연일 악몽(惡夢)을 꾸었다. 함경도 북쪽은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고 평안도 끝 압록강을 넘으면 바로 명나라의 요동 땅이고, 평양성 아래 하삼도는 왜군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코밑에 있는 평양성에는 6월 15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선발대 1군이 점령해있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가 대군을 이끌고 이 야심한 밤에 쳐들어온다면? 나의 목숨은? 그리고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발대 1, 2군의 부산포 상륙, 동래성함락, 상주전투 패배, 충주 탄금대 전투 패배, 용인전투 패배, 7월 명군 조승훈의 평양전투 패배로 선조의 쫓기는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선조의 입장에서는 ‘도 아니면 모’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전라도를 생각해낸 것이다. 선조는 6월 14일 이순신이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받은 지 5일 후에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됐다.

이순신은 왜란 초기 5월에 1차 출전을 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왜 선단을 잇달아 격멸했고 2차 출전 때인 6월에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연전연승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남해 제해권은 어느 정도 확보되었고 왜군의 서해 진출은 사실상 막혀있었다.

너른 평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왜란 당시 군량미의 주요 공급원이 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조선 출병 왜장들에게 “적도(赤道, 일본에서는 전라도를 그렇게 불렀음)를 점령해 군량을 확보하라”고 엄히 지시한 바가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8도 지도를 여섯 가지 색깔로 표시했다. 경상도는 백색, 전라도는 적색, 충청-경기도는 청색, 황해도는 녹색, 강원도는 황색, 함경도는 흑색이었다. 전라도는 붉은 땅, 적도(赤道)였다. 왜 그런 색깔 표시를 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왜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450㎞를 20일만에 주파하고 임진강 방어선을 뚫고 북상해 6월 13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점령한 뒤 200㎞ 전방의 의주에 있는 선조를 공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임진왜란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는다. 이 미스터리는 나중에 좀 더 추적해야 할 사안이다.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진군을 멈춘 이유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김동철

류성룡이 말한 대로 “적군이 단시일 내에 쳐들어온다면 행재소 전변에는 막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했는데 평양의 고니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산포 상륙 후 파죽지세로 달려오면서 일점일로(一點一路)로 거점이 형성되는 통에 길게 늘어진 병참선을 자칫 의병들에 의해 침범당할 것이라는 우려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왜군 함대는 이순신에 의해 연전연패하는 상황 속에 7월 15일에는 한산도에서 용장(勇將)인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참패를 당한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조선군이 7월 8일 금산,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7월 말에는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성을 공격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시시각각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가자 선조는 전라도로 가는 남행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에 펼쳐진 리아스식 다도해(多島海) 지리에 아주 밝은 전략가였다. 복잡한 지리지형을 잘 파악한 격물치지(格物致知) 정신에 투철했기 때문에 지형지세를 잘 읽었고 결국 이기는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다.

장군은 최소한 전라도 땅만은 꼭 지켜야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 판단했다. 전라도에 대한 장군의 확고한 인식은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 그의 친척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절상호남 국가지보장(竊想湖南 國家之保障) :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남은 나라 울타리이므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시이작일(是以昨日) : 이런 까닭에 어제
진진우한산도(進陣于閑山島) : 한산도에 진을 옮겨
이위차해로지계(以爲遮海路之計) :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서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발해고(渤海考)>의 저자 유득공(柳得恭)이 1795년(정조 19년) 왕명에 따라 편찬한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끝부분 서간문 모음집에 실려 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문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 김동철

또한 ‘전시 재상(宰相)’ 류성룡이 쓴 <서애문집(西厓文集)>에는 자신이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에게 보낸 국서 ‘진동국개부경리경부진문(陳東國開府經理京否秦文)’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나라 팔도 중 전라, 경상 두 도가 가장 중요한 곳이 된다. 경상도는 문호가 되고 전라도는 창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상도가 없게 되면 전라도가 없게 되고 전라도가 없게 되면 비록 다른 도가 있으나 우리나라는 마침내 근본의 계책을 삼을 것이 없게 된다. (중략) 오늘날 우리나라의 안위는 실로 전라, 경상도를 지키느냐에 달려있으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무경상 즉 무전라(無慶尙 則 無全羅), 경상도가 없으면 전라도도 없음이리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긴밀한 지리적, 전략적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전라 주민들은 지금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물론 전라도가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전세(戰勢)를 반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관할 5관 5포에서 군사를 징발했고 거북선과 판옥선 등 전함을 만들었으며, 둔전을 경작해 수군과 피난민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군에게 유린당한 경상도에 출병해 경상도 바다를 지켰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예나 지금이나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밀접한 관계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성기뉴스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지난 2015년 9월 첫 문을 열었던 <전성기뉴스>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보다 가까이에서 소통하기위해 SNS 채널을 개설, 50+를 위한 유익한 콘텐츠를 지속 제공합니다.

전성기뉴스는 2017년 12월까지 운영되며, 기존 콘텐츠는 라이나전성기재단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콘텐츠 보러가기

그동안 <전성기뉴스>를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SNS 채널에도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