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8 – 이순신의 창의력, 격물치지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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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28 – 이순신의 창의력, 격물치지

우선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사자성어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교육학용어사전의 설명이다.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格物) 지식을 넓히는 것(致知)이다. 격물과 치지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밝힌 팔조목에 속한다. 주자학으로 불리는 정주학파(程朱學派, 程伊川·朱熹)에서는 격물의 목적은 영원한 이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데 있다고 하면서 치지가 격물보다 먼저라고 생각하였으나, 양명학으로 알려진 육왕학파(陸王學派, 陸象山·王陽明)에서는 오히려 격물이 치지보다 더욱 먼저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영특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에는 이치를 담지 않은 사물도 없으나, 그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지식 또한 다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물을 이미 자기가 아는 이치에 따라서 더욱 추구하여 그 끝에 이르도록 해야 하며,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날 통달하여 모든 만물이 정교하거나 거칠거나 표면적인 것이거나 이면적인 것이거나 두루 미치어 자기 마음의 전체에 그 모습이 밝혀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양명(王陽明)은 지식을 넓히는 것은 사물을 바로 잡는 데 있다(致知在格物)고 하였다.

두산백과는 주자와 왕양명의 해석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창의성을 담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은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 곧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출발한다.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치지 않고 걸어서 황하를 건너지 않는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는 곧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꾀(智謀)를 써서 일을 성공시킨다’는 호모이성(好謀而成)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주특기인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전략, 즉 ‘이기는 싸움’과도 맥이 통한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7월 15일 거북선을 활용한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1591년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로 부임하자마자 3월부터 거북선 창제에 나섰다.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었다. 또 1577년 전라좌수사를 역임한 31세 대선배인 백전노장 정걸(丁傑)을 찾아가 조방장(助防將, 참모장)으로 모시겠다고 청했다. 까마득한 후배 장수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걸은 판옥선을 만든 주역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판옥선에 철익전 및 불화살 등을 쏠 수 있는 대총통을 설치해 조선 수군을 최강의 함대로 만들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 창의성의 결정체다. ©김동철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有備無患)정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정신으로 임했던 이순신 장군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정신이다. 원균(元均)이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 눕히려는 만용(蠻勇)을 부리다 그만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모두 궤멸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장군이 활용한 ‘돌격선’인 거북선의 직충(直衝)전술과 학익진이라는 포위전술은 당시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상대편 배에 근접하여 올라탄 뒤 칼춤을 추는데 익숙한 왜군의 등선 백병전(登船 白兵戰)을 막아내려면 거북선의 지붕에 덮개를 두르고 철침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거북선을 적진 한복판에 진격시켜 종횡무진으로 휘저으며 방포(放砲)함으로써 전열을 흐트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적의 조총 사정거리(50m) 바깥에서 각종 총포로 원거리 집중 포격을 함으로써 이기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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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지휘함과 거북선 출전도. ©김동철

단병전(短兵戰)에 약한 조선 수군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이 입체적인 화력전은 근대 해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300년 후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한 일본은 영국에서 군함을 도입하고(하드웨어)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의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의 전략(소프트웨어)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거북선의 직충(直衝)전술과 판옥선과의 합동으로 쌍학익진(雙鶴翼陣)을 펼쳐 포위한 뒤 일시 집중타법(Salvo타법)을 구사한 것이 주요 과제였다. 그야말로 실패에서 배우는 체험적 교훈이었다. 일본은 이순신의 쌍학익진(雙鶴翼陣)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적의 함대를 빙 둘러 에워싸고 일제히 포사격을 하는 원진법(圓陣法)이라는 신개념의 전술을 개발했다.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청일해전(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학익전을 응용한 T자 진법으로 청나라 북양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를 모두 수장시켰다.

충무공의 다양한 진법 전개도. 창의적인 진법을 활용하기 위해선 함선을 자유자재로 거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 ©김동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정신

거북선의 직충(直衝) 전법은 적의 배에 돌진해서 깨트리는 당파(撞破)전술이다. 오늘날 현대전에서 ‘Ramming전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 NLL에서 북한 경비정이 남하, 월경(越境)하면 우리 해군 경비함은 곧바로 함포사격하지 않고 적선의 측면을 밀어냈는데 그 또한 당파전술의 하나다.

이순신 장군의 창의성은 정철총통의 개발에서도 빛났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정신이다. 장군은 왜란 초기 조선 육군이 왜 조총(鳥銃 , 뎃뽀) 공격에 ‘무(無)뎃뽀’로 대응하다 모두 당하고 도망치는 것에 착안, 1593년 8월 정철총통을 개발했다.

군관 정사준(鄭思竣)에게 책무를 맡겼다. 정 군관은 대장장이와 종 등 천민들과 함께 기어코 정철총통을 만들어냈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장군의 불치하문(不恥下問) 정신의 발현이다. 거북선도 마찬가지로 감조군관 나대용(羅大用)에게 맡겨 훗날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장군은 상대적으로 강한 전함인 거북선과 판옥선의 장점을 살려, 왜 선단을 들이받아 깨뜨리는 직충전(直衝戰)을 생각해 실전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날까지 거북선에서 함포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또 화약을 만들 때 쓰는 염초(焰硝, 질산칼륨)를 구하기 위해서 지붕 처마나 화장실 주변 흙에서 질소 성분과 알칼리 성분을 채취했다. <세종실록> 등에서 군사기술에 관한 기록을 샅샅이 뒤진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진지한 학인(學人)의 자세,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정신으로 일관했다.

 

지형지세를 살펴두는 전략가적 사고

또한 장군은 지형지물의 활용에 있어 달인(達人)이었다. 따라서 평소 지형지세를 남달리 살펴두는 관찰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기록했다. 그냥 말로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전략가적 사고다.

지도에 밝은 장군의 이야기다. 1583년 7월 함경도 남병사 군관(종8품), 10월 건원보 권관(종9품) 시절 이순신 장군은 여진족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이므로 <난중일기>가 아니라, <함경도 일기>의 기록이다.

아침에 은성부사와 작별하고 성을 나와 5리쯤 왔을 때 큰 솔들이 길 양옆으로 10여 리나 된다. 또 30여 리를 더 가니 큰 고갯마루가 서쪽에서 뻗어와 바다 어귀에 가로질러 있는데 이름은 만령(蔓嶺)이다. 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하여 이 고개에 웅거하고 관군에 항거할 적에 이 고지를 점령하고 진을 벌리고 돌과 활을 비 퍼붓듯 하므로 관군이 전진하지 못했다.

이때 어유소(魚有沼)가 몰래 해정(海丁)을 경유하여 적군의 후방을 돌아서 공격하자 적들이 깃발과 북을 내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지형을 보니 적이 고개에 웅거해 있었다면 해정길이란 것이 바로 눈 아래 보이는 지척인지라 군사 수십 명만으로 막고 있었어도 관군이 비록 수천 명이라도 험관을 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평삭방서(平朔方序, 북방을 평정한 글의 서문)에는 몰래 해정을 경유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갯마루의 한 가닥이 가운데로 뻗어 해안에 닿아서 절벽으로 끊어진 데가 이른바 시중대인데 송림이 울창하고 바다가 가득하여 경치가 매우 좋다. 잠깐 쉬면서 혼자서 술 몇 잔을 들고 일어나 거산역(居山驛)에 이르니 해가 저물었다. 또 잠깐 쉬고서 말을 재촉하여 북청(北靑) 고을에 당도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1597년 5월 백의종군 시절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는 초계(합천)를 향해 전라도 구례의 섬진강 땅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4도체찰사(총사령관) 이원익(李元翼)이 편지를 보내왔다.

1597년 5월 24일“도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낙동강 하구에서 노량에 이르는 한려수도 해역)를 그리고 싶으나 그릴 방도가 없다고 하니 본 대로 그려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려서 보내주었다.”

열흘 뒤쯤 초계 땅 갯벼루고개에 다다랐을 때 장군은 지형지세를 눈여겨보았다.

1597년 6월 4일“기암절벽은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치고 깊기도 하다. 길 또한 험하고 위태로우니 만약 누가 있어 이 요해처(要害處)를 지킨다면 만 명의 용사라도 지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수군이었지만 육지의 천험(天險) 요해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1597년 7월 19일“단성(산청)의 동산산성에 올라 그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준하여 적이 엿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에서 잤다.”

몸은 비록 백의를 입은 무등병(無等兵) 신세였지만 훗날 육군으로 배속되어 육전을 치러야 할 사정도 감안한 듯 눈앞에 보이는 지형지세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장군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음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1580년 7월 발포만호(종4품)로 재직할 때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이순신을 전라감영으로 불러 진법에 대해 시험 삼아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장군은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이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다가 거문고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소문을 들은 손식이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가 떠볼 겸 감영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그린 진법도가 너무나 정교하자 손식은 내심 놀라면서 “내가 잘못 봤소.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소”라고 손을 잡고 사과했다.

이런 장군의 관찰력과 예지력은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 때 울돌목이라는 천혜(天惠)의 지형을 발견해내고 그 지세와 물길을 적극 활용, 13대133이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이것을 어디 하늘이 준 행운(天幸)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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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에서 발사된 총포에 분멸되는 왜군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김동철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그 불굴의 투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이김으로써 세계 해전사에 또 하나의 신기록을 남겼다.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 초인 1592년 4월 삼도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천험의 요해처인 문경새재(鳥嶺)를 버리고 허허벌판인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선봉군에게 무참히 몰살당한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훨씬 이전에 조선의 기마부대로 여진족을 깨부쉈던 신립은 과거의 추억과 명성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는 조령을 통과하면서 “조선 장수는 이 천혜의 지역을 피해서 대체 어디로 도망갔단 말인가”라며 조롱했고 왜군들은 풍악을 울리면서 유유히 지나갔다. 200여 년 후인 1801년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문경새재를 지나치면서 “신립에게 묻고 싶다. 왜 나라의 문을 그리 쉽게 열어주었는지…”라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