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27 –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승부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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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27 –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승부

조선 수군 명장(名將)과 왜 수군 용장(勇將)의 대결이 벌어졌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걸고 싸우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한판 대승부였다. 침략군인 왜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년)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 극복에 진력하던 이순신 장군에게 해전에서 자웅(雌雄)을 겨뤄보자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6월 3일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을 대패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을 격멸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했다.

우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누구인가. 이순신 장군보다 아홉 살 적은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암살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섬겼으나 1582년 아케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패사(敗死)한 뒤엔 도요토미의 측근이 되었다. 1583년 시즈카다케(賤ケ岳) 전투에 참가해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그 공으로 도요토미로부터 1585년 아와지섬의 3만 석 영지를 하사받았다. 1587년 도요토미가 규슈를 정복할 때와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를 포위해서 호오조오씨(北條氏)를 공격했을 때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함께 수군의 지휘관이 되어 도요토미 함대의 일부를 지휘한 수군 장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수군 대장 격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초상화. ⓒ김동철

감히 이순신 장군에게 도전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임진왜란 이후 1600년 일본의 통일전쟁인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에 가담, 그 공훈으로 1609년 영지가 이동하면서 이요쿠니의 오즈 5만3000석을 받게 되었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는 본래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아서 전투가 끝난 후에도 참수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쿠가와와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같은 칠본창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에 지명도가 한참 떨어지는 장수지만 나름 그 용맹성이 강해 ‘감히’ 이순신 장군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1592년(임진년)과 1597년(정유년), 1598년(무술년) 여러 차례 왜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덤볐으나 한산도, 명량, 노량해전 등 세계 해전사에 기록될 만한 대해전에서 대부분의 함대와 병사를 잃고 끝내 치욕의 한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92년 6월 3일 용인전투에서 1600여 명의 기마군을 이끌고 도읍을 수복하기 위해 충청, 경상,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올라온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 5만여 명에게 패전의 쓰라림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충청, 경상, 전라 등 하삼도(下三道)에서 차출된 5만 근왕군의 행진과 관련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라감사 이광은 당시 조선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물자가 풍부했던 호남의 고을을 돌며 장정 4만여 명을 모았다. 보급품을 실은 수레의 행렬이 50리 길에 가득 찰 정도의 규모였다. 하지만 전투 경험은커녕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오합지졸의 병사들이기도 했다. 지휘부도 문관 일색으로 전투 개념 자체가 없었다. 광주목사로 이 전투에 참전한 권율(權慄)도 따지고 보면 문관 출신이었지만 그나마 전략에 대한 개념은 지녔다.

북진 중에 충청도 병력 8000여 명이 가세하고 쑥밭이 되어버린 경상도에서도 살아남은 소수의 무관들이 힘을 보탰다. 하삼도(下三道)의 근왕군은 수원성에 무혈입성한 후 왜군 10여 명의 수급을 베는 작은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머릿수만 많았지 전투에 임하는 임전무퇴의 자세와 치밀한 전술전략이 잘 짜여 있을 리가 만무했다.

칠본창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입었던 갑옷. ⓒ김동철

남도근왕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 장본인

드디어 6월 5일 본격적인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왜군 조총 선발부대가 하늘과 땅을 울리는 조총을 연발하자 조선군은 그 소리에 놀라 기겁을 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동원된 말들도 조총의 굉음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 전열이 일순간에 흩어졌다. 용인 부근의 보급기지 겸 망루를 지키던 600여 명의 군사들은 수원 광교산으로 진을 옮겨 아침밥을 먹는데 한양에서 내려온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증원군 1000여 명과 합세한 왜군 1600여 명이 기마대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순간 일진광풍이 불었고 조선군의 머리는 왜군의 칼춤에 따라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거친 모래바람과 피 튀기는 아우성, 아비규환의 절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처럼 내리쳤다. 이윽고 산처럼 쌓인 조선군 시체에서 흘린 붉은 피가 내를 이루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 전투는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웠어야 했다.

그나마 황진(黃進)과 권율의 군대만이 목숨을 겨우 부지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황진은 훗날 이치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했고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두는 전과를 기록했다. 독선과 무능으로 점철된 지휘관 이광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됐다.

왜 수군 와키자카 가문의 기록인 <와키자카기>에 따르면 이 때 거둔 수급만 1000여 급으로 되어있어 희생된 조선군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5만여 조선군은 불과 1600여 명의 왜군에게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일본 쪽 기록에서는 용인전투를 ‘조선군이 궤주(潰走)했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조선군은 죽은 병사보다는 도망치다 밟혀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용인전투도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대승을 거둔 용인전투도. ⓒ김동철

한산도에서 이순신과 운명의 만남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역시 조선군은 조총 한방에 흩어지고 도망가는 데 선수’라는 인식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겼다. 승전의 기쁨도 잠시, 그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떠올랐다.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이라. 그는 용인전투에서 참패한 전라감사 이광의 직속 부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순신 수군도 역시 조총 한방에 벌벌 떨면서 뒤꽁무니를 빼겠지. 당장 내려가 단칼에 조선수군을 모두 베어버리겠다.’

당시 5월과 6월 이순신 수군은 옥포, 합포, 적진포 및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왜 수군을 격멸시키고 있었다.

절치부심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드디어 7월 15일 한산도에서 이순신과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와키자카는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서 조선 수군 판옥선 몇 척이 앞에서 오가자 벌써 승전을 눈앞에 둔 듯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 치 앞의 운명을 아는 사람은 없는 법. 좁은 해협 견내량의 길목을 빠져나오는 와키자카의 왜 수군은 대선 아다케 부네 36척, 세키부네 37척 등 70여 척의 대함대였다. 조선은 전라좌수군(李舜臣)과 전라우수군(李億祺)의 전선 48척과 경상우수군(元均)의 7척이 합세한 55척의 연합함대를 동원했다.

전략가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후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쳤다. 학익진 전술은 원래 육전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길이 4㎞ 정도의 긴 수로인 견내량(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은 폭도 넓은 곳이 600m를 넘지 않은 데다 암초까지 많아 판옥선을 운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장군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툭 터진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해냈다. 한산도는 무인도였으므로 만약 패전한 왜군들이 그곳에 상륙한다고 해도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학익진 대형. 드라마 징비록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이순신 장군이 펼쳤던 학익진.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김동철

장군은 우선 판옥선 5~6척을 동원해 도망가는 척 왜 선단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매복해 있던 판옥선단이 나타나 학이 날개를 펼친 것 같은 포위망을 구축했다. 곧이어 거북선이 적의 대선을 곧바로 들이받는 직충(直衝)의 속전속결을 시작했고 판옥선에서는 천자, 지자 등 각종 총포에서 대장군전. 철탄, 살탄 등이 일시에 집중포격됐다. 등선 백병전(登船 白兵戰)에 능한 왜군은 조선 수군의 함포 세례 앞에 그대로 무너졌다. 비장의 무기였던 조총과 긴 칼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해전 연구가 중에는 “한산도 해전 당시 왜군 측은 사상자 수만 9000여 명에 달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은 전선 파손이 없고 3명 전사에 10여 명이 부상했을 뿐이다.

전후좌우에서 한참을 두들겨 맞은 와키자카는 망연자실한 채 멘붕 상태가 됐다. 실성한 듯 소리를 지르다가 횡설수설도 했다. 그리고는 왜장의 갑주를 벗어던지고 평복으로 가장한 채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았더라면’이라는 병법의 기초를 망각한 허장성세가 불러온 패퇴였다. 이 한산대첩으로 이순신 장군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로 승서(陞敍)되었다.

 

이순신 앞에 맥을 못 췄던 일본 장수들

와키자카는 1592년 임진왜란 초 육전인 용인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반면, 이순신 장군과의 해전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제7진으로 조선에 다시 들어와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함대를 괴멸시켰다. 그러나 9월 16일 명량해전과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연거푸 이순신 장군에게 걸려 쓰디 쓴 고배(苦杯)를 마셔야 했다.

왜군은 연이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척,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 1542~1600년)의 제2진 40여 척,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가 합세한 총 150여 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했다.

드라마 <징비록>에 등장한 왜 수군 사령부 회의 모습. ⓒ김동철

일본 기록은 ‘와키자카 장군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단독으로 출전했고 결국 유인책에 말려 쉽게 패했다’고 설명한다. 와키자카의 단독 출전으로 패전을 한 데다 와키자카의 행방마저 분명하지 않은 데 통분하고 있던 구마노 해적 출신의 구키 요시타카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함께 9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출동(한산도 해전 다음날)하였으나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에게 다시 대패하고 야반도주해 가까스로 목숨만 건졌다.

구키 요시타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수군 총대장으로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층루선인 신형 아다케 부네(安宅船)를 개발했고 이 신형 대선을 전군에 보급했다. 이전의 층루선이 포장마차형이었다면 신형은 판자로 밀폐시켜 방어력을 강화한 2~3층 구조를 갖췄다. 도요토미는 연이은 왜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하자 일본 최고의 수군 지장(智將)인 구키를 내세웠지만 이순신 장군 앞에선 이마저도 소용없었다.

1592년 7월 15일 안골포해전 관련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이다“11일에는 새벽에 다시 돌아와서 포위해 보았지만 왜적들은 허둥지둥 닻줄을 끊고 밤을 타서 도망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싸움하던 곳을 살펴보니 죽은 왜적의 시체들을 열두 곳에 쌓아놓고 불태웠는데 아직도 타다 남은 뼈와 손발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으며 안골포 성 안팎으로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왜적들의 사상사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연구가 가타노 쓰기오(片野次雄)의 저서 <이순신과 히데요시>는 안골포에서의 왜군 사상자를 25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의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 장군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이를 갈다가 앞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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