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내 탓이오’ 캠페인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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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고 싶은 ‘내 탓이오’ 캠페인

혹시 기억나시나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친 기간 동안 거의 범국민적 캠페인처럼 번져 나갔던 ‘내 탓이오’ 캠페인 말입니다. 가톨릭평신도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이 캠페인은 사회 각층과 단체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나라 구석구석까지 소리 없이 퍼져 나가며 한국인들의 정서 순화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거리에서는 ‘내 탓이오’ 문구가 들어간 둥근 스티커를 유리에 붙이고 다니던 자동차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기업체 사무실에서도 이 스티커를 붙여놓은 직원 책상들이 이따금씩 눈길을 끌기도 했지요. 얽힌 이야기들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겠지만 이 캠페인은 20여 년 전 한국 사회의 ‘착하게 살기’ 노력에 신선한 자극을 불어 넣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탓이오’ 캠페인은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 중 하나인 고백기도문 중 한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능하신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로 시작되는 이 기도에서 신자들은 중간에 ‘제 탓이오’라는 고백을 세 번 반복하며 손으로 가슴을 칩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는데 이게 모두 자신의 탓이라는 것이지요. 기도 문안 자체를 떠나 자신의 허물과 지은 죄를 통렬히 반성하며 참회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니 경건의 극치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탓하는 반성의 목소리는 어디에

생뚱맞게 2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절의 ‘내 탓이오’ 캠페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고 암울해서입니다. 정치, 경제, 노동은 물론이고 예술,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온통 이해관계자들이 질러대는 아우성과 분노, 증오의 함성만 가득하고 자신을 탓하며 용서를 구하는 반성의 기도는 거의 들리지 않아서 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라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무조건 적으로 보는 적대행위 앞에서 사랑과 희생, 참회의 목소리인 ‘내 탓이오’는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얼마 전 위안부 협상을 골자로 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이 끝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사죄와 반성의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과거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걸핏하면 한국과 한국인의 뒤통수를 때리는 망언으로 우리의 분노를 샀던 아베 총리인 만큼 그의 사죄 표시는 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그의 발언을 대서특필한 주요 매체들도 거의 모두 본심을 완전히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는 말투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평소 그가 거침없이 쏟아냈던 자극적인 말들과 안하무인격 행동을 감안한다면 필자도 비슷한 방향의 기사를 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평균적인 일본인들과 분명 다른 인물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말하는 화법과 행동 방식 그리고 사고의 틀 등에서 모두 그렇습니다. 보통의 일본인, 우리가 일본 땅이나 한국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일본인들은 사과 의사표시에 관해 단호합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는 거침없이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냅니다. ‘스미마셍’ ‘모시와케 고자이마셍’ 등의 간단한 사과 인사에서부터 대단히 정중한 인사말까지 주저 없이 상대방에게 건넵니다. 재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도 자신을 구해준 구조대를 만났을 때 처음 꺼내는 말이 “(저의) 잘못 때문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일 정도입니다.

물론 사과 인사를 한다고 보통의 일본인들이 속마음으로도 진정 잘못을 인정하고 과오를 뉘우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베 총리만큼 뻔뻔스럽고 얼굴 두꺼운 일본인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고위 공직자에서 평범한 이웃집 사람에 이르기까지 제가 마주치고 겪어 본 숱한 일본인들은 아베 총리와 아주 판이했습니다.

다시 우리 한국 사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한국 땅에는 남을 탓하는 불평, 불만과 한숨이 너무도 차고 넘칩니다. 일이 잘 안 풀려도 남 아니면 나라를 탓하고, 이를 원망과 욕설로 풀어버리는 못된 습관이 전염병처럼 퍼져 있습니다.

초미의 국가적 현안이 되고 있는 청년 일자리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기가 곤두박질친 탓에 기업은 실적이 반토막 나고 언제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니 사람을 마음대로 뽑을 수 없습니다. 일하는 이들을 내보내자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정년이 늘어난 대신 임금피크제로 급여를 조정하고 이러한 재원을 바탕으로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자고 해도 기존의 직원들은 눈을 부라립니다. 그리고는 청년실업을 초래한 것은 오로지 경영을 잘못한 기업들 탓이요, 나라 살림을 엉터리로 한 정부 탓이라며 화살을 날립니다.

경기침체를 핑계로 한국사회는 불평과 불만이 넘쳐납니다. 실수는 남의 탓, 잘못은 정부 탓,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네 탓만을 외치면 행복과 감사는 영영 찾을 수 없습니다. ©Duncan Andison/Shutterstock

눈길 끈 <응답하라 1988>의 옛 정서

저는 얼마 전 제가 다니는 스포츠센터에서 자주 얼굴을 대하는 아주 핸섬한 중년의 남성이 주변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무심히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은행 금리가 올라도 나라가 잘못한 탓이요, 아이들이 학교 공부와 담쌓고 살아도 나라가 엉망인 탓이요, 자신이 교통신호 위반에 걸린 것도 나라가 신호체계를 잘못 관리한 탓이라는 불평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집값 오를 것을 기대하고 수억원을 빌려 투자해 놓고는 대출이자 늘어난 것을 왜 정부에 불평합니까? 교통신호를 무시한 자신의 잘못은 외면한 채 왜 신호체계에 욕설을 퍼붓는 겁니까?

TV드라마 중 1980년대 말 서민들의 생활상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88>이라는 제목의 연속극이 꽤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도 호기심에 끌려 몇 번 시청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각종 소품들이 옛 추억을 되살려 주어 참 반갑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이긴 해도 이 시절의 등장인물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정(情)이었습니다. 이웃을 챙기고 생각해 주는 따뜻한 마음과 자신의 욕심을 다스릴 줄 아는 염치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드라마 속 주인공들만 그랬을까요? 서민들이 사는 동네라 지역적 특성이 달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과거의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지금처럼 각박하고 까칠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증오와 근거 없는 적개심은커녕 오늘의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불평, 불만도 거의 설 땅이 없었습니다.

2016년 새해를 맞은 오늘의 한국은 그 시절보다 집도 커지고, 자동차도 번쩍번쩍해지고 거리는 말끔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멀끔해지고 체격도 보기 좋게 커졌습니다. 문화, 예술은 물론 의료, 복지에서도 일반 서민들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남의 탓, 회사 탓, 나라 탓부터 하고 보는 이상한 습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져 갑니다. 옛날이 그립다며 삭막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 보다는 내가 먼저 타인을 배려하고 용서를 구하며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nito/Shutterstock

드라마 제목처럼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응답하라 1988>의 옛 정서로 잠시만이라도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탓이오’의 구절에 담긴 메시지를 한 번쯤 되새기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병신년을 맞으며 가슴에 품었던 새해 소원을 전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가슴이 따뜻해지는 새해가 되기를 그리고 그 마음이 올 한 해 동안 계속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