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신문 창간을 하명하다 – 신문야사 ③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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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신문 창간을 하명하다 – 신문야사 ③

조선‧중국‧일본의 개화운동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일본, 조선의 개화운동은 분주했다. 그러나 그 3국 중 유독 조선만은 아직도 문을 걸어 잠근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답답한 중국이 조선에게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할 정도였다. 그들이 미국을 추천한 이유는 미국은 오로지 통상만을 원하지 나라를 삼키려는 야욕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조선은 대중국 사대(事大)에만 매달렸다.

중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한 후 크게 자각하여 1862년부터 자강(自强)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일으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려고 했고, 일본도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 페리 함대의 함포사격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한 후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우리도 저렇게 강해져야 한다며 개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시작으로 1871년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고 이토 히로부미 등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 인재 106명으로 ‘이와꾸라(岩倉) 사절단’을 조직하여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그들은 민주주의 등 정치제도에서부터 사회제도, 생활양식과 무기제조법에 이르는 중공업까지 모든 것을 배워왔다. 일본은 산업이 특히 발달한 독일을 멘토로 선택하고 그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서구 문물을 배워 들이는 데 있어서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사상으로,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사상, 10년 늦게 합류한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상을 접목시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한 조선의 개항은 일본이 미국에게 당한 그대로의 재판이었다. 다만 일본이 불평등조약으로 미국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것과는 달리 조선에게는 강도가 낮았다. 이유는 서구 열강의 눈치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정부가 1871년에 수립되고 불과 5년 후에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강화도조약을 맺었으니 5년 앞선 일본의 진보가 눈부셨다. 조선은 일본의 국력 신장에 크게 놀랐다.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본을 모델로 개화하자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 5년 후인 1881년에야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의 ‘이와꾸라 사절단’과 같은 성격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만들어 60명의 젊은 인재들을 일본에 보냈으니 무려 10년이나 뒤진 깨우침인 셈이다. 이와 더불어 중국에도 무기제조법을 배우기 위한 공학도 38명으로 구성된 영선사(領選使)를 보냈는데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모두 철수하고 말았다. 영선사 계획은 군관 40명을 보내 군사제도와 전술 등을 배워올 계획이었다.

 

조선 개화기의 정치적 혼란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이와꾸라 사절단’처럼 젊은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의 선진 문명을 배워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강을 이루려는 신진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중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화하자는 민 씨 일족의 수구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무조건 서양 문물이라면 배척하는 위정척사파도 존재했다.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에 뿌리를 둔 유생 중심 세력으로 서구문물은 물론 일본의 문물도 서양 것이라며 무조건 배척했다. 서양인은 예의가 없는 족속들로 그들과 화의를 맺으면 무부무군(無夫無君)이 된다고 믿었다. 이들은 정신적 지도자로 대원군을 세웠다가 임오군란(1882년 6월 9일)에서 청나라 군대에게 참패하자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퇴조했다.

조선 개화의 노정에서 임오군란은 크나큰 분기점이 된다. 임오군란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보다 형편없는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군대의 반란이었다. 군란(軍亂)은 정국을 뒤엎을 정도로 격렬했다. 이 과정에서 구식군대는 별기군을 조련하던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고 일본 순사 13명을 살해했다.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은 인천을 통해 본국으로 피신했다. 반란군은 창덕궁까지 난입했다. 명성황후 민비는 궁녀복장으로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다급하여 대원군에게 정국 수습을 맡겼다. 대원군의 복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피란 중이던 민비는 청나라에 군란 진압을 은밀하게 요청했다. 일본 때문에 종주권 행사를 못했던 청나라가 기꺼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운 좋게 영선사로 중국 톈진에 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민비(閔妃)가 요청한 임오군란 평정군인 리홍장(李鴻章)을 안내해 온 공로로 추후 정국의 실세로 등장한다.

손쉽게 임오군란을 평정한 청나라 리홍장은 이 틈에 일본의 세력도 축출하고 자신들이 종주국임을 재확인했다. 대원군은 다시 톈진으로 구속되고 쫓기던 민 씨 일파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환궁한다. 이들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기존 왕조질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수구파 즉 온건개화파로 진화한다. 김홍집‧김윤식‧어윤중‧김만식 등이 온건개화파였다. 반면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종주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일본처럼 국가체제와 사회제도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독립 국가를 만들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본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도 일본에게 진압군 파병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기대와는 달리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때문에 김옥균 등 친 일본 세력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이것이 나중에 갑신정변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이들의 친일은 선진문명을 배우는데 이용하자는 친일이었지 사대적 사상의 친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신문 창간 준비

임오군란의 참패로 선진국의 힘을 깨달은 고종은 1882년 9월 드디어 개화를 결심하고 급진개화파인 금릉위 박영효를 일본에 전권대사로 특파했다.

개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파 박영효를 일본에 보낸 고종황제. 문명개화를 위해 신문을 발행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개화를 원하는 백성들의 돛대 역할에 앞장섰다. 서양의복인 양장을 입고 있는 고종황제 모습.
개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파 박영효를 일본에 보낸 고종황제. 문명개화를 위해 신문을 발행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개화를 원하는 백성들의 돛대 역할에 앞장섰다. 서양의복인 양장을 입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때 박영효는 개화는 물론 신문제작에 관한 일까지 거의 전권을 부여받은 전권대사였다. 박영효는 조선 제25대 철종의 부마(駙馬‧사위)로 서녀 숙의 범씨 소생 영혜옹주의 남편이고 당시 나이 22세였다. 박영효의 일본 특파는 표면적으로는 두 달 전에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파괴된 일본 공사관 및 인명 피해 등에 대한 피해보상 교섭이었으나 내밀하게는 문명개화를 위해 속히 신문을 발행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전권대사로 특파되어 신문 창간의 권한을 부여 받은 박영효. 그는 철종의 부마였다. ⓒ연합뉴스

그는 일본에 건너가자마자 당시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자 계몽 사상가이며 언론인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게이오대학교의 전신)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를 만났다. 당시 게이오기주쿠에는 제1차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파견되었다가 그 학교에 유학생으로 남은 조선 청년 유길준(兪吉濬)이 재학하고 있었다.

일본의 선각자이자 게이오기주쿠의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 ⓒWikimedia Commons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그가 발행하는 신문에 논설을 기고(寄稿)하는 등 일정 부분 신문 제작에도 관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