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 기자수첩] 잡지 귀재 M부장과 L지의 추억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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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 기자수첩] 잡지 귀재 M부장과 L지의 추억

주부종합지의 시대를 지나 1980년대 중반부터 많은 여성지들이 창간되고 폐간되면서 분야별로 무수한 잡지들이 무한 경쟁을 하고 있지만 30년 넘게 이름을 지키고 있는 여성지들이 있다. ⓒ남혜경


머리 자른 표지로 모던 보여준 새 여성지,
아트 디렉터 시대를 열다


 

주부 잡지 4대 천왕 속 야심차게 준비한 L지

오늘은 1988년을 넘어 1980년대 초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전문 출판사에서 발행하던 <주부생활>과 <여원>, 일간지 발행의 <여성중앙>과 <여성동아>, 태평성대였던 주부 잡지 4대 천왕 시절을 지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늘어난 독자층과 경제 호황에 힘입어 새로운 여성지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매체를 옮겨 다녔지만 <레이디경향>은 필자가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고, 당시의 월간 여성지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신개념 잡지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오랜 시간 여성지 지존이었던 <주부생활> 출신으로 잡지의 귀재로 불리던 M부장은 내가 첫 직장인 광고대행사의 출판부에 있을 때 말 못할 사연으로 잠시 잡지계를 떠나 우리 부서장으로 망명해 와 있었다. 재기와 열정만큼 넘치는 괴팍함도 갖고 있던 그는 지금도 미스터리한 레전드로 불리는 인물이다. 여하튼 그에게서 잡지의 기획과 글쓰기, 편집을 배운 나는 웬일로 그의 어여쁨을 받아 경향신문이 의욕적으로 창간하는 새 여성지의 창간 데스크로 발탁된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당시는 잡지 창간에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준비 기간을 두어 인력을 충원하고 편집과 영업, 광고의 장기 전략을 짜던 호시절이었다. M부장의 지휘 아래 초짜와 경력을 합쳐 열두어 명 되는 기자들이 온갖 시행착오를 하며 기기묘묘한 아이디어로 세상에 없는 잡지를 만들 것처럼 설쳐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즐거운 기억이다.

 

발간 주기부터 남달랐던 L지의 차별화 전략

새 여성지의 차별화 전략은 달라진 소비생활의 변화와 속도에 맞게 월 2회 발간으로, 문예와 가사 위주의 주부 잡지와 다른 젊은 여성들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거기에 걸맞은 과감하고 모던한 편집 디자인을 선보인다는 것이었다. 열흘에 한 번 출간하는 순간(旬刊)은 있어도 보름간이란 어휘도 개념도 그 전까진 없었으니 발간 주기부터 파격이었다.

보름에 한 번 발간되니 십오야로 하자고?

일단 월 2회 발간하는 책자의 콘셉트에 맞는 제호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그때까지의 제호는 모두 일본 잡지의 번역 투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당시 출판 시장은 일본 문화의 영향이 커서 인쇄 용어까지 일본어를 그대로 쓸 정도였다. 우먼, 레이디, 차밍 등의 여성스러운 영어 단어에 십오야 등의 촌발 날리는 어휘들까지 섞여서 날아다닌 끝에 무난하면서도 젊은 여성을 뜻하고 신문사의 이름이 붙는 제호 <레이디경향>으로 결정되었다.

가장 혁신적인 시도는, 편집에 전문 디자인의 개념을 처음 들여와 취재기자 한 명과 디자이너 한 명이 조를 이루는 시스템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취재기자가 지면의 레이아웃을 직접 해서 미술팀으로 넘기면 주문대로 선 작업이나 일러스트 등만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하고 있었으니 <레이디경향>은 동종 업계에서 상당히 앞서갔던 셈이다. 편집 디자인 개념을 처음 도입한 잡지는 고(故) 한창기 씨가 펴낸 <뿌리깊은 나무>(1976년 창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문 여성지 춘추전국시대를 열다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취재기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기사에 맞게 사진은 무엇으로 하고 어떻게 촬영하며 원고 분량은 얼마 만큼이고 거기에 맞는 디자인은 어떤 식으로 한다는 협업이 이루어졌다. 마감이 되면 둘이 같이 밤샘을 하며 지면을 완성시키곤 했다.

이런 시도로 디자인이 기사까지 리드하는 아트 디렉터 시대가 열렸으며, 우리 출판문화의 스타일이 일본식에서 미국과 유럽식으로 바뀌는 선도 역할을 <레이디경향>이 하게 되었다. 당시로선 금기였던, 얼굴의 머리를 잘라 이마에 제호가 올라간 창간호 표지는 모두를 경악시키며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생머리에 블루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창간호 표지 인물은 당시 새로운 스타였던 탤런트 정애리 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이 잡지는 패션의 해외 로케 촬영과 여행 전문 기사로 글보다 사진을 중심에 두는 지면 배치, 독자층을 주부에서 미혼 여성으로 넓혀 생활 기사를 가사에서 문화로 확장한 것 등, 앞서고 신선한 시도로 꾸준히 이슈가 되면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패션, 인테리어, 요리, 미용 등 각 분야의 전문 여성지 춘추전국시대를 여는 변화에 <레이디경향>이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혁신의 중심 M부장과 L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이 모든 혁신은 M부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키는 작지만 야심은 컸던 남자,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모든 이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쳐대던 M부장. 내가 들이민 원고지를 몇 번이나 쓰레기통으로 직행시켜 화장실에서 울게 만들었던 첫 상사. 전설의 M부장은 그 이후에도 포스트 <주부생활>이라 할 수 있는 <우먼센스>와 <마리안느> 등의 창간 데스크로 활약했으나, 천재의 불운인지 본인의 자기관리가 미흡했던 탓인지 몇 번의 부침 끝에 아직도 출판 현역에 있다고 들었다.

<레이디경향>은 이후 월간지로 바뀌었고 숱한 여성지들이 창간되고 폐간되는 전쟁터에서, 우리 사주로 독립 언론이 된 경향신문의 분투 속에 꿋꿋이 30년 넘게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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