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31 –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과 조선분할론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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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31 –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과 조선분할론

두 차례의 회담에서 은밀하게 오간 조선분할론

15924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선봉군 160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30일 한성을 떠나 몽진(蒙塵,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난 감) 길에 올랐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58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62일 고니시의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선조의 뒤를 쫓아오자 다시 평양성을 서둘러 떠나 73일 의주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며칠 후인 7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50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대국의 천군(天軍)이란 자만심을 내세운 채 적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책이었다. <손자병법>에서 말한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나조차도 모르면 싸움에서 반드시 위태롭다는 뜻이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제2군은 724일 함경도 험지(險地)를 거쳐 여진족이 있는 두만강 언저리까지 도착했다. 그 즈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왜군에 투항한 순왜(順倭)인 국경인(鞠景仁)의 밀고로 가토군에게 사로잡혔다. 조선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풍전등화(風前燈火) 형세였다.

그동안 명나라 조정에 애걸복걸한 결과 159317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본진 5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敗將) 조승훈과 조선군과의 연합으로 평양성을 마침내 함락시켰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蹲砲) 등 화포를 발사하여 평양성을 타격했다. 이때 승기(勝機)를 잡은 이여송 제독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27일 경기도 고양의 여석령(礪石嶺)에 매복해 있던 왜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 전시재상(戰時宰相) 류성룡(柳成龍)은 이여송 제독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 한다고 애원하며 간청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이 한 차례씩 패전과 승전을 주고받았던 평양성 전투. ⓒ김동철

조승훈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왜군의 세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하였다. 밀고 당기는 우여곡절 끝에 15929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 후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159348일 용산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이 두 회담에서 심유경과 고니시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조선 조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류성룡 등 몇몇 대신은 조선 강토를 가지고 찧고 까부는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형편이어서 당당히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 땅을 둘러싼 흥정에서 정작 밀려나버린 조선

15936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강화교섭차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과 함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 나고야성(名護屋城)에 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和件 7)를 제시했다화건 7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명 황제의 왕녀를 일본 천황에게 시집보낸다.

둘째 감합무역(勘合貿易, 조공 형식 제한무역)을 부활한다.

셋째 일, 명 양국의 대신은 우호의 서사(誓詞)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 8도 중 북 4도와 한성(서울)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

다섯째 북 4도를 돌려주는 대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여섯째 포로로 잡은 두 조선 왕자를 돌려보낸다.

일곱째 조선의 대신은 일본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목적은, 명군은 싸우지 않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는 것이고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위한 영토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화건 7조는 명 황제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명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승 겐쇼(玄蘇)는 화건 7조 대신에 일본의 항복 문서를 위작(僞作)하여 명 황제(神宗)에게 바쳤다.

15944월 도사 담종인(譚宗仁)과 도독 유정(劉綎)은 조선군에게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내려 왜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반박문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명 황제 신종(神宗)항복한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일본왕(日本王)으로 임명하자 15969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강화교섭을 결렬시켰다. 그리고 조선 남부 4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대한 보복 조치로 조선 땅, 특히 전라도(赤國) 지방에 대한 보복 살육전을 벌여 피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수백 차례 분탕질과 노략질이 자행되었고 전라도 백성들의 수급(首級) 대신 코와 귀를 잘라 도요토미에게 전과(戰果)를 보고했다. 왜병 1인당 3개 이상씩 할당을 했는데 조선 관군과 명군은 물론이고 수훈을 세우기 위해 일반 백성들의 코와 귀까지 무자비하게 잘라갔다. 교토(京都)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도요꾸니 진쟈(豊國神社)의 정문 앞에 조그마한 봉분이 있는데 그것이 귀무덤(耳塚)이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 관군과 명군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코와 귀까지 무자비하게 잘라간 왜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귀무덤(耳塚). ⓒ김동철
정유재란 당시 조선 관군과 명군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코와 귀까지 무자비하게 잘라간 왜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귀무덤(耳塚). ⓒ김동철

159775일 강화협상에서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기 연출이 들통나자 심유경은 경남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체포되어 목이 잘렸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 땅을 놓고 흥정하는 동안 조선은 어디에도 존재감이 없었다. 1953년 한국전쟁 때 휴전회담의 당사자는 미군과 중국북한군이었다. 정작 당사자가 돼야 할 대한민국 당국은 자신의 운명(DMZ 남북 분할)을 그저 멀리서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조정의 교섭 시도 결렬, 이후의 전쟁 상황

명나라에 외교권(外交權)과 군통수권(軍統帥權)을 빼앗긴 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던 조정은 나름대로 묘책을 짜냈다. 바로 의승장(義僧將)을 동원, 적장과의 교섭에 나섰다. 1594(선조 27년) 조선 대표 유정(惟政, 四溟大師)이 단신으로 서생포 왜성에 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4차례 걸쳐 휴전을 위한 강화회담을 벌였다. 그러나 가토는 조선 남부 4도 할양 등 얼토당토않은 무리한 요구를 했으므로 결렬되었다. 승병인 유정 사명당은 의승군(義僧軍)의 원조인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숭상했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폈던 선비의 나라 조선이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전란 때 적절히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95210일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명의 유격장군 진린(陳璘)이 선조 28년 1월 12일 죽도(김해) 왜성에 도착한 뒤 이곳에서 하루 숙식(宿食)한 후 13일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1시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있는 웅천 왜성에 도착했다. 여기서 명의 대표인 진린, 담종인, 유대무와 고니시 유키나가, 현소, 죽계 등 일본 대표는 상호 철군을 위한 화의(和議)를 시작했다.”

이때 시종수행원인 접반사(接伴使)로 따라간 이시발(李時發)이 쓴 당시의 상황 기록을 보면 죽도 왜성 및 웅천 왜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정월 12일 일찌감치 진 유천에서 출발하여 밀양을 지나 김해에 정박하였는데 죽도의 진영에 있는 소장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곳에서 잠을 잤다. 그 진영의 넓이가 평양성 정도나 되었고 삼면이 강에 임해 있었으며 목채와 토성으로 둘러싸였고 그 안에 석성을 쌓았다.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偶)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1만여 명의 병사를 수용할 만한 크기였다. 성 밑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에게 붙어사는 우리 백성들은 성 밖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일구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였다.”

1594년 명과 화의가 진척되자 159562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부산포, 죽도, 가덕도 왜성 등 몇 개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태우고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한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는 서생포 왜성에서 기장의 죽성리 왜성으로 옮긴 뒤 15966월 다시 일본으로 철수하여 후시미로 갔다가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재입성했다.

가토는 1597114일 정유재란 때 제1번대 선봉장으로 14700명의 왜군을 이끌고 300척의 배로 부산포에 상륙해 양산을 거쳐 서생포 왜성에 다시 주둔했다. 곧이어 새로 축성된 울산 왜성으로 옮긴 후 159815일 울산 왜성(도산성) 전투에서 고전(苦戰)을 면치 못한 뒤 서생포로 도망해 간 가토는 울산 전투에서 겪은 치욕을 삭히지 못하고 할복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앙숙인 고시니 유키나가의 만류로 서생포에서 농성하다가 부산포 왜성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육상 결전, 울산 왜성 전투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과 왜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 울산성 전투다. 159710월 울산에 도착한 왜병 16000명은 울산읍성 및 병영성을 헐어서 40일 만에 왜성을 축성,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그러나 축성한지 3일 만인 1597년(선조 30년) 1223부터 다음 해 14일까지 류성룡, 권율, 양호가 이끄는 44000명의 조명연합군이 성을 포위, 맹공격하자 가토 기요마사와 왜병 3000명은 성 안으로 후퇴하여 농성 항전했다. 이때 식량과 식수는 다 떨어지고 추위가 혹독해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밤에 몰래 성 밖으로 나가 태화강 물을 떠왔으나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말을 잡아먹고 말의 피와 오줌을 마시고 심지어 벽에 바른 종이를 삶아먹는 등 극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159814일 서생포에서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13000명 구원군이 도착하여 배후를 공격하자 쌍방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혈전 끝에 조명연합군이 경주로 퇴각하자 왜군은 성벽을 3중으로 쌓고 수비하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1차 도산성 전투).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과 왜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울산성 전투도. ⓒ김동철

다시 15989월 조명연합군의 전면 포위 공격에 항전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을 때 가토는 15981118일 야밤에 성을 불태우고 서생포 왜성으로 도주했다. 1차 도산성 전투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으로 가토는 일본 구주(九州)의 구마모토성(熊本城)을 축성할 때 다다미 속에 짚 대신 고구마줄기를 넣어 비상식량으로 하고 성 내 우물도 120개를 팠다고 한다. 15988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102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년)의 퇴각 명령에 따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서생포성 안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1124일 명()의 제독 마귀(麻貴)는 울산과 서생포 왜성에 입성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울산 왜성 전투가 마지막 육상 결전이었고,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순국(殉國)한 노량해전이었다.

경상도 민속 농악 중 신나는 구절 쾌지나 칭칭 나네쾌재라! 청정(淸正)이 쫓겨나가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백성들은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맑고 정의롭다는 본래 뜻과는 다르게 ()요마사또는 살인, 약탈의 화신(化身)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