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화를 위해서는 신문 창간이 우선이다” – 신문야사 ④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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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를 위해서는 신문 창간이 우선이다” – 신문야사 ④

고종, 일본으로 박영효 등 차관단 파견

1882년 9월 19일. 박영효 일행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밀명이란 임오군란 피해 보상액과 신문 창간 비용의 차관이었다. 조선은 임오군란 피해 보상 때문에 일본과 8월 30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했다. 조약 내용에는 일본 조해자(遭害者) 유족위문금과 일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50만원을 매년 10만원씩 5년에 걸쳐 지불할 것과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자위권으로 1개 대대(150명)의 일본 군인들을 공사관에 주둔케 하며, 부차적으로 부산, 원산과 인천 등 개항지에서 일본인의 상업 활동 범위와 국내 여행 자유화 등을 보장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개화 비용 등으로 국고가 비어있어 당장 그만한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고종은 궁리 끝에 그 돈을 일본에서 차관하기로 하고 9월 19일 서둘러 박영효‧김옥균‧김만식‧홍영식‧서광범‧민영익 등 친일(親日) 개화파 인사들을 차관단으로 구성해 일본으로 특파했다. 친일 개화파들이 차관 협상에 더 유리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고종은 박영효와 김옥균을 은밀히 불러 이 차관을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 차관 속에는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과 조선 인재들의 일본 유학 경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일본 정부가 차관을 수락해줄지 여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임오군란 피해보상액과 신문창간 비용 차관의 밀명을 받은 박영효. 일본의 선진문물을 관찰하곧 돌아와 조선의 개화에 적극 앞장섰다. ⓒ연합뉴스
임오군란 피해보상액과 신문 창간 비용 차관의 밀명을 받은 박영효. 일본의 선진문물을 관찰하고 돌아와 조선의 개화에 적극 앞장섰다. ⓒ연합뉴스

박영효는 최초로 태극기를 그리지 않았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가던 박영효가 배 위에서 최초로 태극기(太極旗, 당시 조선 국기)를 그려 1882년 9월 25일에 고베의 숙소인 니시무라야에 국기(國旗)를 게양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수신사 박영효가 처음으로 태극기를 고안하여 그렸다는 설이 일반적이었으나 최근에 박영효 이전에 이미 태극기가 있었다는 사실(史實)이 밝혀졌다. 그것은 ‘태극기는 고종이 직접 도안했다’는 설이다.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조선은 1876년 2월 강화도조약 때 일본 측으로부터 “일본 국기를 게양한 선박에 감히 발포할 수 있느냐”고 추궁 당했다. 당시 회담 대표였던 신헌(申櫶)은 국가 간 조약(條約)이 무언지도, 국기가 무엇인지도 몰라 당황했었다고 한다. 고종이 그 말을 듣고 즉각 국기를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태극기였다. 고종은 태극 문양은 물론 바탕색까지도 손수 지적했다는 것이다. 박영효의 태극기는 그것을 본 뜬 것이라는 설이다.

태극기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지난 2008년 2월 28일 독립기념관은 박영효가 1882년 8월 9일에 일본에서 그린 태극기 사본을 영국에서 구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8월 9일에는 박영효가 아직 한양에 있을 때다. 왜냐하면 8월 30일에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고 박영효 일행은 9월 19일에야 부산에서 일본으로 출항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발견된 태극기 사본은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를 일본이 복사해둔 것인데 1882년 11월 1일 일본외무성 외무대리(차관)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인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첨부했던 것이라고 했다.

박영효가 그렸던 태극기. ⓒ연합뉴스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 ⓒ연합뉴스

그런데 이 태극기보다 4개월 전인 1882년 7월 미국 해군부의 <해양 국가들의 깃발>이란 책에 이미 비슷한 태극기가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영효가 그린 것보다 2개월이나 앞선 것이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 수록된 태극기도 1882년 5월 22일 조미(朝美)통상수호조약 때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된 조선 국기라고 주장했다.

 

태극기는 고종이 직접 그렸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태극기를 게양한 박영효와의 현장 인터뷰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발행하던 신문인 시사신보(時事新報) 제179호(1882년 10월 2일자)에 게재되었는데, 그 기사가 발굴된 점이다.

기사 내용을 보면“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니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고종)은 (이런 간섭을)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 내지 않겠다 하여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 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1997년 10월 9일 서울신문사刊 뉴스피플 제288호에 게재)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후 첫 수교국인 미국과의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은 청나라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청나라는 내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이 조약을 적극 권장했다. 개화승 이동인이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을 통해 암약하였고 조약 초안까지 작성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이었다.

조약 체결 당시 종주국 특사로 파견 온 마건충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기 때문에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국기로 게양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전권특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은 이것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하여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새로 제정해서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때 고종이 만들어 게양한 것이 태극기이며, 태극기를 도안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사람도 고종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태극기는 박영효에 의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국기로서 공식 게양되었다. 태극기는 1년 후인 1883년 8월 3일에 조선의 공식 국기로 선포되었다(고종실록). 이 조선 국기를 태극기란 이름으로 표현한 것은 1942년 임시정부였고,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채택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도움으로 신문 창간 자금 마련

박영효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찾아가 일본 최고의 지성이자 계몽철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를 만났다. 통역으로 유학생인 유길준이 배석했을 터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개화승 이동인의 중개로 1880년 6월 25일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왔던 김홍집(金弘集)과도 교제가 깊은 지한파(知韓派) 인사였다.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조선의 실정과 개화 문제 등에 대하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후쿠자와는 박영효가 전한 고종의 뜻을 일본 정부에 전하고 관료들을 설득하여 조선 정부의 배상금 50만원의 상환기간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시켜주는가 하면, 조선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 17만원도 요코하마에 있는 쇼킨은행(正金銀行)에서 차관해주는 등 실로 파격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영효는 이 자금 중 5만원을 당장 제물포조약 1차 보상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12만원은 신문 제작과 유학생 파견 경비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박영효 일행은 100일 동안 일본에 체류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전과는 달리 이들을 국빈급으로 특별대우하고 체류비용도 전액 부담해 주었다. 이들은 일본의 선진문물‧제도 등을 구석구석 관찰하며 조선 개화의 모델은 반드시 일본식이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바로 이 결심이 중국식 개화를 모방하려는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수구파)들과 충돌하게 된다.

 

개화 위해서는 신문 발행이 필수

조선 정부의 배상금 차관은 물론 신문 창간 자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박영효 일행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일본의 호의에 크게 감동했다. 후쿠자와는 박영효에게 “조선의 개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신문을 창간해야 한다”면서 신문을 통해 개화사상을 국민에게 전파하는 것이 개화를 성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 개화와 계몽을 위한 수단, 모든 국민이 상하 신분 차별 없이 쉽게 구독하여 읽을 수 있는 신문을 지목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지도층의 개화사상이 밑바닥 민중들에게까지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분명 이런 신문을 창간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1년 후인 1883년 조선에서 창간된 <한성순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바라던 그대로의 신문으로 창간되었을까?

일본 근대화의 핵심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 동상.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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