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32 – 선조의 피난길 밥상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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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32 – 선조의 피난길 밥상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성을 떠다는 선조의 파천길. 드라마  중에서. ©김동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성을 떠나는 선조의 파천길.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김동철

처량하기 그지없는 임진년의 그날

<선조실록> 15924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의 역사 기록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는 전쟁이 일어난 당시 조선 조정의 급박한 상황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413일 부산포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16000여 명)20일 동안 단숨에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달려 53일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아연실색(啞然失色)한 선조는 당시 명장이라는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어서 빨리 가서 왜군을 막으라는 긴급한 명령을 내리고 급히 도성을 빠져나갈 계책을 세웠다부산포에 왜군이 대거 상륙했다는 급보를 전한 사람은 경상좌수사였던 박홍(朴泓)이었다.

<선조실록> 4월 17일 기록이다포시(哺時, 저녁 때)에 변방의 급보가 한양에 도착했다. 즉시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300명의 정예 병사들을 데리고 상주로 내려가서 적을 막도록 했으나 패하여 종사관 박지(朴篪), 윤섬(尹暹) 등은 죽고 이일은 혼자 말을 타고 도망쳐서 죽음을 면하였다.

이어 퇴각한 이일이 조정에 급보를 올렸다. <선조실록>이다.

신립을 삼도 순변사에 임명하였다. 임금이 직접 나와서 그를 전송하면서 보검(寶劍) 한 자루를 주며 말하기를 ‘이일 이하 그 누구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다 처단하라’고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 궁궐 보수와 각종 기물을 제작하는 관청)의 무기들을 있는 대로 전부 다 꺼냈는데, 도성 사람들은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

420일 병조판서에 김응남(金應南), 병조참판에 심충겸(沈忠謙), 체찰사에 류성룡(柳成龍)이 임명돼 일단 전시내각이 짜여졌다. 김응남은 어가를 호종(扈從)하는 총책임자가 됐다초조하고 다급해진 선조는 대신들과 백성을 안심시킨답시고 점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임금이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목성(歲星)이 비치는 나라를 치는 자는 반드시 그 재앙을 받는 법이다. 지금 목성이 연(燕) 분야(천문학에서 중국 전역을 9개 주로 나눌 때 연나라는 동북 지방으로 조선은 연나라 지역에 속했다)에 있으니 적은 반드시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_ 1592년 4월 28일자 <선조실록>

오죽 믿을 구석이 없었으면 점술 이야기를 꺼냈을까. 처량하고 눈물겨운 장면이다.

그토록 믿었던 이일과 신립이 모두 패했다는 소식에 선조는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백성 입장에서는 도망이 되겠지만, 전략상 이보(二步) 전진을 위한 일보(一步) 후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단 구심점인 왕이 살아 있어야, 대명(對明) 외교와 군사 관계 및 왜군을 섬멸시킬 계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선조는 도성을 떠나기 전에 징병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이원익은 청천강 입구 안주로 보내 민심을 다독이도록 하고 최흥원은 해서 지방으로 보냈다. 429일 윤두수(尹斗壽)에게 행차를 호위토록 하고 김귀영(金貴榮)과 윤탁연(尹卓然)에게는 임해군을 모시게 하고 한준(韓準)과 이기(李墍)에게 순화군을 모시고 함경북도로 빨리 가라고 지시했다. 그런 뒤 선조는 430일 경복궁을 나와 돈의문을 통해 사현(沙峴, 무악재)에 올랐을 때 도성을 뒤돌아보니 검은 연기를 내며 벌겋게 불타고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노비문서를 보관한 형조와 장례원(掌隷院)이 성난 백성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왜적이 한양에 들어오기 3일 전이었다.

불타는 궁궐. 드라마  중에서. ©김동철
불타는 궁궐.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김동철
불타는 국가 사료들.  드라마  중에서. ©김동철
불타는 국가 사료들.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김동철

궁인들은 쫓기는 사람의 황망한 심정에 임금의 수라상(水刺床)은커녕 주먹밥조차 챙길 경황(景況)이 없었을 것이다. 선조는 놀랄 틈도 없이 다급하게 걸음을 재촉해 홍제천을 지나 고양 벽제관을 거쳐 임진나루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도 조선의 비운(悲運)을 통탄했던지 마침 그때 억수로 비를 쏟아냈다.

선조실록은 그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큰비가 내렸는데 임금과 세자(광해군)는 말을 타고, 왕비는 지붕 있는 가마를 탔다. 숙의(淑儀, 종2품) 이하는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너무 세차게 퍼붓는 바람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녀들은 모두 통곡하며 걸어갔고 종친들과 문관, 무관들 합쳐서 그 수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명줄이 경각(頃刻)에 달렸다 해도 배꼽시계는 여지없이 소리를 냈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점심은 고양의 벽제관에서 먹게 되었는데 왕과 왕비의 밥상만 겨우 소식(小食)으로 준비하고 세자(광해군)는 끼니를 걸렀다. 미숫가루나 누룽지, 주먹밥 등 비상식량이 없었기에 호종하는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았다. 이 틈에 허기진 가마꾼들은 하나둘씩 도망갔다.

파주 혜음령을 넘으니 비가 더욱 심하게 왔다. 궁인이 약한 말을 타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울고 있었는데 울부짖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파주의 마산역을 그냥 지나치는데 밭 가운데 어떤 사람이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살라는 겁니까’ 하였다. _ <징비록>

그 즈음 한성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경성 도검찰사 이양원(李陽元)은 궁궐을 불태운 성난 백성들이 돌팔매질을 하려하자 김명원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황급히 도망쳤다.

임진강에 이르니 날은 이미 저물었고 비는 조금 그쳤다. 임금께서 배 안에 계시면서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나를 불러보시고 울고 계셨다. 신하들 또한 울었다. 임금께서 ‘내가 평일에 주색(酒色)에 빠지기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만났구나’ 하시었다. 이 날은 임금께서 종일토록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내관을 돌아보시고 손수 장과(長瓜, 기다란 오이) 두 개를 집어서 두 신하에게 내리시고 또 소주를 술잔에 부어내리도록 하셨으나 나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북쪽 언덕으로 건너오니 날이 캄캄하게 어두워서 어떤 물체도 분별할 수 없었다. 노 젓는 사공이 없어서 배가 떠날 수 없었다. 내가 몸소 나가 노 젓는 사람을 불러와야 했는데 입술이 타고 목소리가 쉬고 나서야 겨우 모시고 떠날 수 있었다. _ <징비록>

이 대목에서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진수성찬(珍羞盛饌) 수라상을 받던 임금의 입장은 더 말해 무엇 하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임금의 밥상인 수라상(水刺床)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서 받았으며, 아침 수라는 오전 10시경, 저녁 수라는 오후 5시경에 들었다. 수라상은 12첩 반상차림으로 원반과 곁반, 책상반의 3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반에는 흰수라, 곽탕(미역국), 조치(찌개), (), 전골, 김치, 장과 함께 12가지 반찬을 놓았다. 곁반에는 팥수라, 곰탕, 별식 육회, 별식 수란, 찻주발, 차관, 은공기 3, 은접시 3개이고, 책상반에는 전골, 장국, 고기, 참기름, 계란, 각색 채소 등을 놓았다. 12첩은 더운 구이(육류, 어류)와 찬 구이(, 더덕, 채소), 전유어, 편육, 숙채, 생채, 조리개(조림), 젓갈, 장과(장아찌), 마른 찬(자반, 튀각), 별찬, 생회 또는 숙회로 구성되었다.

임금의 수라상. ©김동철
임금의 수라상. ©김동철

이때 임진나루 남쪽 언덕에 승청(丞廳, 역사)이 있었는데 선조는 왜적이 이곳을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올까 염려하여 불태우게 했다. 그 불빛이 수 리()를 비추어서 간신히 길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일설에는 율곡 이이(李珥)가 말년을 보낸 임진나루 부근 화석정(花石亭)이란 정자를 태워서 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이는 자신의 상소가 선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먼 훗날을 생각하며 화석정의 서까래, 기둥, 마루 등 나무에 들기름을 발라놓았다. 행여 난이 일어나 선조가 이곳을 지난다면 불쏘시개라도 하라는 뜻이었으리라. 이 이야기를 생각해 낸 한성판윤 이항복(李恒福)이 화석정에 불을 내 선조의 파천길을 밝혔다고 한다. 아무리 이이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담은 이야기라고 하지만 불운을 암시한 것이어서 못내 찜찜하다.

쪽배에 실려 어두컴컴한 임진강을 건너던 선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곡 이이가 말년을 지낸 파주 임진강 화석정. ©김동철
율곡 이이가 말년을 지낸 파주 임진강 화석정. ©김동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1583년에 이이는 진시폐소(陳時弊疏)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옛날에 정치를 논의하였던 사람들은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국정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앎이 이치에 밝지 못하면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를 분별할 수 없고, 마음이 이치를 따르지 못하면 어진 사람을 등용해서 백성을 편안히 해 줄 방도를 시행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6년이 되었는데 정치는 나아짐이 없고 오히려 위태롭고 쇠망해 가는 양상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이이는 목숨을 내걸고 선조에게 폐정(弊政) 개혁에 대한 서릿발 같은 충간(忠諫)을 했다.

이이는 이보다 앞서 왜란 18년 전인 1574년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 중에 군정(軍政)을 개혁함으로써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가 들어 있다. 이이의 상소문대로 선조가 격물치지의 실학사상을 가지고 10만 양병(養兵)을 준비했더라면 지금처럼 외롭고 괴로운 형세는 면하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동파(東坡)에 도착하여 임금께서 동헌에 드시니 파주목사 허진(許晉)과 장단 부사 구효연(具孝淵)이 지공차원(支供差員, 임금의 수라상 담당자)의 임무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들이 주방 안에 들어가서 음식을 함부로 훔쳐 먹고 가버렸으므로 임금에게 진상할 음식이 없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은 겁이 나서 모두 도망쳐버리니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 밥을 먹지 못했다.

때마침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한양으로 들어가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서흥부사 남억(南祥)이 군사 30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니 말이 100여 필이나 되었다. 마침내 이 군사들을 짐꾼으로 충당하고 궁인들은 그 말을 나누어 타고 곧 길을 떠나려는데 사약(내관)이 나와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다. ‘하인들이 아직까지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쌀을 구하여 요기를 해야만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남억을 불러 군인들이 지닌 양식을 찾아내게 하니 헤어진 전대에 쌀과 좁쌀이 3, 4말이었다. 사약이 이것을 받아서 안으로 들어가 하인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_ <징비록>

드디어 57, 천신만고 끝에 평양성에 들어온 선조는 다소 안정을 찾은 듯 다음과 같이 하명했다.

수라는 생물(生物)로 할 것이며 수량도 풍족하게 하라. 세자 이하도 다 이에 따르도록 하라. 정빈(貞嬪) 홍씨, 정빈(靜嬪) 민씨, 숙의(淑儀, 종2품) 김씨, 숙용(淑容, 종3품) 김씨와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및 그 부인 두 사람에게는 각각 하루에 세 끼니씩, 시녀와 수모(水母)와 그 아래 나인들에게는 하루에 두 끼니씩 이날부터 지급하였다. _ 1592년 5월 8일 <선조실록>

황금수저로 태어나 피난길에 배고픔을 처음 알았고 시장이 반찬이던 때 선조는 한 어촌에서 잡아온 이라는 생선을 먹고 맛있다며 은어라고 불렀다. 1년 후 한양으로 돌아온 뒤 은어의 맛이 피난 시절과 다르자 에이, 도로 묵이라 불러라해서 도루묵이 됐다는 설이 있다. 선조는 이후 피난길에 반찬이 없어 신하들이 맨밥 먹는 것을 본 뒤 비상 반찬인 된장, 간장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편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던 백성들은 배가 등가죽에 붙을 때가 많았다. 왜군에게 짓밟히고 으깨져 어육(魚肉)이 다 된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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