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일본 최고의 지성인 후쿠자와 유키치 – 신문야사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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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일본 최고의 지성인 후쿠자와 유키치 – 신문야사⑤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 개화파가 존경 한 인물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년)를 가리켜 “일본에게 복을 주기위해 하늘이 내린 위인”이라고 표현했다. 춘원은 자기도 후쿠자와를 닮은 계몽사상가가 되고자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개화기의 선각자로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이며 언론인이자 저술가였다. 현재 일본 화폐 최고액권인 1만 엔권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의 세종대왕만큼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지식인 사이에서도 소문나 있었다. 1880년부터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을 비롯해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후쿠자와의 식견에 감탄하여 일본에 가면 누구보다 먼저 그를 방문할 정도였다.

일본 개화기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 ⓒWikimedia Commons
일본 개화기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 ⓒWikimedia Commons

후쿠자와는 박영효·김옥균·유길준·서재필 등 애국심에 불타는 대한의 청년들을 만나보고 조선에는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다. 특히 이들 중 권문세가 출신이면서도 개혁에 불타는 김옥균이나 종들이나 중인들이 훈련받는 군사학교를 자원하여 훈련받은 서재필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을 차별 없이 아끼고 지도하려고 애썼다.

 

하급 무사 가문 출신으로 일본 근대화의 1등 공신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0일 오사카현의 하급 무사인 부친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와 모친 오쥰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학에 뛰어났지만 요절한 관계로 유키치의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그는 부친의 죽음이 신분사회의 희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생 평등사회를 주장했다.

유키치는 처음에 유학을 배웠는데 워낙 학문의 재질이 출중하여 가르치는 선생을 능가할 정도였다. 18세 때 난학숙(蘭學塾, 네덜란드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면서 세계의 중심이 미국·영국이란 것을 알고 영어공부에 전념했다. 후에 일본 최초의 영화(英和)사전을 편찬할 정도였다.

유키치는 25세 때인 1860년부터 일본 개화파의 리더가 되었다. 1862년부터 도쿠가와 막부의 견외(見外)사절단이 되어 미국 등을 비롯한 프랑스·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독일·러시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구를 두루 견문했다.

견문을 하는 동안 그는 일본을 반드시 서구 열강들처럼 부강한 문명국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구미 선진국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산업시스템 등을 뿌리부터 세세하게 묻고 이해하며 기록했다. 2차 순방길에는 영국 런던에서 만국박람회를 관람했다. 그는 증기기관차, 전기 장비, 활판 식자기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서양식 병원, 은행 업무, 보험 업무, 우편법, 징집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 등도 이해했다. 유키치는 이런 문명은 반드시 동양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기술 관련 각종 서적과 지도, 지리서 등도 구입하여 가져왔다.

후쿠자와는 1863년 1월에 귀국하여 자기가 보고 배운 모든 것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서양사정(西洋事情)>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식자(識者)라면 거의 모두가 읽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국민계몽효과는 물론 그에게도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약 30년 후인 1895년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도 이 책이 모델이다). 이 책의 인세로 받은 수입으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교를 세웠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기주쿠 대학. ⓒWikimedia Commons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기주쿠대학. ⓒWikimedia Commons

그는 회계학의 기초가 되는 복식부기와 보험 제도를 일본에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면서 조선에서와 같이 막부의 수구파들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고비도 넘겼다. 그럴수록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철폐와 구습타파 등을 부르짖었다. 그는 입헌군주제, 개인의 자유, 권리보장, 사회 개혁, 의무교육론, 여성 권리 신장 등을 주장했고,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였으며 정치철학은 부국강변론과 국가 중심의 평등주의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일신이 독립해야 일국이 독립한다”는 등 그가 남긴 명언들이다.

 

자유(自由), 문화(文化) 개념을 창조한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유신 정부와 천황으로부터 국가에 봉사할 것을 여러 차례 종용 받았지만 자신은 재야에서 국민 계몽과 인재 육성, 언론 창달에 전념하는 것이 국가를 더 크게 돕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양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등 군국주의와 국가주의 일파를 비판하고 그들과도 단교했다. 일본국민은 그런 그를 오늘날까지 ‘후쿠자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경의를 표하며 더욱 칭송하고 있다. 1만 엔권 화폐의 인물이 된 이유다. 후쿠자와는 동양에 자유(自由)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문화(文化), 문명(文明)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면 이해가 빠를까?

그는 영어의 ‘Liberal, Liberalism’을 ‘자유(自由)’라고 풀이했다. 자유란 단어는 불교용어를 참조하여 만든 것으로 억압되지 않는 것, 자기 스스로 권리를 향유하고 누리는 것을 일컫는 단어이다. ‘Civilization’도 1867년 집필한 <서양사정 외편>에서 ‘문명(文明)개화’로 번역해 확산시키고, ‘Culture’도 ‘문화(文化)’라는 신조어로 만들어 전파했다.

 

갑신정변을 지켜본 후, 일본의 탈아론(脫亞論)을 주창

후쿠자와는 서구 여러 문명국을 돌아보면서 이 물결이 반드시 동양으로 넘어와 조선, 일본, 중국을 휩쓸어 버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일·중 3국이 손을 잡고 서둘러 개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이 척외(斥外)사상에 빠져 개화에 속도를 내지 못하자 일본이라도 먼저 서구화로 나가야된다고 주장하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보통 탈아론이라 함)을 주창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으로 편입한다는 사상은 일본 사회를 급속히 서구화시키기 시작했다.

탈아론 사상이 구체화된 것은 조선의 갑신정변을 지켜본 후였다. 그는 처음 조선의 젊은이들을 보고 조선은 충분히 개화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오군란(1883년) 후 진사사절단으로 온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차관을 요청할 때 발 벗고 나서서 17만원의 차관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제압한 청국의 세력과 그 힘을 뒤에 업은 수구파의 국정 농단이 도를 넘자 이를 염려했다. 이것을 차단하기 위해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정권을 쥐었다. 후쿠자와도 청국 세력의 확대 때문에 급진개화파를 도와 조선의 개혁을 완성시키려 했다. 성공한 다음 조선을 자유주의적인 영세중립국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나름의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버리자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돕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이 군대를 요청할 때 프랑스 공사의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한말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신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황인환

그 후 1885년 3월 16일 갑신정변에 가입한 인사들과 그 유가족에게 가해진 능지처참형 같은 비참한 고문과 최후를 전해 듣고 그는 분개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다음 날 자기의 신문 <시사신보>에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했다. 일본은 도무지 이런 미개하고 잔인무도한 나라들과 이웃하여 함께할 수 없으니 혼자라도 동양에서 벗어나 문명화·서구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885년 8월 신문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는 제하의 논설에서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빨리 망해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며 조선 정부를 비판했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4년 12월에 조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려고 하자 마치 자기 일처럼 물심양면으로 적극 돕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찬반이 엇갈린다. 여기에서는 신문사(新聞史)에 얽힌 부분만 추려서 소개했음을 밝힌다.

 

고종 “신문은 한성부에서 맡아서 간행하라”

후쿠자와 유키치는 박영효에게 17만원의 차관을 성사시킨 후 1883년 1월 6일 귀국하는 길에 신문 제작 기술자 6명과 한글과 한자 4호 활자, 인쇄시설 등 신문 제작에 필요한 기기 일습을 마련하여 실려 보냈다. 신문제작을 맡을 6명의 일본인은 편집 취재 담당 우시바 다쿠조, 다카하시 마사노부, 이노우에 가쿠고로 3명, 활판인쇄공 미와 고조, 사나다 겐조 2명, 목공 혼다 세이타로 등이었다.

박영효는 귀국하는 길에 게이오기주쿠 유학생 유길준도 함께 데리고 왔다.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신문제작 및 논설, 기사작성에 유경험자인 유길준은 신문 제작 및 행정의 총책이었다. 귀국 이튿날인 1월 7일 고종은 이번 일본 방문에 차관을 성사시킨 공로로 박영효를 한성판윤에 임명한다. 한성판윤은 지금의 서울시장이다.

박영효는 자주 고종을 알현하면서 신문제작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드디어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신문은(동문학이 아닌) 한성부에서 맡아서 간행하라”는 칙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3월 13일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유길준과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을 창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이자 개화사상가인 박영효.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최초 근대신문인 한성순보의 창간자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이자 개화사상가인 박영효.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최초 근대신문인 한성순보의 창간자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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