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역사]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 이란으로 돌아오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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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역사]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 이란으로 돌아오다

2016.02.01 · 심언준(전 미디어칸 대표) 작성

“아무것도 없소.”

15년 만에 이란으로 돌아오는 소감을 묻는 미국인 기자의 물음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비행기 안에서 테헤란을 바라보면서 이같이 말했다. 호메이니를 태운 비행기는 1979년 2월 1일 오전 테헤란의 메흐라바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15년 동안의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란으로 돌아오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앞서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국왕은 독재타도 시위에 쫓겨 해외로 탈출했다.

이란의 종교가, 정치가, 이란 혁명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시아파의 3거두 중 1인이며 국왕 팔레비의 ‘백색혁명’에 반대했다가 터키로 망명하여 이란 혁명을 주도하였다. 귀환 후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성립시키고 이맘의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지도자로서 이란을 통치하였다. ⓒ연합뉴스

터키, 프랑스 등에서 망명생활

호메이니는 지금까지도 이란 혁명의 최고지도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란 사람들은 아야톨라 대신 ‘이맘’이라고 부른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국제공항 이름이 ‘이맘호메이니국제공항’인 것을 보면 그가 이란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원해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던 호메이니는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이슬람 정신을 부활시킨 인물로 평가받지만, 서구에서는 기존 질서를 위협한 인물로 평가가 엇갈린다.

1900년 시아파 종교 지도자 집안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루홀라 무사위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되면서 이슬람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930년부터 고향인 호메인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호메이니’라고 붙여 사용했다.

이슬람 철학과 법률, 윤리 등에 관한 책을 통해 서구 영향에 물드는 것을 비판했고 팔레비 국왕의 서구화 운동인 ‘백색 혁명’에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슬람 순수성을 강조했던 호메이니는 1950년 후반 고위성직자에게 수여하는 아야톨라 칭호를 받았고, 1960년대에는 이미 시아파의 최고 종교 지도자로 대접받는다.

백색혁명에 반기를 든 호메이니는 시위를 조종한 이유로 구속돼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64년 11월 이란에서 강제 추방됐다. 이후 1965년 이란에서 터키로, 같은 해에 터키에서 이라크로, 1978년에는 이라크에서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거듭했다.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팔레비 왕조가 물러났고 2월 1일 귀국한 그는 곧바로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만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들에게 찬반투표를 실시해 98% 이상이 이슬람 공화정을 찬성했고, 이로써 이란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란의 초대 대통령은 아볼하산 바니사드이지만 호메이니는 이슬람의 종신 최고지도자가 된다.

 

이란 공화국 탄생의 주역

혁명정부는 팔레비 정권에서 일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처형하는 정치보복을 단행했다. 호메이니의 교지에 따라 이란 여성들은 베일을 착용하도록 강요받았고, 서구 음악이나 음주도 금지됐으며 이슬람법으로 규정된 처벌도 부활되기에 이르렀다.

호메이니는 1989년 사망 시까지 최고 정치 및 종교 지도자로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테헤란의 베헤쉬테 자흐라 공동묘지에 위치한 황금 돔 무덤은 호메이니 추종자들의 성소가 됐다.

최근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방문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킨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호메이니와의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청년 로하니는 영국 유학을 마친 1978년 프랑스로 건너와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혁명에 가담했다. 2월 1일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돌아올 때 로하니 역시 같은 에어프랑스 특별 항공기를 타고 왔다.

로하니는 이후 정계에 정식으로 입문했고 2000년대 초반 이라크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국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호메이니가 프랑스에서 이란으로 돌아온 지 37년 만에 로하니 대통령이 서구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