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12 탑골공원&연산군묘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12 탑골공원&연산군묘

탑골공원 내부 전경. ⓒ강기석
탑골공원 내부 전경. ⓒ강기석

탑골공원의 흑역사, 연산군의 연방원

탑골공원은 19193·1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훨씬 유래가 깊은 장소다. 조선 최악의 군주 연산군이 가장 잘 나갔을 때의 흔적이 아주 잠깐 묻어 있는 곳이다. 물론 연산군과 관련된 직접적인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증조할아버지 세조가 이곳에 세운 원각사(圓覺寺)를 폐지하고 연산군 자신을 위한 환락의 장소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탑골공원 한 귀퉁이에 보존되어 있는 각종 석물들. ⓒ강기석
탑골공원 한 귀퉁이에 보존되어 있는 각종 석물들. ⓒ강기석

원래 이곳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1464(세조 10)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가 원각사로 개명하고 도성 안 제일의 가람으로 중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 사후 척불(斥佛) 사조가 불기 시작했고, 마침내 연산군에 이르러 절을 폐쇄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겼다. 곧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 명과 악사 1000,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탑골공원 내에 있는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강기석
탑골공원 내에 있는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강기석

건물의 규모는 굉장하였는데,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 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였다는 10층 석탑, 원각사를 세운 내력과 경과를 새긴 비가 있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뒤 버려져 있다가 1514(중종 9) 이곳 건물들을 헐어 거기서 나온 재목으로 여러 다른 공용 건물을 세우는 데 쓰기 시작하면서 얼마 안 가 건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층 석탑만 남게 됐다. 380여 년이나 지나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Sir John McLeavy Brown)이 조선 고종 34년인 1897년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어서 1920년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탑골공원에 위치한 국보 2호 원각사 10층 석탑. ⓒ강기석
탑골공원에 위치한 국보 2호 원각사 10층 석탑. ⓒ강기석

북한산 자락에 쓸쓸히 자리한 연산군묘

연산군은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환락과 탐욕, 살생을 일삼다가 왕위에서 쫓겨나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귀양 장소였던 강화도 어디쯤에 묻혀 있는 것으로 짐작하겠지만(아니면 아예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관심조차 없겠지만) 뜻밖에도 그의 무덤은 지금은 서울 경내로 되어 있는 방학동 북한산 자락에 있다. 대군(大君)도 아닌 일개 군()의 자격으로 묘호와 능호 없이 부인과 딸, 사위와 함께 석상 몇 개의 시위를 받으며 쓸쓸히 묻혀 있을 뿐이다.

도봉구 방학동에 소재한 연산군 부부의 묘. ⓒ강기석
도봉구 방학동에 소재한 연산군 부부의 묘. ⓒ강기석

그가 선천적으로 잔인하고 음탕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된 것을 안 후에 급격히 군왕의 격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본성도 잃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연산군일기사평(史評)……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 단근질하기)·착흉(斮胸, 가슴 빠개기)·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고안해 낼 정도의 폭군이었으며 살인마였다. 그는 원각사 뿐 아니라 성균관까지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를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도 있었다.

연산군묘 입구에 있는 제실. ⓒ강기석
연산군묘 입구에 있는 제실. ⓒ강기석

연산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까지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 두 번의 사화가 있었다. 세조 이래 훈구파와 사림파 간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연산군 4)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사초(史草)에 게재한 것을 이극돈 등 훈구파가 교묘하게 이용해 사림파를 도륙낸 것이 무오사화다.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의 욕을 당했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 갔다.

연산군묘의 제일 위 왼쪽에 위치한 비석. ⓒ강기석
연산군묘의 제일 위 왼쪽에 위치한 비석. ⓒ강기석

갑자사화는 1504(연산군 10)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자신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으로 인한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연산군은 훈구파 재상들과 사림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계모뻘인 성종의 귀비까지도 때려 죽였고,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결국 심화로 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1506(연산군 12) 9월 성희안·박원종·유순정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했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귀양 갔다가 두 달 뒤 괴질에 걸려 죽어(일부에서는 암살 의혹도 제기함) 근처에 묻혔는데, 1512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천장된 것이다.

 

위치 및 지하철 안내

탑골공원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1
지하철 : 1호선 종로3가역 1번 출구

연산군묘
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북한산 둘레길 20구간)
지하철 : 4호선 쌍문역 2번 출구 -> 버스 13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