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조선 첫 신문 창간을 시작하다 – 신문야사⑥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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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조선 첫 신문 창간을 시작하다 – 신문야사⑥

유길준의 한성부 신문국장정

박영효는 1883년 3월 13일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한다. 그리고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가 파견한 신문 전문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불러 신문 창간 준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한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기주쿠에 1년 6개월동안 유학했었다. 박영효가 신문제작을 위해 그를 데리고 귀국하자 정부는 통리아문에서 외무 업무를 맡은 주사로 발령을 냈다. 그러나 그는 신문 창간 업무에만 전념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창간을 위해 한성부 신문국장정(漢城府 新聞局章程)을 먼저 기안하였다. 신문국장정에서 유길준은 신문 발간 기구의 명칭을 박문국(博文局)으로 할 것을 비롯하여, 신문 발행의 책임자를 한성부 3윤(三尹: 판윤·좌윤·우윤) 가운데 한 사람이 맡도록 왕명으로 정할 것과 교서원(校書員:번역·교정·인쇄·회계 담당) 2명과 외국어 번역을 담당하는 역관(譯官)으로 외국인 1명과 내국인 1명을 고용해야 한다는 등을 골자로 한 10개항을 만들었다. 10개항으로 된 신문국 장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문국의 이름은 박문국으로 하고 국(局)의 총책임자는 윤(尹)을 두되 대소 사무를 전관하기 위해 한성부의 3윤 중 1명을 왕명으로 겸임케 한다.

② 교서원(校書員) 2명을 두어 번역, 교정, 인쇄, 회계의 업무를 맡게 하며, 외국어의 번역을 위해 (역관으로) 내국인 1명과 외국인 1명을 고용 배치한다.

③ 박문국의 경비 일체는 스스로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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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박문국은 총명한 아동들을 뽑아 계몽하는 교육기관을 부설한다.

⑤ 신문이 새로 발간될 때마다 승정원에 일부를 바쳐 임금이 열람토록 하고 일부는 시강원(侍講院)에 바쳐 왕세자가 직접 읽도록 하며 그 여분은 중앙 각 부서와 8도 각 읍에 배포해서 백성들이 구독하도록 한다.

⑥ 승정원은 정부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매일 조보(朝報)를 박문국에 보낸다는 등 신문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실무 기구(機構)와 인력, 제작수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 발행처 박문국(博文局)

박문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인쇄소다. 1883년(고종 20년) 박영효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으로 수동식 활판인쇄기와 활자, 그리고 인쇄기술자들을 들여오면서 설립된 근대식 인쇄소다. 총재에는 외아문 독판 민영목, 부총재는 한성판윤 김만식이 맡았으며 고문으로는 일본에서 건너온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임명되었다.

박문국의 위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남부 저동(苧洞) 집(현재의 명동성당 맞은편)으로 이곳에 박문국 사옥과 공장이 있었다. 박문국은 1883년 음력 7월 15일에 설치되었고 10월 1일에 한성순보가 간행되었다.

당시 박문국이 갖추고 있던 인쇄시설은 한문 활자와 문선, 식자 및 정판에 필요한 공기구와 활판인쇄기 등이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길준이 만들 국한문혼용체 신문을 위해 한글 4호 활자를 이노우에 가쿠고로 편에 함께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한글 연(鉛)활자도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글 활자는 사실 박문국 설립 이전에 기독교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중국 교구에서 마련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이 있어야 선교를 용이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탄압을 피해 만주 봉천(奉天·하얼빈)에 인쇄소를 차려놓고 성서의 번역과 인쇄, 발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인 신자들의 도움으로 한글 목(木)활자를 개발하고, 이것을 일본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관계자들에게 보내 연활자(鉛活字)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들은 한글 발전에도 큰 공로가 인정된다.

또한 일본 상인들이 한글 활자를 개발하여 한글 서적을 인쇄해 조선에 판매했고, 장차 반드시 조선에서도 이 활자와 인쇄기 등이 필요하여 구매해 갈 것이라고 예견하고, 활자를 여러 벌 주조하여 보관했다는 추론도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국한문 활자 일습을 박영효에게 제공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이미 오래 전에 한글 활자를 개발하기 위해 한글에 정통한 조선인 학자를 참여시켰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글 서체와 한글의 구조, 단어의 용례 등에 능통한 학자들에게 일본 상인들이 서체 원본 제작을 의뢰했을 것이다. 그 학자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박문국 청사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 수구파들의 피습을 받아 파괴되면서 한성순보의 발행도 중단되는 아픈 역사를 가졌다.

 

박영효의 좌천

유길준은 신문의 창간사와 해설문 등을 직접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창간사와 해설문 등은 활자화되어 빛을 보지 못한다. 신문 제작을 책임진 한성판윤 박영효가 4월 10일(양력) 광주유수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1월 21일 고종의 신문 창간 윤허를 받은지 석 달도 못되어 조선 최초의 신문 창간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신문 창간 작업이 실패한 것은 자금 조달 문제도 있었지만, 박영효의 개인 비리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줄기찬 탄핵 때문이었다. 그 이면에는 박영효가 김옥균 등과 같은 급진개화파이기 때문에 온건개화파(수구파)의 모략과 공격도 숨어있었다. 온건개화파의 입장에서는 개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인 신문을 급진개화파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성부 판윤 산하에 있던 치도국(治道局:행정업무)·경순국(警巡局:치안업무)·박문국(博文局:인쇄, 출판) 중 박문국도 폐지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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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개화파의 모략으로 좌천된 박영효. 끝내 신문발간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Wikimedia Commons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해 1월 조선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분리하여 설치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동문학(同文學:중국에서 신문 등을 제작하는 기구인 통원관同文館을 본 뜬 기구)을 설치했으며 이곳에서 통역관 교육과 양성을 주 업무로 하면서 신문사 개설도 맡도록 했다. 이미 박영효가 한성부 신문국을 개설하기 이전에 그 기능을 가진 부서가 정부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길준이 박문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문 제작 기관을 독립시킨 것은 정부와 한성부 간의 신문 발간 힘겨루기에서도 독자적으로 신문제작만 전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나중에 한성순보 제작을 주도했던 온건개화파(수구파)가 박문국 조직을 그대로 살려서 동문학 산하로 옮겨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박영효의 좌천으로 신문 창간 작업이 중단되자 유길준은 신문제작 책임자 자리와 통리아문 주사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칭병(稱病)하며 칩거해버린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에서 파견한 신문 전문가 중 우시바 다쿠조와 다카하시 마사노부도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이노우에 가쿠고로만 홀로 남아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빛 보지 못한 유길준의 창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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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창간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 섰던 유길준. ⓒWikimedia Commons

유길준은 신문 창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창간사도 미리 써 놓았다.

“大朝鮮開國 四百九十二年 癸未 ◌月 ◌日에 局을 創建하고 ◌◌을 發行하니 紙上에 記載한 者는 第一 官令(관령), 第二 論說(논설), 第三 內國雜報(내국잡보), 第四 外國雜報(외국잡보), 第五 國勢一覽(국세일람), 弟六 文明事務(문명사무), 第七 物價(물가) 등 條項이니, 其刊度數는 每月 ◌回로 姑爲定例하니, 記載條目을 取捨增減하며, 또 其刊行度數는 增加하여 每月 ◌回를 發行하며 復爲 回하여 畢竟은 現今 文明하다 見稱하는 諸國에(서) 行하는 新聞紙와 같이 每日 刊行하기에 至하며 又(또) 本紙는 ◌◌의 第一號될 뿐 아니라 마땅히 我東方立國四千二百四十年以來 新聞公報刊行하는 第一號가 되는 者이라…”

이 창간사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1. 대조선 개국 492년(서기1883년)계미 ◌월 ◌일에 박문국을 창설하고 ◌◌이라는 신문을 발행한다. 본지는 ◌◌신문의 제1호이자, 우리나라 개국 4240년 이래 최초의 신문 제1호이다.

2. 지면은 (1) 관령, (2) 논설, (3) 국내뉴스,(4) 외국뉴스, (5) 국내 정세, (6) 문화·사회, (7) 경제란으로 구성한다.

3. 간행 횟수는 매달 ◌회로 정기적으로 발행하며, 기사가 넘칠 경우에는 발행 횟수를 늘려 ◌회를 더 증간할 수 있고, 종국에는 다른 선진국처럼 메일 발행하는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킨다. 처음 순간(旬刊)으로 발행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아직 신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4. 신문지란 국민의 식견을 넓히는 데 발행 목적이 있으므로 크게는 국제 정세로부터 작게는 개인의 수신(修身)에 이르기까지 악습을 타파하고 개명을 좇아 문명을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

5. 신문은 구독자가 많을 경우 하나의 큰 사업이 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관비(官費)로 정부가 발행하니 조선왕조의 성덕이며 인민을 보살피는 미덕이다.

창간사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조선 최초의 신문은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로 기획되었고, 발행 횟수도 결국은 일간신문으로 간행할 의도였다. 이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창한 꿈은 수구파의 정략에 말려 좌절되었다. 신문사적으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결국 조선 최초의 신문 창간은 수구파의 손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