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암 환자들의 기록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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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암 환자들의 기록

2016.02.25 · HEYDAY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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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10명중 3명은 살면서 한번이상 암에 걸린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암을 더 이상 ‘남의일’로 치부 할 수 없다는 뜻이죠. 이렇듯 나 또는 우리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을 미리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김미향(가명), 58세 / 대장암 ]

공무원이었던 나는 작년 10월 직원 건강검진에서 처음 암을 발견했다. 의사가 암일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설명했지만, 그저 오진일 거라 생각했다.


“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대장암 2~3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담담하게 0기부터 4기까지, 각각의 생존 확률에 대해 설명했고 나는 그제야 내가 정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

되짚어보니 그 즈음 대변을 봐도 시원하지 않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다. 친정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시긴 했어도 워낙 고령에 발병한 터라 가족력과는 무관한 줄 알았다. 술, 담배도 하지 않았고, 체중 역시 48~50kg을 유지했는데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치병 환자들이 겪는다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전부 겪게 되더라.

진단이 내려지고 얼마 되지 않아 대장과 림프절을 잘라 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그 뒤 항암 치료가 시작되기까지 생지옥을 경험했는데 몸과 마음이 다 아픈 상태이다 보니 더 살고 싶지가 않았다. 비참하게 말기암 환자가 되어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아들, 딸을 생각하니 도저히 자살은 할 수 없었다. 대단한 유산은 못 물려줄망정 평생 갈 상처를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저 버티고 또 버텼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원망의 대상이 남에게서 나로 변해가는 성숙한 경험을 했다. 암 진단을 받던 해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나는 나에게 가장 큰 근심을 안겨준 인물이 누구일까 생각하는 한편 그를 원망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하지만 기도를 올리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다 나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가 물려준 건강한 육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병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왜 화를 유연하게 다스리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다 보니 마음을 내려놓게 되더라.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지만 평생 안 해본 요리를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몸이 불편한 내가 끼니를 챙길 수도 없으니 참 난감했다. 암 환자일수록 영양을 고려한 식단을 챙겨 먹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얼마간 몸이 회복될 때까지 나는 요양원에 머물기로 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요양원에 들어가 잘 차려준 밥을 먹었고, 요가와 명상을 하며 안정을 되찾다 보니 컨디션이 부쩍 좋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양원 생활이 즐거운 건 함께 머물고 있는 30여 명의 희귀병 환자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운동을 하며 생활하다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는데 다들 비슷한 처지라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사실 하나도 와 닿지 않았는데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많은 위안을 줬다.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갈 때면 나는 평소처럼 곱게 화장을 한다. 종종 누군가 ‘식구 누가 아픈가 보죠’ 하고 물어오는데 그때마다 ‘내가 환자’라고 얘기하면 다들 ‘아직 젊은데’ 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우리 요양원엔 30대 암 환자도 있다. 교통사고처럼 벌어지는 일. 나는 그게 암이라고 생각한다.

“ 아직 3차 항암 치료가 남아 있지만 나는 씩씩하게 싸워볼 참이다. 식구들 모두 나를 걱정하지만 어차피 이 모든 과정은 나 혼자 겪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암 환자가 된 뒤로 가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덕분에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될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의 소중함, 순간순간 증폭되는 감동과 기쁨을 알게 돼서 참 다행이다.”

 


 

[ 기대석, 62세 / 간암 ]


“ 30여년 전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통증으로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 날은 우리 부부가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한 날이었는데 갑자기 복부에 심한 통증이 나타나 식사는커녕 제대로 누워 있기도 어려웠다. 그때 실려 간 신촌의 한 병원에서 장티푸스라며 약을 잔뜩 지어줬는데 그걸 먹고도 통증이 가라앉질 않자 나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병명을 찾아다녔고 한 달이 지나서야 서울대학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다. 남은 기간은 길어야 두 달.”

 

내가 왜 간암에 걸렸는지 생각해봤다. 그 당시 나는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꿈을 포기했다는 좌절감으로 술과 담배에 빠져 살았다. 4개월간 단 하루도 금주한 날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에 혼자 2홉(약 360mL)들이 소주를 8병까지 마셔댔으니 간이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던 그때는 암에 걸렸다 하면 가세가 기울어질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내 봉급이 월 30만원이었는데 한 달 병원비가 200만~300만원이었으니 우리 집 재산은 물론이고 부모님까지 집을 팔아가며 병원비를 대야 했다. 누가 봐도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를 임신한 아내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갓 태어난 아들을 입양 보낸 뒤 나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훗날 아들이 기적처럼 우리 가족을 찾아왔고 암을 이겨낸 나는 하루아침에 장성한 아들을 품에 안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서글픈 기억이다.

간은 물론이고 폐, 늑골, 척수까지 이미 암세포가 퍼진 내 몸에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했다. 그저 진통제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딱 죽었으면 좋겠다 싶은 통증이 찾아오곤 했지만 동시에 이대로 갈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나는 서울지하철공사 시험에 합격한 상태로 임용 교육을 기다렸던 상황이었고, 아직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딸의 아빠로서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5년만 더 살게 해주시면 아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그 기도를 올린 지 15년이 되던 해에 나는 큰딸과 훗날 생긴 둘째 딸(1남 2녀 중 막내)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말했다.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살고 싶다는 욕망은 나에게 큰 의지를 불어넣었다. 벽에 테니스 라켓을 걸어두고 몇 달 뒤 봄이 오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를 치러 가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제대로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발목의 힘을 기르겠다며 일어서려 노력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힘이 되는 조언은 “가장 좋은 백신은 우리 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다”라던 레지던트의 말이었다.

병원에서는 소고기를 먹으라고 했지만 그 당시 우리 형편에 소고기는 무리였다. 궁여지책으로 개고기를 푹 고아 하루 5~6번씩 마셨는데 확실히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된 듯하다. 가족들은 나에게 뽕나무 뿌리, 굼벵이 심지어 개똥까지 구해다 먹였다.

기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길어야 두 달을 내다봤던 나는 서서히 몸에 힘이 생기는 걸 느꼈다. 기다가 앉고 앉다 일어서는 등 하루하루 새로운 기적이 일어났고 급기야 그토록 갈망하던 공무원 연수 교육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모두 직장을 포기하라고 성화였지만, 이상하게 나는 내가 점점 더 나아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훗날 검사를 받아보니 간문맥(위장관, 이자, 지라, 쓸개 등으로부터 정맥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지는 일종의 통로)이 사라진 대신 이를 대체할 만한 수많은 혈관들이 새로 생겨났다고 하더라.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의사들이 건강검진 때마다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오는 통에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원 검사를 받아보면 현재 내 신체 나이는 50세 언저리다. 일주일에 40km를 걷고 매일 가벼운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하는 덕분이다. 내 연배의 친구들이 거의 다 복용하는 당뇨, 혈압약도 필요 없다.


“ 어떻게 암을 이겨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결국 의지의 문제라고 조언하고 싶다. 살 거란 희망을 갖고 포기하지 않으면 병에 지지 않을 확률도 높아진다. 이때 희망이란 내가 무엇을 위해, 얼마나 더 살고 싶은지처럼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가질 수 있다. 삶의 태도가 바뀌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점에서 나는 한때 암 환자였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

 


 

[ 정희영(가명), 59세 / 유방암 ]


“2011년 건강검진 날, 유방 초음파검사 과정에서 이상 소견이 나타났다. 곧바로 조직 검사가 이어졌고 난 그렇게 유방암 1기 환자라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해 큰딸이 몸을 다쳐 무척 놀란 데다 작은딸의 취업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 점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암 진단을 받은 뒤 나는 내 몸속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암마다 손꼽히는 명의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유방암 수술의 권위자인 서울대학교병원 노동영 교수를 찾아간 나는 나 같은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됐다. 대기 환자가 많아 진단 후 한 달을 기다려 수술을 받았는데 그사이 암이 진전됐는지 2기로 넘어간 상황이라고 했다.

피부과 의사인 우리 남편은 그나마 유방암은 예후가 좋은 편이라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나를 위로했다. 만일 식구들이 무겁고 심각하게 내 병을 받아들였다면 나 역시 훨씬 큰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항암치료는 수술 후 한달 뒤에 시작했다. 일단 3주 간격으로 항암 주사를 8번가량 맞았고, 한 달 뒤 다시 33번의 방사선치료에 들어갔다. 진단부터 수술, 치료에 이르기까지 1년가량이 걸린 듯하다. 항암 치료가 무척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이것도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항암 치료 과정에서 흔히 말초신경 장애를 얻어 손발이 붓고 저리는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는데, 나는 꾸준히 마사지를 받은 게도움이됐는지 큰 통증 없이 잘 넘길 수 있었다. 다만 머리카락이 다 빠져 여자로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암 환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과 위로를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심리적으로 더 불안한 마음이 들까 봐 관련 내용을 일절 찾아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나고 암 환자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음성의 한 센터를 찾아가 머문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아픈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점에서 우울한 기분이 들더라.”

 

아직 시집 안 간 두 딸을 놔두고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행히 두 딸 모두 가정을 이뤘고, 친정엄마로서 같이 결혼 준비를 도와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이 참 힘에 부쳤다. 건강한 사람도 내 나이가 되면 갱년기 때문에 고생하는데 나는 암까지 겪다 보니 이래저래 체력적인 소모가 컸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내색을 할 순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말로 하는 위로보다 함께 밥 한 끼 먹어주는 것이 훨씬 더 마음에 위안이 됐다. 암 환자들은 식욕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잘 챙겨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만큼 고충이 크다. 이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하다못해 같이 밥상에 앉아주기만 해도 그렇게 고마울 수 없더라.

식구들 모두 출근하고 나혼자 집에 있다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씩씩하다가도 그때마다 누가 옆에 같이 있어줬으면 하는 약한 마음이 들었다.

3년 전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국선도를 하고 있다. 생전 운동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 상쾌하고 좋다.


“5년간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라고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초조하다. 다행히 나는 경과가 좋았고 현재는 과거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전과 완벽히 똑같은 상태라고 보긴 어렵다. 우리나라는 항암 치료 이후엔 별다른 관리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환자 입장에서 더 외롭고 힘든 면이 있다. 이런 시스템이 잘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큰일을 겪고 보니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화내고 스트레스 받았던 지난날이 후회됐다. 지금은 웬만한 일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매사 담담해졌다. 이런 담대함을 미리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암이 나에게 가르쳐준 인생의 큰 가르침은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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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성(가명), 59세 / 직장암(폐로 전이) ]

직장암이 발병한 건 2003년 여름이었다. 방송에서 아무리 암 환자가 흔하다고 해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내가 암에 걸렸다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지체 없이 수술에 들어갔고 이후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얼마나 독한지 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대로 병상에 누워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힘들게 항암 치료까지 받았지만 꼭 1년 만에 폐 쪽에서 다시 암세포가 발견됐다. 암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재발까지 일어나다니 왜 나한테 이런 불행이 일어났는지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폐에서 발견된 종양은 2개였다. 하나는 크기가 좀 컸고 다른 하나는 크기가 좀 작은 상태라 일단 큰 종양부터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그럭저럭 잘 끝났지만 항암 치료 과정에서 오심, 구토 등이 나타나 15일 만에 치료를 포기하고 말았다. 뭔가 다른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인으로부터 생명나눔한의원이란 곳을 추천받아 반신반의하며 찾아가게 됐다.

병원 치료에 지쳤던 탓에 이번엔 한방으로 병을 다스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나눔한의원 안소미 원장님은 저주파 치료로 통증을 다스리거나 내부에 쌓인 독소를 배출해 환자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치료를 진행했고, 각종 약재를 달인 탕약을 마시거나 몸에 침, 부황, 뜸을 놓기도 했다. 특히 산삼을 배합해 만들었다는 산삼생명단(환의 형태)을 복용하거나 산삼생맥약침을 맞고 난 날이면 한결 몸이 가뿐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신체적 변화는 눈에서 먼저 시작됐다. 늘 침침하고 어둡던 눈이 밝아지고 안구에 오던 피로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마다 거뜬히 눈을 뜨면서부터 전에 하던 택시 운전도 슬슬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식단 관리 역시 중요했다. 나는 검정콩밥과 현미밥, 된장국, 청국장가루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었다. 콩 성분의 식품을 꾸준히 먹으면 암 위험이 최대 30% 이상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믿어보기로 했다. 택시 운전하며 피곤하거나 입이 심심할 때는 커피 대신 인삼사탕이나 직접 짜낸 복분자 원액을 마셨고, 직접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며 끼니를 해결했다. 식사 후 가벼운 산책 역시 필수였다. 돌이켜 생각해도 내가 건강을 위해 이렇게 신경 쓰고 노력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가부장적이었던 나는 암에 걸린 이후 가족들에게 좀 더 다정다감한 가장이 되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다. 생각해보니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과 쌓은 추억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다 같이 등산을 가거나 가까운 곳이라도 자주 여행을 다니려고 노력했다. 막상 다녀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소소한 기쁨을 모르고 그동안 살았을까 싶었다. 가족과의 시간들은 내가 암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데 큰 버팀목이 됐다.

6개월 만에 병원을 찾아가 CT 촬영을 했다. 사실 진작부터 검사를 해보고 싶었지만 혹시나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하게 될까 봐 미루고 미뤘던 검사였다. 폐에 남아 있는 작은 종양이 혹시 더 커지진 않았는지, 그사이 다른 기관으로 전이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됐지만 종양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현재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개인택시 운전을 하며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 가끔 승객들에게 내가 경험한 암에 대해 설명하곤 한다. 과거 내가 그랬듯 어디선가 말 못할 통증과 걱정을 겪고 있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승객 중에 암 환자 가족이 있을지. 여전히 암은 두려운 대상이지만 ‘걸리면 죽는다’는 식으로 체념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길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자생력과 회복력을 믿어보라는 것이다.”

 

*기사에 거론된 병원과 처방은 환자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기획 장혜정 일러스트 셔터스톡
※ 이 기사는 <헤이데이> 21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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