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들의 전쟁, 순왜와 항왜 [다시 쓰는 징비록 39]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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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들의 전쟁, 순왜와 항왜 [다시 쓰는 징비록 39]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7년 전쟁이 지루하게 펼쳐짐으로써 피아(彼我)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세작(細作)의 활동이 왕성해진 것이다.

세작은 간첩(間諜)을 일컫는데 그 은밀한 탐망, 척후 활동으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여 아군에게 이롭게 하려는 정보원이다. 이기는 전투를 주도했던 이순신 장군의 경우도 전투를 하기 전에는 항상 탐망선(探望船)을 띄우거나 탐망꾼을 적진으로 보내 적의 상황과 동태를 먼저 파악했다. 그럼으로써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이기는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눈과 귀 등 정보수집의 안테나가 되어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하려는 정보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전쟁 승패의 핵심요인이다. 손자병법에서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정보전략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간첩의 세작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순왜(順倭)는 왜군을 위하는 부역(附逆) 행위자로 매국노(賣國奴)를 가리킨다. 또 항왜(抗倭)는 귀순하여 왜군과 싸운 일본인을 말하고 항왜(降倭)는 단순히 귀순한 왜군을 말한다. 이 와중에 이중간첩이 등장해 양쪽 진영을 번갈아 가면서 각각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전황을 뒤흔들어 놓았다.

 

매국노(賣國奴) 순왜(順倭)

먼저 왜군에 부역한 순왜(順倭)의 경우다. 순왜는 주로 조선 조정에 반감을 품었거나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부역한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조선의 지도와 각종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나아가 왜군과 합세하여 조선군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587년 2월 정해왜변(丁亥倭變)이 일어났다. 왜구(倭寇)들이 열여덟 척의 왜선으로 전라도 남해안 손죽도를 침범한 사건이다. 이때 맞서 싸우던 녹도권관 이대원(李大源)이 전사하고 가리포 첨사 이필(李䟆)은 눈에 화살을 맞았다. 왜구들은 흥양땅과 가리포까지 확대하여 병선 4척을 빼앗아 도주하였다.

조정에서는 신립(申砬)과 변협(邊協)을 방어사로, 김명원(金命元)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변란을 수습케 했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왜구가 물러난 후였다. 정해왜변은 단순한 약탈과 방화, 납치의 수준에 그쳤던 왜구의 침탈이 아니라 일본 정규군의 탐색 및 정찰이 목적이었다. 전라도 사태가 종료된 뒤 음력 3월 10일 비변사에서는 전라좌수사 심암(沈巖)과 전라우수사 원호(元壕)에게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국문(鞫問, 중대한 죄인을 심문함)하였다.

창의토왜도. 의병장 정문부 진영에서 왜에 부역한 자를 참수하는 장면. ⓒ김동철
창의토왜도. 의병장 정문부 진영에서 왜에 부역한 자를 참수하는 장면. ⓒ김동철

이때 일본군의 앞잡이로 활약한 자가 진도출신 평민 사화동(沙火同, 사을화동)이었다. 3년 뒤인 1590년 음력 2월 28일 선조는 조선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조건으로 사을화동과 함께 왜구 두목들인 신사부로, 긴지로, 마고지로를 조선으로 송환, 모두 처형하였다.

 

왕자를 포박해 넘긴 순왜

함경도로 피난 와있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주었던 국경인(鞠景仁)과 김수량 등의 순왜도 있다. 당시 조선은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이반되어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적극적으로 왜군에 동조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업고 왜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빠르게 한양까지 북상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은 근왕병(勤王兵)을 모으기 위하여 함경도로 갔으나 민가를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하는 등의 행위로 지역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국경인, 국세필(鞠世弼, 국경인의 숙부), 김수량, 이언우(李彦祐), 함인수(咸麟壽), 정석수(鄭石壽), 전언국(田彦國) 등은 조선 왕자 일행을 억류하고 회령을 직접 통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또 임해군과 순화군을 호종했던 대신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과 황혁(黃赫) 부자,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부사 문몽헌(文夢軒), 온성부사 이수(李銖) 등과 그 가족을 함께 잡아 왜군에 넘겨 주었다.

북관대첩비.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물리친 정문부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것을 2005년 반환받았다. 경복의 비석은 복제품. ⓒ김동철
북관대첩비.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물리친 정문부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것을 2005년 반환받았다. 경복의 비석은 복제품. ⓒ김동철

국경인은 이 공으로 가토 기요마사에 의하여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로 봉해지고 회령을 통치하면서 횡포를 자행하다가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의 유인으로 붙잡혀 암살되었다.

1593년 3월 11일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선조에게 합계(合啓)하기를 “급제(及第) 김귀영(金貴榮)이 일찍이 대신으로서 왕자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들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적의 수중에 빠지게 하고 자신마저 사로잡혔으니 국가의 수치됨이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여태 군부(君父)의 원수를 전혀 모르고 한결같이 흉적들의 말을 따라 화의시키겠다고 몸을 빼서 돌아왔습니다. 만약 그대로 두고 문죄하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의 의리가 이로부터 끊어지고 강화의 의논이 이로 인해서 잇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의리가 밝아지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이 모두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만을 편안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찬출(竄黜, 벼슬을 빼앗고 귀양보냄)을 명하시어 호오(好惡, 좋음과 싫음)의 올바름을 보이소서”하였다.

4월 20일 선조가 이언우(李彦祐), 함인수(咸麟壽), 정석수(鄭石壽) 등을 처형하였다. 또한 공위겸(孔撝謙)은 영산 출신으로 당시 왜군에 항복한 부왜(附倭) 세력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왜군의 향도(嚮導)를 자임하여 함께 한양에 들어갔으며, 가솔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라고 썼다고 하며, 일설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참칭(僭稱)했다고도 한다. 부왜 활동으로 이름이 알려지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장 신초(辛礎)가 기지를 발휘하여 사로잡았고, 곽재우가 참살하였다.

 

용서받은 자, 공을 세우다

1593년 9월 4일 이순신 장군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제만춘(諸萬春)으로부터 입수한 왜적의 정황에 대한 종합보고서인 왜정장(倭情狀)을 올렸다.

“제만춘(諸萬春)은 무과 출신 장수로 반항도 없이 왜에 사로잡혀가 도리어 왜인의 심부름꾼이 되었고, 왜국까지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서사 반개(半介)와 같이 기거하면서 문서를 맡는 소임을 했으니 신하된 의리와 절개는 땅에 떨어졌다 할 것입니다. 더구나 글을 잘하고 사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곳에 반년이나 머물면서 간사한 적들의 정세와 모책을 상세히 정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치 간첩으로 보낸 사람 같기도 합니다. 격군 12명을 데리고 도망쳐온 것을 보면 가련하기도 하나 정확한 조저(朝著, 조정)의 판단을 위해 장계와 함께 제만춘을 올려보내고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의논하였습니다”

제만춘은 경상우수영 군교(軍校)로 우수사 원균(元均)의 명에 의하여 소선(小船)을 타고 노군(櫓軍) 10여 명과 함께 웅천(熊川)의 적세를 탐지하고 영등포로 돌아오다가 포로가 되었다. 제만춘의 경우 자발적인 순왜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죄가 논의되었으나 용서받고 이순신 장군을 도와 적정 탐지(探知)에 공을 세웠다.

또한 박계생(朴啓生)은 밀양 박씨의 세거지(世居地)인 청도 출신의 순왜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 할 때 김계생(金啓生)이란 가명을 사용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따르면 이문욱(李文彧)이 함께 사로잡혀 간 청도(淸道)출신 박계생(朴啓生)이라는 자를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기에, 그가 사로잡혀 간 경위와 적중의 형세를 물었더니, 박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는데 변란이 발생한 처음 적을 만나 사로잡혀서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박계생은 줄곧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를 보좌했고 조선에 돌아온 기록은 없다.

이문욱(李文彧)은 도망쳐 조선에 다시 돌아 왔으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597년(선조30) <선조실록> 4월 25일 자에는 이문욱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를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를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1598년 9월 23일 자에는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의 보고서다. ‘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문욱은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孫文彧)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11월 27일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일본서적에 나온 이순신의 조총피격장면. ⓒ김동철
일본서적에 나온 이순신의 조총피격장면. ⓒ김동철

<선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사람이 이문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이식(李植 1584∼1647)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월 1일 자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절명하였고, 조카 이완(李莞)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문욱(손문욱)의 자리는 이완(李莞)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 1592년 6월 사천해전 때 왜군 선단에서 조총을 쏘는 소총수 중에 조선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장군이 사천해전에서 적의 조총 탄환을 맞아 평생 고생했다.

1597년 9월 16일 자 명량해전 때의 <난중일기>다.왜인 준사(俊沙)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시체를 토막 내라!’ 명령하니 이를 본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왜군들은 오합지졸, 순식간에 31척이 분멸되고 나머지 100여 척이 파괴된 채 도망하니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면사첩 공방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本營)이 있는 일본 규슈 나고야죠(名護屋城)에서 수송되어 오는 전투식량이 절대 부족하므로 왜군은 조선 현지에서 군량을 확보, 조달하게 하였다. 그래서 곡창지대인 전라도 진출에 열을 올렸고, 둔전(屯田)을 운영해서 식량을 구했다.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들여 부식으로 썼다. 이 모든 작업에는 당연히 노동력이 필요했다.

1592년 5월 왜장(倭將)은 조선인 남자 쌀 5斗(두, 말), 여자 3두의 쌀을 받고 대가로 면사첩(紙製札)을 내주었다. 또 왜성 축조에 동원된 조선인 노역자에게도 면사첩을 주어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면사첩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 면사첩을 가진 자는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영하에 노역하고 있으므로 죽이지 말라.”

이때 조선 및 명군도 부역자를 회유하는 초유문(招諭文)과 면사첩(免死帖)을 뿌렸다. 면사첩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