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신문 창간의 주역 유길준, 그는 누구인가 [신문야사7]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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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문 창간의 주역 유길준, 그는 누구인가 [신문야사7]

한성순보과 독립신문 창간의 일등공신, 유길준

유길준(兪吉濬:1856.11.21.~1914.9.3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최초의 현대식 신문 창간 작업을 추진했던 개화파 인사이다. 그는 오히려 조선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쓴  <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 출간)>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유진수(兪鎭壽)이며, 모친은 한산 이씨이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은 도정(都正) 벼슬 밖에 못했지만 한양 북촌의 재력가로 학문이 높아 박규수 등 유명 학자들과 교류가 많아 유길준은 외할아버지에게 사사했다.

유길준은 열네 살 때부터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북촌에 살면서 한성판윤·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쳤고, 중국에 두 차례나 다녀오면서 국제정세와 중국의 양무운동을 목격하여 관직을 은퇴한 후로는 젊은이들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치고 있던 경륜가였다.

그는 그의 문하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뒤로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에 관한 책을 탐독했으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후일의 개화파들과 친교를 맺었다.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사한 후 급진개화파인 유홍기(劉鴻基) 밑에서 지도를 받았고 김윤식 등과 함께 온건개화파인 시인 강위(姜瑋)의 지도도 받았다.

신문창간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 섰던 유길준. ⓒWikimedia Commons
신문창간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 섰던 유길준. ⓒWikimedia Commons

조선 최초의 국비 일본 유학생

유길준은 1881년 5월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의 제2차 신사유람단 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의 지성이자 언론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喩吉)가 설립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현 게이오대학교의 전신)에 유정수(柳正秀)와 함께 유학하였다.(어떤 사료에는 윤치호와 함께라고 되어있다.) 그들은 조선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다. 후쿠자와는 일본사회는 물론 동양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문명개화론자이다. 후쿠자와는 1882년 3월 1일부터 <지지신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유길준은 이 신문에 <신문의 기력을 논함>(4월21일)이라는 논설을 게재할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1882년 7월 23일 신식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반발한 구식군대의 궐기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그들은 신식군대 훈련을 담당했던 일본군대와 민씨 세력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민씨 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임오군란을 진압했다. 피해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했고(제물포조약) 고종은 10월 13일에 박영효를 수신사로 한 진사사절단을 보냈다.

박영효는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일본으로부터 17만 엔을 차관 받아 임오군란 피해보상금 5만엔을 먼저 갚고 나머지 자금 중 일부로 신문 발행을 위한 인쇄시설과 활자를 구매하여 귀국했다. 귀국길에 박영효는 유길준을 동반했다.

1883년 1월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고종으로부터 신문 창간을 윤허 받고 유길준에게 조선의 첫 신문 창간작업의 실무 책임을 맡겼다. 박영효는 그에게 박문국과 한성부 신문국장정(漢城府 新聞局章程)을 만들도록 했다. 그는 장정은 물론 미리 창간사도 작성해두었고, 신문 해설서까지도 작성해 두었다. 그러나 창간 작업이 진행되던 그해 3월에 수구파의 모략으로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갑작스레 좌천되는 바람에 신문 창간 작업이 중단되었다. 유길준도 급진 개화파로 몰려 손을 뗐다. 곧이어 신문 창간 작업은 온건 개화파의 손으로 넘어갔고 유길준이 애써 집필했던 창간사도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엄밀히 급진 개화파가 아니었으므로, 사직한 후에도 신문 창간에 어느 정도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창간된 <한성순보>의 골격이 유길준이 준비해 둔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0월에 창간되는 <한성순보>도 받아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조선 최초의 국비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그해 7월 조미수호조약체결의 답례로 미국에 보낸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자원하여 도미했다. 사절단은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Arthur)와 회동하고 양국의 우호관계를 논의하였다. 사절단은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우편제도, 전기시설, 농업기술도 관람했다.

그들은 1884년 5월 대서양을 거쳐 유럽 각지를 여행한 다음 귀국하였는데 유길준은 민영익에게 미국 유학을 간청하여 미국 유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스스로 단발(斷髮)을 하고 보스턴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유길준은 미국에서 일본 유학 때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C)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1884년 가을 담머고등학교에 입학,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유길준은 3개월 만에 영어에 능통하였고 학업 성적도 빼어나 하버드대학에 입학할 꿈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개화파에 등을 돌린 고종으로부터 학비가 끊기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을 순방한 뒤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항에 귀향했다. 하지만 유길준은 도착하자마자 갑신정변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분이 깊었다 하여 급진 개화파 일당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실상개화를 주장 한 유길준

유길준의 개화사상은 급진 개화파와는 달랐다. 그는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즉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했다. 실상개화란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개화하는 것으로 조선의 좋은 점은 남기고 해로운 부분은 서구의 문명을 새로 받아들여 조선실정에 맞게 고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군민공치(君民共治)인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개화사상의 골격으로 삼았다. 그는 궁극적으로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급진개화파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이러한 개혁론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유길준은 다행히도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처음엔 그의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는 연금 생활 중 <서유견문>을 집필했지만 신분상 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1892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서유견문>은 1889년 완성되었지만 그가 연금에서 풀려나고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거친 후 1895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일본의 출판사인 <교순사>에서 간행되었다.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된 이 책에서 그는 서양의 근대문명을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많은 독자가 읽었다.

 

김홍집, 을미내각 내부대신 취임

1894년 4월 갑오농민운동(동학란)이 계기가 되어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민 씨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7월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제도이다.

유길준은 이때 입각하여 김홍집, 박정양, 김윤식과 더불어 개혁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최초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면서 개혁의 고삐를 조였다. 당시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는데 결국 박영효는 김홍집을 몰아내고 총리대신 서리가 되어 을미개혁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개혁의 반대편엔 항상 민씨 일족이 자리 잡고 있어서 개혁을 방해했다. 박영효는 1895년 7월 민비살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대원군에 의해 밀려나 있던 고종과 민씨 세력은 점점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의도를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청일전쟁 승리로 얻은 랴우둥(요동) 반도에 대한 일본의 권리가 러시아 등 삼국간섭으로 무효화 되자 러시아 세력이 엄청난 것으로 착각한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개입으로 일본의 입지가 약해지자 민씨 세력은 친러파가 대거 기용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인 음모의 막후에 민비가 있다고 지목하여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제2차 수신사이자 조선 최후의 총리대신인 김홍집. 그는 개화 실패 후 광화문에서 암살당했다. ⓒ황인환
제2차 수신사이자 조선 최후의 총리대신인 김홍집. 그는 개화 실패 후 광화문에서 암살당했다. ⓒ황인환

일본 망명길에 오른 유길준

이때 내각 책임자였던 김홍집은 자결을 결심한다. 이 자결을 막은 이가 유길준이다.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김홍집은 내각 수반 자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수립된 을미내각에서 유길준은 내무대신이 되어 을미사변 수습을 명목으로 일본과 수차례 접촉하였다.

유길준 본인은 그의 스승인 미국인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 을미사변의 한국 측 배후세력을 대원군으로 지목했는데, 윤치호는 유길준도 이 을미사변에 어느 정도는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유길준은 자신이 가진 개화의 뜻을 펼 수 없게 만드는 민씨 세력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을미 내각에서 정권을 잡은 유길준은 자신이 뜻한바대로 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전 국민적으로 반감을 샀다. 실제로 그는 단발령 시행 이후 고종과 왕세자의 단발식에 훗날 순종이 되는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도 하였고,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을미 내각의 친일적 성향과 점점 더 심하게 간섭해오는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떠나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을 을미사변의 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명령을 내렸다.

김홍집 총리는 러시아의 야욕을 알기 때문에 아관파천은 안 된다고 판단하고 러시아공관을 찾아갔지만 고종은 이미 그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였다. 김홍집은 고종을 면담도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에서 성난 군중에 둘러싸여 살해된다. 이때 일본군 진영으로 피신을 권하는 측근의 말에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일로 김홍집 등은 살해당하고 유길준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 무한 지원

서재필(徐載弼)은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여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유길준은 이미 그를 불러들여 순 국문판 민간신문을 창간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에 유길준은 서재필을 만나 1896년 1월 하순에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새 신문의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3월 1일 창간하기로 하고 모든 비용은 정부가 대주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유길준의 주도로 김홍집 내각도 이 신문 창간 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신문사 창설 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정부 예산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해 승인서를 서재필에게 교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신문 창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면서 그를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모두 유길준이 앞장서 추진한 일로 그가 내부대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또다시 이 독립신문의 창간호를 보지 못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유길준의 망명생활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해 190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를 작성하고 환국 공작을 펴다가 발각되어 일본정부에 의해 일본 남해 고도로 4년간 유배되었다. 그는 고독 속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강요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지신문 新知新聞>에 완강하게 반대한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일본이 정미 7조약을 무효로 한다면 조선 국민들이 영원히 일본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이 정미 7조약을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그를 친일파로 생각했던 고종이 무척 반기며 그를 사면했다. 1907년 8월 16일 일본은 망명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벼슬을 나눠 주었는데 유길준만 유일하게 거절했다.

고종은 그에게 용봉정(龍鳳亭·조호정)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유길준이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를 실천목표로 정한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교육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을 주고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 기관을 통해 유길준은 <대한문전(大韓文典)>, <노동야학독본> 등을 저술하여 간행했다. 그리고 국민경제회와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유길준은 한성순보와 독립신문 창간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두 신문의 창간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황인환

유길준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세워지자 더불어 그동안 밖에서 쌓아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허탈함과 침묵으로 사태 추이를 관망하다가, 일본이 그에게 남작(男爵)을 주어 회유하려했으나 완강히 거절하고, 1914년 9월 30일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 공도 세운 것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는 하남시 검단산 자락에 묻혔다.

그가 설치했던 흥사단은 한일합병으로 인해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1913년 5월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다시 부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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