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대감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弼雲臺)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오성대감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弼雲臺)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를 모두 겸비한 어진 재상, 이항복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1618년 함경도 북청 유배 길에 지은 시조다. 그의 나이 63세. 유배를 떠난 지 5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학문이 깊었던 데다 지모가 출중했고 임금을 모시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조선 중기 첫 손가락에 꼽는 명재상 이항복은 광해군조에 이르러 인목대비 폐비론을 둘러 싸고 대북파와 맞선 끝에 유배형을 당한 것이다. 광해군 자신이 그의 시신을 운구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고, 180여 년 후 정조대왕까지 <일득록>에서 그의 충절을 기렸다.

“백사 이항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에서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몸에 겸했음에랴. 세상에 전하는 우스개들이 꼭 모두 그가 행한 것은 아니겠지만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아끼고 사모하고 있는 까닭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파천하던 날 밤 궁궐을 지키는 위사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홀로 손수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임금을 내전으로 인도했고,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자 개연히 호종을 자처한 인물은 공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히는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참된 신하를 알아본다’라는 말은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지은〈철령가〉중에서, ‘누가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가져다가 구중궁궐에 뿌려 줄까’라는 한 구절은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참으로 충의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필운대’가 바로 이항복의 젊었을 때 집터다.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 장군의 집터이기도 하다.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였으며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항복은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과의 기지와 장난기 가득한 일화로 숱한 야사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병조판서, 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안으로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했다가 유배형을 당한 것이다.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배화여자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학생회관 뒤편으로 돌아서면 커다란 암벽 위에 ‘弼雲臺’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강기석
배화여자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학생회관 뒤편으로 돌아서면 커다란 암벽 위에 ‘弼雲臺’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강기석
필운대는 이항복의 젊었을 때 집터다. 필운대에 대한 설명이 적힌 비석. ⓒ강기석
필운대는 이항복의 젊었을 때 집터다. 필운대에 대한 설명이 적힌 비석. ⓒ강기석
커다란 암벽 위에  ‘弼雲臺’ 글씨와 함께 한쪽 벽 위에는 시가 적혀 있다. ‘弼雲臺’ 글씨 석 자를 누가 썼는가는 아직도 논란이다.  ⓒ강기석
커다란 암벽 위에 ‘弼雲臺’ 글씨와 함께 한쪽 벽 위에는 시가 적혀 있다. ‘弼雲臺’ 글씨 석 자를 누가 썼는가는 아직도 논란이다. ⓒ강기석

 

이항복이 ‘필운’을 호로 삼았던 사연

배화여자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학생회관 뒤편으로 돌아서면 커다란 암벽 위에 ‘弼雲臺’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서울문화재 자료 제9호다. 왜 필운대인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이 필운산(弼雲山)이고 백사 이항복의 호가 필운이었기 때문이다.

1537년 3월 중종은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을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의 새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공용경은, 백악산은 ‘공극산(拱極山)’, 인왕산은 ‘필운산’ 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는데,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다.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명재상 이항복이 필운을 자신의 호로 삼을 만한 사연 아닌가. 지금은 학교 건물에 꽉 막혀 있지만 필운대에서 보는 경치는 한양에서도 첫 손가락 꼽을 정도로 절경이었던 모양이다. 정조가 한양의 승경 여덟 곳을 시로 노래하면서 그중 필운대의 (살구)꽃과 버드나무를 첫 손가락에 꼽았다.

겸재 정선이 1750년 경에 그린 '필운대'로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강기석
겸재 정선이 1750년 경에 그린 ‘필운대’로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강기석

‘필운대(弼雲臺)’ 글씨 석 자를 누가 썼는가는 아직도 논란이다. 이항복이 직접 썼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의 10대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썼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필운대’ 글씨 옆 바위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유원이 찾아 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은 한시가 새겨져 있다. 1873년은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는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 벽에 흰 구름만 깊었구나.

백 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10대손 영의정도 훌륭하지만 그보다도 더 장한 후손이 이유원의 아우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의 똑똑한 아들 6형제다.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會榮), 시영(始榮), 호영(頀榮). 호방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넷째 회영(1867~1932)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1910년 12월 온 일가가 만주 벌판으로 망명을 결행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평생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들 형제 중 다섯째 시영(1869~1953)만 빼고 모두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사망했으며, 시영은 귀국 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냈다.

이 6형제의 나라 사랑은 물론 중시조 이항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왜병의 추격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난가려 했으나 도승지 이항복이 임금의 옷자락을 붙들고 만류했다. 임금이 자기 백성과 땅을 버리고 떠나면 임금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선조의 도강을 말린 이항복은 명나라의 원군을 끌어와 결국 왜군을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자대학교에서 나와 필운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우당(이회영)기념관’이 있다. 원래 우당이 만주 망명 전 살았던 대저택은 이곳이 아니라 명동 YWCA 건물 어디쯤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손자 이종찬 씨가 이곳에 연고가 있어 할아버지 기념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11대가 흘러 가까운 곳에서 다시 만난 명문가 훌륭한 두 분의 인연이 묘하다.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대에서 나와 필운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1km 쯤 올라가면 우당(이회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외부 전경. ⓒ강기석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대에서 나와 필운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1km 쯤 올라가면 우당(이회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외부 전경. ⓒ강기석
우당(이회영)기념관 내부 전경.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씨가 이곳에 연고가 있어 할아버지 기념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강기석
우당(이회영)기념관 내부 전경.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씨가 이곳에 연고가 있어 할아버지 기념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강기석

 

지하철로 찾아가는 필운대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찾아가는 방법: 경복궁역 1, 2번 출구 도보 1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