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름까지 바꾼 영·정조의 탕평정책 [다시 쓰는 징비록 44]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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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름까지 바꾼 영·정조의 탕평정책 [다시 쓰는 징비록 44]

무편무당하면 왕도탕탕이라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은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앞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선배들의 ‘망국적(亡國的)인 당습(黨習)에 물들지 말라’는 경계의 뜻이었다. 다음은 영조가 탕평비에 쓴 탕평비문이다.

주이불비(周而弗比) 두루 원만하여 치우쳐 편을 가르지 않음이

내군자지공심(乃君子之公心)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비이불주(比而弗周) 한 곳으로 편을 가르고 공평하지 못한 것은

식소인지사의(寔小人之私意)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탕평(蕩平)’이란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의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이다. 즉,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송대(宋代)의 주자(朱子) 또한 그의 붕당관(朋黨觀)을 피력한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에서 붕당 간 논쟁의 시비(是非)를 명변(明辨)함에 의한 조정의 탕평을 말했다. 따라서 탕평이라는 말은 인군정치의 지공무사(至公無私)를 강조하는 보편적인 의미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1694~1776년) 하면 그의 손자인 정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의 중흥(中興)을 이룩한 군주다. 영조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 출신 후궁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출생에 대한 약점에 늘 시달렸다. 숙종 후반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다. 장희빈(張禧嬪) 소생의 이복형인 경종이 소론의 지원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왕세제 위치는 늘 살얼음판 같았다.

탕평책을 써 당쟁을 없애려 한 조선 후기 왕 영조의 어진. ⓒ김동철
탕평책을 써 당쟁을 없애려 한 조선 후기 왕 영조의 어진. ⓒ김동철

그런데 경종이 갑자기 죽자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뼈저리게 느꼈던 당쟁의 참상(慘狀)을 없애고자 취임 일성으로 탕평(蕩平)을 내세웠다.

조선에서 ‘탕평’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년) 박세채(朴世采)였다. 당파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숙종 시대, 그는 1694년에 영의정으로 또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는 격렬한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파당(派黨)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때는 자신의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년)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자신의 지원세력인 노론을 다시 조정에 포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탕평정국(蕩平政局)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등 노론과 소론의 파쟁이 다시 시작됐다. 그래서 1727년에는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였다.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과 소론 내 온건파들을 고르게 등용해 탕평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때 인사정책으로 타당(他黨)을 견제시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영의정에 노론이 앉으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하여 견제와 균형을 취할 수 있게 했다. 그 아래 청요직(淸要職)의 등용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는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자 쌍거호대의 인사방식을 지양하였다. 즉, 쌍거호대는 격렬한 당론을 수습하고자 인물의 현능(賢能)에 관계없이 파당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에 고른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대신들은 결국 자기 사람 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에서 자리싸움은 세력 확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 정희량, 박필몽 등 소론과 남인 급진파 등이 무신난(武臣亂)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도층은 선왕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천명하면서 ‘의거(義擧)’, 즉 정의를 위해 궐기한다고 선포했다. 반군 지도자 이인좌는 한 때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으나 소론 출신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정부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무신난은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주도해 일으켰기 때문에 영조는 반란 토벌 후 다시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조정에서 붕당(朋黨)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파악하고 무신난을 통해 탕평책을 더욱 공고히 추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으로 국가가 판탕(板蕩, 국가가 어지러움)한 때를 당해 안으로는 조정의 모습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해 간신이 흉악한 뜻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경기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중략)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하고 권장하는 데 있다. (중략) 또 하나는 해마다 연달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벌(黨伐)만을 일삼는 것으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됐다. 백성이 적도(賊徒)에게 합류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黨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영조의 애민(愛民) 정신과 붕당폐해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신난 이듬해인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己酉處分), 즉 당파 간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쓰겠다는 탕평을 반포했다.

“오늘의 역변은 당론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처단하겠다.”

그래서 영조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시행했다.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四色)을 고루 등용했다. 그리고 영조는 당쟁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사림(士林) 등 유학자 집단의 정치 관여를 계속 견제했다. 은둔한 산림(山林)의 ‘훈수 두기식’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림 세력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1741년 4월 8일 영조는 하교를 내려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사사로이 건립한 것을 모두 없애고 이를 어길 경우 수령과 유생에게 엄한 처벌을 가하도록 했다.

1742년(영조 18년)에는 ‘붕당이 대개 홍문관의 관원을 뽑는 데 한 원인이 있다’하여 그 전선(銓選)의 방법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것을 처음 주장한 자는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에 들어간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이었다. 그는 이조(吏曹)의 관원 가운데 승문원에 들어갈 만한 자를 뽑아 시험을 보여 성적대로 차례로 홍문관 정자에서부터 요직에 등용시키고, 모든 관제는 3년마다 차례로 승계시킨다는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주장하였다.

주장대로라면 홍문관의 이름 있는 관직에 대한 파당 간의 경쟁도 없어지고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도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탕평론자 조현명은 이러한 서승법을 일반 관직보다는 이조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과 대간(臺諫)의 통청에 특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종래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言官)의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한천법(翰薦法)은 회권(會圈)으로 변해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 대 이래 지속되어 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이 음식을 탕평으로 불러라”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는 자리에서 탕평채(蕩平菜)라는 음식을 내놓아 탕평 의지를 보여주었다.

1849년에 편찬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탕평채(蕩平菜)는 채 썬 청포묵, 쇠고기, 숙주나물, 미나리, 물쑥 등이 주재료인데 들어가는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했다. 즉,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쇠고기의 붉은 색은 남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김의 검은 색은 북인을 각각 상징했다. 각각 다른 색깔과 향의 재료들이 서로 섞여 조화로운 맛을 이뤄내는 탕평채는 영조의 탕평책 상징을 은유한 것이다.

당쟁에 한이 맺힌 영조는 음식 이름을 탕평채로 명했다. ⓒ김동철
당쟁에 한이 맺힌 영조는 음식 이름을 탕평채로 명했다. ⓒ김동철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戚臣)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 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 확립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 같은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정조는 그 동안 두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청류(淸流) 탕평(蕩平)을 펼쳤다.

청류는 영조 말에 동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 인사, 즉 김종수(金鍾秀), 김치인(金致仁), 유언조(兪彦造), 윤시동(尹蓍東), 송인명(宋仁明), 정존겸(鄭存謙) 등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채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년)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保合)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동안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해 온 ‘임오의리문제(壬午義理問題)’를 제기해 노론을 크게 당혹시켜 조정에 파란이 일었다. 임오의리는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해 굶어 죽인 사건으로 “의(義)로써 은(恩)을 제어한 것이며 나라를 위해 의로써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규정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사건을 재론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시흥행궁에 다다른 모습을 그린 그림. 호암미술관 소장. ⓒ김동철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시흥행궁에 다다른 모습을 그린 그림. 호암미술관 소장. ⓒ김동철

정조 대에 내부의 시파(時派, 사도세자 지지파)와 벽파(僻派, 사도세자 반대파)의 분열은 이러한 배경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와 같이 정조는 조제(調制), 보합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名節)을 중시해 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노론과 소론 중 온건론자들과 함께 했던 영조의 완론 탕평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내 침실을 탕탕평평실로 명하라”

한편 1788년에서 1795년 사이에 시파와 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四色)은 명색만 남고 정국은 완전히 이 두 파로 재편됐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 및 공세가 두드러졌다.

정조는 고육책(苦肉策)으로 선왕 영조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의 조화에 힘썼다. 그는 침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 짓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탕평정책을 펼친 정조의 어진. ⓒ김동철
할아버지와 함께 탕평정책을 펼친 정조의 어진. ⓒ김동철

영·정조 대에 꾀해진 탕평정책은 전제왕조 대에 격렬한 파당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척족 세력을 이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더욱이 사색등용정책에 따라 배제된 구 정치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정쟁(政爭)을 낳게 하였다.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시대에 외척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을 비롯해 풍양 조씨, 전의 이씨, 여흥 민씨 등 외척세력이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안에서는 부패한 외척들의 세도가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 프랑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외세(外勢)는 망조(亡兆)가 든 조선을 집어삼킬 궁리에 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