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전사 후 쌀 수백 석을 바친 승군 [다시 쓰는 징비록 46]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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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전사 후 쌀 수백 석을 바친 승군 [다시 쓰는 징비록 46]

기세등등 이정암, 애민정신 이순신

왜란 당시 이조참의였던 이정암(李廷馣)이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해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다가 왜군 제3번대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선발대 3000여 명과 1592년 8월 28일부터 나흘간 치열한 전투를 벌여 왜군을 물리친 사실은 이미 기술하였다. 이 공로로 이정암은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품계를 받고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정암이 1593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부임해 오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1593년 윤 11월 17일 이순신이 올린 장계(狀啓)다.

전라도 연해안의 각 고을이라고 해봐야 좌도에 다섯 고을, 우도에 열네 개 고을이 있을 뿐인데, 관찰사 이정암이 군대편성을 개정하면서 좌도에는 광양, 순천, 낙안, 흥양, 보성을, 우도에는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진도 등 각각 다섯 고을만 수군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고을은 전부 육군 장수들에게 전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좌도와 우도의 다섯 고을의 군량을 각처에서 징발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좌도와 우도에서 만들고 있는 전선이 모두 150척이고 탐색선과 협선이 150척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격군(格軍, 노 젓는 군사)의 수만 해도 무려 2만9000여 명이나 되는데 그 숫자를 채울 길이 없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1594년 1월 16일에도 비슷한 장계를 올렸다.

순찰사 이정암에게 엄히 분부를 내리시어 수군의 위엄을 장하게 할 수 있게 해주시고, 연해안 각 고을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수군과 육군으로부터 교대로 징발당하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군을 지키면서 백성들 노역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애민(愛民)의 뜻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과 의병의 수륙양륙작전

당시 전라도의 육상 의병으로 송대립(宋大立), 정회, 최대성, 황원복, 전방삭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이 잘된 군관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고흥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한 육상의병들은 이순신의 군사 활동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이들은 고흥 반도로 진입하려는 왜군을 차례로 소탕했다.

1598년 3월 4일 보성 예당으로 침입한 왜군을 완전 섬멸했다. 이어 4월 8일 고흥 망저포 첨산전투에서 왜군을 진압하였다. 특히 6월 6일 고흥과 보성, 낙안으로 이어지는 세 차례 전투에서 모두 적을 격멸하였다. 7월 12일 왜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이(宇喜多秀家)가 재침하자 죽전벌에서 치열한 결전을 벌였다. 이들은 육로로 들어오는 적들을 고흥과 보성의병연합작전으로 후미에서 차단 작전을 수행하였다.

우키다 히데이이 초상화. ⓒ김동철
우키다 히데이이 초상화. ⓒ김동철

이순신의 병참 작전은 크게 육상의병의 후원과 지역민의 기여로 이루진 것이었다. 득량도(得糧島)를 관할하던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은 이순신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인물로 절이도 해전을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매번 싸움에서 승리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였다. 웅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항상 인근의 이순신 수군이 가장 신경 쓰였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593년 2월 3일 장군의 수군은 왜성 뒤 웅포에 숨겨진 왜병선을 5차례나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또 1594년 9월 29일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거북선과 50척의 병선을 이끌고 출전하여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과 합세하여 10월 4일 칠천량 해협을 지나 장문포 앞바다에서 수륙 양동작전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8월 17일 이순신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밀회동 결과로 실시된 것이다. 이순신은 항상 수륙합동작전을 주장해왔다. 즉 왜군이 진을 치고 나오지 않을 경우 육군이 배후에서 치고 바다에서 수군이 몰아붙이는 압박작전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권율과 상의를 한 것이다. 권율은 의병장 곽재우, 김덕령, 별장(別將, 종2품) 한명련(韓明璉), 주몽룡(朱夢龍) 등에게 이순신과 합동작전을 도모하라고 명하였다.

9월 27일 이순신이 적도(赤島, 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서 곽재우, 김덕령, 한명련, 주몽룡 등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라서 보냈다.

여기서 잠깐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에 대해 살펴보자.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이 나타났다는 소문만으로 왜군은 기겁을 할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그는 왜란이 발발하자 자신의 전재산을 처분하고 부인의 옷가지를 끌어내 의병들의 처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자기 매부에게 재물과 종들을 내놓을 것을 청했으나 응하지 않자, “나라가 망하는데 재물이 무슨 소용 있느냐”면서 조카들을 칼로 베려고 하였던 선공후사(先公後私)에 앞장섰던 강골(强骨)이었다.

1594년 9월 29일 <갑오일기>다.

배를 출발하여 장문포 앞바다로 돌진해 들어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서 자리 잡고서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세우고 양쪽 봉우리에 보루를 쌓아놓고는 조금도 나와서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선봉의 적선 2척을 무찔렀더니 육지로 내려가 도망쳤다. 빈 배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10월 4일 일기다.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한 뒤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오르게 하고, 선봉은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걸게 하였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질팡하여 기세를 잃고 이리저리 급히 달아났다. 육병(陸兵)은 왜적 한 놈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바로 배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해질 무렵 칠천량에 돌아와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標信, 임금의 신임표)과 선유교서(宣諭敎書, 임금의 명령서)를 갖고 왔는데 임금이 담비의 털가죽을 내려주셨다.

 

장문포 해전의 실패와 탄핵

장군은 장문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선 1척과 사후선(伺候船, 정탐선) 3척을 잃었다. 싸운 결과는 적선 2척 분멸(焚滅), 조선수군 전선 1척, 사후선 3척의 손실이었다. 여하튼 수륙양륙작전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 장군은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왜군은 장문포 입구에 수중목책과 조총 진지를 설치해놓고 나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문포 및 송진포 왜성에서 농성 저항만 하므로 별 성과 없이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장군은 수륙합동작전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다. 싸울 의사가 없어 움직이지 않는 상대와의 싸움은 자칫 헛힘만 쓴 채 무위(無爲)로 돌아갈 공산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 수륙연합작전의 실패(?)로 조정에서 탄핵이 논의되었다.

<선조실록> 1594년 11월 21일 기록이다.

어제 경상감사의 서장을 보니 거제의 싸움에서 군사를 상실하고 모욕을 당한 것은 앞서 전교한 바와 같다. 내가 직접 들은 일이 하나하나 다 맞도다. 그처럼 패배했는데도 통제사, 도원수, 체찰사는 서로 숨기어 알리지 않고 도리어 장황한 말만 멋대로 늘어놓았으니 군상(君上)을 안중에 두는 것인지, 조정을 안중에 두는 것인지, 대간을 안중에 두는 것인지, 매우 가슴 아프다. 그러니 무겁게 다스려서 신하로서 속이는 버릇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선조는 진노(震怒)했고 장군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장군은 항상 병력 및 무기 점검에 최선을 다했다.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국기일(國忌日, 중종 장경왕후 윤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승군(僧軍) 100명이 돌을 주웠다. (1592년 3월 2일)
맑다. 아침에 조이립을 전송하고 객사 대청에 나가 공무를 마친 뒤 서문 밖 해자(垓字) 구덩이와 성벽 더 쌓는 데를 순시하였다. 승군들의 돌 줍는 것이 성실치 못하므로 우두머리를 잡아다 매를 때렸다. (1592년 3월 4일)

이즈음 장군은 류성룡 대감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신(新) 병법서를 읽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화공(火攻) 등 많은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군기검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아침 먹은 뒤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칼, 투구, 갑옷, 전통(箭筒, 화살통), 환도(還刀) 등도 깨지고 헐어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으므로 아전과 궁장(활 기술자), 감고(監考, 검열관) 등을 처벌하였다. (1592년 3월 6일)

 

백의종군하는 장군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친 덕수 스님

충무공은 임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8월과 9월경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스님들도 전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영호남 지역에서 스님들이 모여 들었는데 한 달 만에 무려 400여 명이 모였다. 장군은 역사상 처음으로 의승수군(義僧水軍)을 조직했다. 의승수군은 자원병이며 군량도 자체 조달했다. 전투임무는 장군에게 하달 받았지만 승군들의 지휘는 승장(僧將)이 함으로써 자체 내에 엄격한 체계와 질서가 존재했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의 협력을 나타내는 조각상. ⓒ김동철
이순신 장군과 의병의 협력을 나타내는 조각상. ⓒ김동철

순천에 사는 삼혜스님을 표호별도장(豹虎別都將, 표범과 호랑이 같이 돌격하는 승군의 최고지휘자), 흥양의 의능스님을 유격별도장, 광양의 성휘스님을 우돌격장, 광주에 사는 신해스님을 좌돌격장, 곡성의 지원스님을 양병용격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경상도와의 4대 교통요충지인 도탄, 광양 두치, 석주, 순천성 등 영호남 경계에 있는 주요 방어 지역에 배치됐다. 왜군들이 지상으로 호남을 침범할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의승수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일본 선박은 이들 유격대에 의해 번번이 불에 타 부서졌다’는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부는 살생(殺生)을 피하기 위해서 거북선의 격군으로서 힘을 썼다.

의승수군의 무기와 옷. ⓒ김동철
의승수군의 무기와 옷. ⓒ김동철

장군은 평소 승군들과의 교류 및 신뢰를 중요시 했다. 1597년 2월 장군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옥고를 치르다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러 가는 길인 1597년 5월 정혜사의 덕수 스님이 장군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쳤다. 그 다음날 승장 수인 스님이 밥 지을 스님을 데리고 왔다.

장군과 스님들과의 선연(善緣)은 전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여수 마래산 중턱 장군의 영정(影幀)이 모셔진 충민사에는 옥형스님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옥형 스님은 장군이 지휘하는 배에 타고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장군이 순국한 후에 충민사 사당 옆에 조그만 암자(오늘날 석천사)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자운스님은 장군이 전사한 직후 쌀 수백 석을 갖고 와서 남해 노량 바다에서 엄청난 규모의 수륙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수 흥국사는 의승수군의 본영으로 승군 300여 명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승군들은 흥국사 앞 활터에서 3개월씩 칼, 창, 철퇴 훈련을 한 뒤 각 임지로 나갔다. 현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이 설치되어 의승수군이 사용하던 칼, 활, 철퇴 등의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1593년에 제작된 장군의 친필 현판인 ‘공북루(拱北樓)’가 보존되어 있고 승군 명단의 자료도 있어 명실상부한 호국성지(護國聖地)로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순신 친필의 공북루 현판. 여수 흥국사 의승 수군박물관 소장. ⓒ김동철
이순신 친필의 공북루 현판. 여수 흥국사 의승수군박물관 소장. ⓒ김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