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발 든 내시는 공신, 목숨 건 의병은 모르쇠 [다시 쓰는 징비록 47]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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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 든 내시는 공신, 목숨 건 의병은 모르쇠 [다시 쓰는 징비록 47]

의병이 세운 공은 없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는 공공연히 “조선의 군사들이나 의병(義兵)들이 세운 공은 거의 없다. 모두가 상국(上國)인 명나라가 구원해준 덕분에 조선이 살아남았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위태로운 나라를 살려줌)을 잊어선 안 된다”라고 언명했다.

이 어찌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말인가.

분명 남해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그 수하 장졸들의 활약, 비록 오합지졸이었지만 악전고투(惡戰苦鬪)했던 조선 관군, 광해군의 근왕병 모집 및 각지 의병들의 궐기로 왜란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를 무시한 채 오로지 명나라만을 섬기는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이 뼛속까지 각인돼 있었다.

존명사대 정신이 강했던 선조의 목릉. ⓒ김동철
존명사대 정신이 강했던 선조의 목릉. ⓒ김동철

아비규환(阿鼻叫喚)의 7년 전쟁이 끝난 뒤 1604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었다.

이 논공행상에서 선조는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내관들까지 무더기로 공신(功臣)으로 녹훈하면서 정작 전장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의병장들을 외면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갑진년(1604년) 6월 25일자 기사다.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니 명칭은 호성공신(扈聖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이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거가(車駕)를 따르며 호종한 사람들은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삼등급으로 나누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등급으로 나누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삼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그 공신의 수가 총 108명이었다. 선조의 어가(御駕)를 호종했던 대신들은 80여 명이나 공신에 올랐지만 목숨을 건 전투에서 피를 흘렸던 전공자들이 공신이 된 것은 겨우 18명으로 전체의 16%에 불과했다.

선무공신으론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등 장수 3명이 일등급에, 김시민(金時敏), 이정안, 이억기(李億祺) 등 5명이 이등급에,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 이운룡(李雲龍) 등 10명이 삼등급에 녹훈되었다. 권율과 김시민, 이정안 등을 제외하면 거개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활약했던 수군 장수들이라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왜군보다 당쟁이 무서운 홍의장군

그런데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신갑(辛碑), 이일(李軼), 이주(李柱), 김덕령(金德齡), 조헌(趙憲), 우성전(禹性傳), 서산대사(西山大師), 최경장(崔慶長), 최경회(崔慶會) 형제 등 많은 의병장은 녹훈에서 제외되었다.

이들 의병장들은 휘몰아치는 태풍 앞에 촛불 같았던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분기탱천 일어났던 의인(義人)들이었다. 물론 공을 바라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의(衷義)의 기개를 펼친 의병장들에 대한 대접은 말이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자인 선조는 의병을 백안시(白眼視)했다. 공신의 호는커녕 자칫 의병들이 민란을 일으켜 그 창끝을 왕궁으로 돌리지나 않을까 의심까지 했다. 그 단적인 예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된 것으로 오해받아 참혹한 옥사(獄事) 끝에 죽은 사건이었다. 그의 참모 최담령도 고초 끝에 겨우 살아남아 재야에서 폐인(廢人)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야 했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의령 정암진 전투에서 왜군 2000명을 물리친 곽재우 장군 역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다행히 풀려나올 수 있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1600년 의병장 곽재우는 “당파싸움이 풍신수길(豊臣秀吉)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전남 영암으로 3년 동안 유배당했다. 그리고 김덕령의 죽음을 본 그는 이후 낙향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생식(生食)으로 연명하며 숨어 지내는 은자(隱者)가 되었다.

의병 궐기를 역설하고 있는 곽재우 장군의 모습. ⓒ김동철
의병 궐기를 역설하고 있는 곽재우 장군의 모습. ⓒ김동철

왜란 초기에 전국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조정과 관군으로부터 괄시(恝視)를 받아온 의병들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머리카락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의병하면 집안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것은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의병에 대해서 가진 오만과 편견의 결과였다.

언필칭 입으로는 공명정대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가르쳐 놓고는 막상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는 비열한 작태에 백성들의 불신은 바위처럼 굳어졌다.

논공행상이 공정하지 못하면 군신(君臣) 간의 신뢰가 떨어지고 신료(臣僚) 간에 암투(暗鬪)가 싹트는 법이다. 나중에 가서는 큰 분란(紛亂)을 초래하는데 인조반정 직후 이괄(李适)의 난이 그 대표적이다.

무릇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무엇이던가

계공이행상(計功而行賞) 공을 따져 상을 주고

정능이수사(程能而授事) 능력을 가늠해 일을 주어야 한다.

<한비자(韓非子)>의 팔설(八說)에 나오는데, 공을 따져 상을 준다는 말에서 ‘논공행상’이 유래됐다. 또 <관자(管子)>도 칠법(七法)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논공계로(論功計勞) 공을 논하고 수고를 계산하는데

미상실법률야(未嘗失法律也) 일찍이 한 번도 법률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시보다 못한 의병

이처럼 의병은 푸대접을 받은 반면 왕실의 내시는 톡톡한 대접을 받았다. 소위 권력에의 접근권(接近權, access)을 가진 자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화신(化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환관(宦官)인 십상시(十常侍)의 문고리 권력이 그랬고 오늘날도 권력 정점의 위세를 빌미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고위급 비서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호성공신(扈聖功臣)은 무려 86명이다. 전쟁이 일어났고 7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면 의당 무관의 수가 더 많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긴 남해바다의 이순신(李舜臣) 수군을 제외하고는 육지에서 진주대첩(김시민)과 행주대첩(권율) 외에 이렇다 할 대승이 없었기는 했다.

일등급은 이항복(李恒福), 정곤수 등 2명이고 이등급은 류성룡(柳成龍),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등 31명, 삼등급은 정탁(鄭琢), 허준(許浚) 및 내시 24명 등 53명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내시 24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의 내시. ⓒ김동철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의 내시. ⓒ김동철

선조는 자신의 곁에서 밤낮 수발 드는 내시들의 그 수고로움을 아주 중요시해 꼼꼼히 챙겼다.

왜란초기 1592년 5월 6일 <선조실록>이다.

임금이 아침에 봉산(鳳山)을 떠나 동선령(東仙嶺)을 넘어 오후에 황주에 닿았다. 임금이 지시하였다. ‘아침에 큰 재를 넘었더니 기력이 매우 피곤하여 여기서 묵고자 한다. 행차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간이 건의한 대로 차후에 처리하되 그 중에서 삼사(三司)의 높은 관리들부터 먼저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라. 그리고 내시 김기문, 오윤형, 김양보도 품계를 올려주고 견마군 이춘국 등은 서반직(武官)에 임명하도록 하라.’

도성을 떠나 파천 길에 오른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땅에 닿자마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느라 고생한 사람들에게 대해 품계를 올려주라는 지시다. 측근인 내시들에게 배려 또한 놓치지 않았다. 임금이 탄 말을 모는 이춘국 등에게는 무관직을 제수했다.

당장 임금의 눈앞에서 엉덩이춤을 살랑거리며 보필하는 내시의 공이 있는 만큼, 저 멀리서 나라의 보급품 하나 없이 대나무로 죽창을 깎아서 왜적과 싸웠던 의병들의 충의(衷義)를 조금이라도 헤아렸어야 했다.

 

참패한 원균도 일등급 공신 

이순신, 권율과 어깨를 나란히 선무공신 일등급에 오른 원균도 처음에는 선무공신 일등급이 아니라 이등급이었다. 공신도감(功臣都鑑) 도제조, 즉 공신선정위원회의 위원장 격이던 이항복(李恒福)이 선무공신을 정할 때에 원균을 김시민, 이억기 등과 함께 이등급으로 올렸는데 선조가 이순신, 권율과 같은 일등급으로 바꿨던 것이다. 그때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제 원균을 오히려 이등으로 낮춰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선조가 원균을 일등급으로 올려준 것은 1597년 2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혀 그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선조로서는 원균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실책을 감출 수 있고 이순신이 전공으로 인기가 치솟는 것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1597년 10월 20일에 명량해전 이후 계속해서 이순신 수군을 평가절하했다.

국군신불능토적(國軍臣不能討賊) 우리나라 장수들은 능히 왜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상번천조(上煩天朝) 천자의 조정을 번거롭게 만들고 있다.

유죄당사(有罪當俟) 이의 유죄를 기다릴지언정

무공가록(無功可錄) 무슨 기록할만한 공적이 있단 말인가.

수혹포참소령적(雖或捕斬少零賊) 비록 사소한 왜적을 잡거나 참살하였다 하더라도

차불과변장직분내사(此不過邊將職分內事) 변방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선조는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재조지은에 감읍(感泣)할 뿐이다.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고작 전선 13척으로 왜적의 함대 133척을 격멸해 서해로 북상하려는 적의 대군을 저지한 명량해전, 불리한 전세(戰勢)를 일대 반전시킨 기적의 승리를 그토록 폄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조는 좀 미안했던지 이듬해 4월에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상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했다.

반면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다”면서 처벌을 건의하자 선조는 원균을 감싸고 돌면서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자 사관은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했다.

한산도에서 남김없이 패전한 원균은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처형해야 마땅하다. 또 수군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균은 성질이 포악한 일개 무지한(無智漢)이다. 이순신을 모함해 몰아내고 통제사가 됐으며 단번에 적을 섬멸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부족해 패전했다. 그러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바람에 장병들을 모두 죽게 했다. 이런 원균의 죄를 누가 벌줘야 하는가. 이런 일을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곽재우와 의병이 의령 겨름강 전투에서 왜군 대파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김동철
곽재우와 의병이 의령 겨름강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김동철

즉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抗中) 항일(抗日)의 침략 속에서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병이 내시보다 못한 소모품이 되고 말았다.

“오호 애재(哀哉)라” 장군의 신음은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