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즉위 40년 기념, 황태자 순종이 건립한 ‘세종로 만세문’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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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 40년 기념, 황태자 순종이 건립한 ‘세종로 만세문’

고종의 장수 기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도 번화한 거리는 광화문 앞 세종로다. 지금은 세종로라고 부르지만 과거 조선 시대에는 ‘육조(六曹)거리’라고 하였다. 세종로에는 사시사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각종 행사가 벌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는 데서는 차이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화문 사거리 동편 교보 빌딩 남단 모퉁이에 외롭게(?) 서 있는 비각이 ‘세종로 만세문’이다. 바로 ‘고종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으로 사적 제171호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전각이다.

아치형의 출입문 위 부분에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가 있고, 그 아래에 ‘영왕육세서(英王六歲書)’라는 작은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엄비 소생인 영친왕 이은이 6세 때 쓴 글씨로, 조선왕조의 역사가 계속되고 고종이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상장하는 것이다. 그 비문(碑文)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 기념비(大韓帝國 大皇帝 寶齡望六旬 御極四十年 稱慶 記念碑)라고 적었다. ‘보령망육순’은 임금의 나이가 60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어극 40년’은 왕위에 오른지 40년이라는 뜻이니, 그해가 곧 1902년이다.

그러나 일제는 도로 확장을 핑계로 비석과 비각만을 남겨놓고 둘레의 철책과 비각에 사용한 돌문을 떼어 내어 없애 버렸다. 일제의 저의는 도로 확장이 아니라 세종로 만세문 자체가 싫어 철거하여 헐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광복 후에 제 자리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기념비전은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던 1902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세웠다고 전한다. 영친왕은 우리 민족의 망국한(亡國恨)을 불러일으키게 한 마지막 왕이었다. 일제가 어린 세자를 유학시킨다며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으나 몇 해가 지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본 총독을 호통 친 엄비

엄비가 일본 총독 데라우치를 덕수궁으로 호출했다. 그는 고종과 엄비 앞에서 영친왕의 일본 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북해도로 여름방학 피서 여행을 다녀왔다는 등 자랑을 늘어놓았다. 고종은 아무 말도 없는데, 엄비가 데라우치에게 호통을 쳤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린 왕세자를 데려갈 때 1년에 한 번씩은 꼭 부모님을 뵙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소. 나이 어린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백성이나 왕이 다를 바 없거늘, 이게 무슨 행패요? 더구나 방학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제 집을 찾아가는데 왕세자는 어찌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북해도로 간단 말인가? 아무 소리 말고 당장 돌려보내시오!”

수모를 당한 데라우치는 그 뒤 덕수궁에 들어가 왕세자를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 친 엄비에게 칼질과 발길질을 마구 자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들 영친왕을 보고 싶어 했던 엄비는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는 엄비가 법정 전염병인 장티푸스로 급사하였으므로 위생상 접근을 금지한다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자 서울의 각급 학교 학생들은 “예(禮)가 위생에 앞서느냐? 위생이 예(禮)에 앞서느냐?”고 외치면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왕실을 다스리는 궁내부에는 전국 유림에서 올리는 예식을 지키고 행함이 최상이라는 행례지상(行禮至上)의 상소문이 날마다 넘쳐 들어왔다.

이 기념비전은 건축사적으로 대한제국 시절의 전통 양식을 지닌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된다. 아쉽게도 기념비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전체 높이 4.5m, 비신 높이 2.5m, 비신 폭 0.95m, 비신 두께 0.4m 크기로 매우 장중함을 보여준다.

광화문 사거리 동편에 서 있는 ‘세종로 만세문’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전각이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으로 사적 제171호다. Ⓒ장영은
광화문 사거리 동편에 서 있는 ‘세종로 만세문’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전각이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으로 사적 제171호다. Ⓒ장영은

 

비각 안에 도로원표 설치

기념비전 담장 안쪽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라는 글자가 있다. 기념비전 안에 있는 도로원표에는 서울~부산, 서울~목포, 서울~평양, 서울~신의주 등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가 기록돼 있다. 세종로 만세문을 시발점으로 서울에서 각 지방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을 알려주는 표지다. 이 도로원표는 서울 세종로 만세문을 기점으로 한반도 전체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마련된 것이다.

도로원표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14년으로 광화문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였다. 그 뒤 1935년 기념비전 안으로 옮겼다가, 1997년 12월 29일 광화문 파출소 앞으로 장소를 옮겨 현재에 이르렀다.

 

탐관오리 공개 처형장 ‘혜정교’

세종로 만세문 기념비각 길 건너 남쪽 광화문 우체국 자리는 조선시대 서민 감옥 전옥서가 있었다. 종로 네거리 종각 앞에 있던 양반 감옥 의금옥에 대칭되는 곳이었다. 전옥서는 일명 서린옥으로 불렸는데, 전옥서의 정문인 솟을대문 안쪽에 남자 감옥과 여자 감옥이 따로 있었다. 특히 광화문 우체국 북쪽에는 혜정교라는 돌다리가 있었다. 이곳은 탐관오리들을 공개 처형하던 형장으로 악명을 남겼다.

삼청동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경복궁 안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이 동십자각 부근에서 합류되어 중학천이 되고 지금의 미국대사관과 교보빌딩 뒤편으로 흘러 광화문 우체국 북쪽을 돌아 청계천으로 흘러 내렸다. 지금은 이 개울이 모두 복개되어 중학천도 돌다리로 흔적을 감추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관청에서 재물을 많이 탐한 자를 혜정교 위에서 삶는다”하였다. 또 <한경지략>은 “국법에 탐장한 자는 혜정교 다리에서 팽형(烹刑)에 처한다”고 했다. ‘삶는다’거나 ‘팽형’이라는 말은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담아 넣고 삶는 공개형을 말한다.

외국인들이 쓴 견문기에 의하면 혜정교는 조선말에서 구한말까지 있었는데 집행된 공개 처형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공개 처형의 과정은 이렇다.

죄인을 커다란 가마솥에 들여앉힌 뒤에 솥뚜껑을 닫고 구령에 따라 장작불을 지핀다. 실제로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늉을 연출한다. 하지만 가마솥 안에 들어간 죄인은 자신이 구워 삶아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집행관이 탐관오리의 죄목을 읽어 내려가는 처형 과정을 시행한 뒤 죄인을 가마솥에서 끌어내어 살아있는 죄인을 그 가족에게 인도한다. 그러면 그 가족은 이 죄인을 칠성판에 뉘어 집으로 들고 돌아가 격식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장례를 치른다. 그러나 실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호적이나 족보에서 삭제하여 살아있되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 죄인이 처벌 받은 뒤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비 없는 사생아’로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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