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에서 혼이 난 K영감 이야기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경로당에서 혼이 난 K영감 이야기

2016.03.11 · 호천웅(전 KBS LA 특파원) 작성

“행복한 경로당을 만들겠습니다” 믿어주세요!

지난해 K영감은 집 앞길을 지나다 평소 친하게 인사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상의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우리 동네 경로당 회장감이 없어 큰일이에요. 영감님이 회장을 맡아주세요.” 생뚱맞은 제안이어서 사양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거듭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경로당 문 닫게 생겼어요. 도와주세요.” 어영부영하다가 회장이란 감투를 썼다. 대한노인회 구 지부와 세무서에 필요한 수속도 마쳤다. 회장이 된 K영감이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재미난 시가 한편 실려 있었다. <꽃피는 지하철역>이라고… 그 시(詩)를 본떠서 시를 한편 써봤다. 

제목을 <꽃피는 경로당>이라고 붙였다.

경로당 이름이 꽃 이름이면 좋겠어  / 목련 경로당, 개나리 경로당, 진달래 경로당, 라일락 경로당, 들국화 경로당…  꽃 이름을 붙이면 경로당이 꽃밭 같을 거야. /  친구야, 오늘 민들레 경로당서 만나자 / 그럼 꽃밭에서 만나는 기분일거야

늙은이들이 꽃이 된 기분이 되겠지/ 노인들이 늘 꽃 이름을 부르면/ 아이들이 듣고 웃을 가? 뭐랄 가? / 경로당에서 노래 부르면 꽃 같은 마음이 되겠지!/ 경로당에서 꽃노래가 들리면/ 엄마들도 아이들도 꽃노래를 부르겠지

온 동네서 꽃향기가 날거야 /  5월 뒷산의 아카시아 향기처럼…

K영감은 이왕 회장이 됐으니 꽃 같이 곱고 향기 나는 그리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경로당을 만들기로 작심을 했다. 전체 경로당 회의에서 큰 소리로 연설도 했다. “최고의 경로당을 만들고 최고로 재미있게 지냅시다.” 그리고 모방한 시(詩)도 멋지게 낭송했다. 노인 회원들이 박수를 치기는 했는데 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구청에서 제반 경비도 대주고 밥해 먹으라고 쌀도 나오는 데 쌀이 많이 남았다. 그런데 부족한 경로당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쌀이 남으면 구청에 반납해서 부족한 곳에서 쓰게 하고 부족하면 그에 따라 대책을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말도 안 된다는 반대가 쏟아졌다. 그러면서 남은 쌀은 떡을 해서 돌려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왔단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 말대로 남은 쌀로 푸짐하게 떡을 해서 회원들 집에 돌렸다.

 

K영감 수난시대

추석 명절이 되었다. 동네에 있는 독지가들이 배와 사과 등 과일 몇 상자를 보내왔다. 마침 경로당에 회원 몇 명이 있어 과일 상자를 뜯어 먹자고 했더니 오래된 회원 하나가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과일 상자를 뜯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무슨 얘기냐고 했더니 명절 때 들어오는 과일이나 돈 봉투 같은 것은 그대로 모았다가 회원 수 대로 똑 같이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K영감이 웃으며 “아니 경로당에 들어오는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은 경로당에서 먹으며 즐기라는 것 아닌가요” 하며 계속 먹도록 했다. K영감 생각은 경로당이 푸짐하고 즐거운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회장으로 추천했던 할머니 등이 경로당으로 와서 따지는 것이었다. 포장된 과일은 경로당에서 먹으면 안 되며 남는 쌀을 반납한다는 생각도 틀렸다고 항의해서 K영감과 말다툼을 했다. 그 다음 날부터 할머니 등이 경로당에 나타나지 않았고 복숭아 같은 과일은 몇 갠가가 상하기까지 했다.

달포가 지난 후 총회가 열린다고 했다. 회장도 모르게 무슨 총회인가 하고 참석했더니 회장 불신임안이 상정돼 있었다. K영감으로서는 황당했으나 그때서야 감이 잡혔다. 회장으로 추천했던 할머니 등이 돈도 많고 영향력도 커서 경로당을 좌지우지하는 터줏대감인데 새 회장을 시켰더니 말을 안 듣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들을 선동한 이는 10년 가까이 회장을 한 건설업자였다.

좋은 일 하려다가 혼이 났던 K영감은 작은 경로당에서도 이렇게 말이 많고 험한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나랏일 하는 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고도 했다. ⒸArtisticco/Shutterstock
좋은 일 하려다가 혼이 났던 K영감은 작은 경로당에서도 이렇게 말이 많고 험한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나랏일 하는 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고도 했다. ⒸArtisticco/Shutterstock

나랏일은 더 힘들겠지…?

경로당 회장 한다고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명예직도 아닌데 이렇게 욕먹고 불신임 받고 잘리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회원들의 지적은 반박해 말로 누르고 반대 의견은 묵살해서 회의를 무산 시켰다. 그러고 나니 울화가 치밀었다.

며칠 후 노인회 구(區) 지부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경로당 일에 손을 뗐다. 사표를 냈으나 몇몇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아 버릇을 고쳐 주기로 작심했다. 매운 맛도 보이고. 전직 건설업자 등을 고소하기로 하고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의 죄목으로 고소장을 썼다.

“회장의 경로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회원들을 부추겨 집합시킨 가운데 마치 공금을 부당하게 지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등 명예를 훼손했고 많은 회원들 앞에서 당혹감과 자괴감, 굴욕감 그리고 두려움까지 느끼게 한 모욕죄를 저질렀음.”

고소한다고 하자 그런 거 가지고 웬 고소냐고 난리가 났고 K영감의 아내가 더 반대해서 그냥 고소는 접고 참았다. K회장은 그 후 이왕 맡은 경로당 일인데 노인들의 생각을 좀 더 존중하고 다독거리며 그들의 입장을 배려했으면 좋았겠다고 반성은 했단다.

그리고 좋은 일 하려다가 혼이 났던 K영감은 작은 경로당에서도 이렇게 말이 많고 험한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나랏일 하는 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