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이전, 조선에 존재한 신문 유물(類物)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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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전, 조선에 존재한 신문 유물(類物)

조선시대의 신문 유물(類物)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문으로 기록된 <한성순보> 이전에도 신문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매체들이 있었다. 잘만 발전시켰다면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신문 유물(類物)들이다.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를 보면 선조 11년(1578년) 2월 유수배(游手輩)라는 한가한 선비들이 ‘조보(朝報)를 간행하여 민간인을 대상으로 매이자생(賣以資生·팔아서 돈을 벌어 생활하다)하다’가 임금님의 진노를 받고 모두 유배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보를 팔아 생활을 했다는 글귀로 미루어 이 간행물이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볼만한 가치가 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신문을 발간한 최초의 신문인들이라고 여겨진다.

애석하게도 그 형태와 내용은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체가 나라의 사정을 소상하게 기록하여 간자(間者=간첩)들에게 이롭게 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돼 임금을 진노케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내용이 조정을 진노케 할 정도로 상당히 깊은 것까지 다루고 있어 현대 신문이 갖출 요소들을 어지간히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유배당한 뒤 이런 신문유의 간행물이 300년 동안이나 암흑기를 맞았다. 그리고 1882년 조선 고종 시대에 드디어 한성판윤 박영효에 의해 <한성순보>가 태동된다.

이이의 를 보면 선조 11년, 선비들이 조보를 간행하여 판매하다가 임금님의 진노를 받고 유배를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nayneung1/Shutterstock
이이의 <석담일기>를 보면 선조 11년, 선비들이 조보를 간행하여 판매하다가 임금님의 진노를 받고 유배를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nayneung1/Shutterstock

대자보와 같은 벽서는 조선시대 은닉서(隱匿書)라고 불렸는데 관청이나 대궐의 담벼락에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문중 송사와 같은 억울한 일을 몰래 공시했다.

남부 지방에서는 서석(書石)이라고 하여 억울한 일이나 폭로할 일 등 민원(民願)을 널찍한 돌에 적어 길바닥에 던져두고 오가는 사람이 보도록 했다. 서석을 읽어본 사람은 반드시 제 자리에 다시 놔둬야지 이를 어기거나 파손할 경우는 액귀가 붙는다고 믿었다. 사발통문과 함께 이런 원시적인 방법들이 그나마 백성의 의사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상 신문의 기능을 가진 매체였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한성순보>보다 먼저 간행된 부산의 ‘조선신보’

부산에서 발행된 <조선신보(朝鮮新報)>는 <한성순보>보다 햇수로는 2년 앞선 1881년 12월 10일 발행된 조선반도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신문이다.

<조선신보>는 일본인이 설립한 부산상법회의소(釜山商法會議所)에서 부산에 진출한 일본인과 일본 상인들을 위해 발행했던 일본인 신문이었다. 발행 목적은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으로 인한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부산과 원산에 진출한 일본 상인 간의 정보 교류와 상업적 이익을 확대시키자는 데 있었다.

1882년 3월 3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의 잡보란에 <조선신보>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도쿄니치니치신문' 잡보란에 실린 <조선신보>

<조선신보>는 조선국 부산 본정(本町) 2정목(丁目) 20번지의 조선신문사에서 오이시도쿠오(大石德夫)씨가 간사 겸 편집·인쇄인으로 발행하였다. 신보의 제1호는 일본 메이지 14년 12월 10일부로서 조선력 신사년 10월 19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제1호는 1매이며 2호부터는 피국지(彼國紙)로 반지판(半紙判)의 철본(綴本)이다. 이는 금년 2월 5일 발행으로 조선의 12월 17일이다.

<조선신보>의 창간호는 1장짜리 신문이었으나 2개월 후에 나온 제2호부터는 훗날에 <한성순보>와 같은 뉴스북의 형태로 바뀌었다. 일본 신문의 경우 처음에는 뉴스북 형태로 나오다가 1870년대 중반부터 1장짜리 신문으로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조선신보>가 왜 판형을 뉴스북 형태로 후퇴했을까? 그 이유는 신문이라는 문물 자체가 생소한 조선인에게 1장짜리 신문이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신보>는 2호 발행 이후 순간(旬刊)으로 정착되며 매호 양지 각 10장의 뉴스북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신보>의 창간호는 1장짜리 신문이었으나 2호부터는 매호 양지 각 10장의 뉴스북으로 자리 잡았다. ⓒalexkich/Shutterstock

또한 <조선신보>는 1 호(號)에 4전(錢)의 구독료를 받았는데, 1지(紙)의 가격과 1책(冊)의 가격 상 볼륨 면에서 비교가 돼 판매상 어려움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책 정기구독의 경우 1할을 할인해주고 있는데 선진화된 판매 전략이다. 부산 지역의 경우 10책에 1할을 할인해주는 대신 우편요금을 별도로 받고 있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식으로 우편배달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고, <조선신보>를 외지에도 우편으로 발송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 신문이 한성(서울)에도 배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 일본어·한문·한글 혼용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신보>가 일본어와 한문, 그리고 제한된 범위지만 한글을 혼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조선신보>의 독자층이 일본 상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관리, 지식층은 물론 일반인 구독자들까지라고 보인다.

편집 내용은 매호 표지 뒷면 상단에 예언(例言)이라는 한문으로 된 간행 취지문을 싣고 있다.

‘본소 신문간행지지취, 재전서술 경제논설’(本所 新聞刊行之旨趣, 在專敍述 經濟論說)

즉, 간행 취지는 오로지 경제에 대한 논설에 있다고 밝힌데 이어, 양국의 넓은 학식을 발굴하는데도 이바지하고, 사회의 기사이문(奇事異聞)을 게재하여 널리 알리는 일에도 힘쓰겠다고 밝히고 있다.

예언 아래 면에는 목차를 싣고 있는데 영사관의 공지사항인 영사관녹사(領事館錄事), 사설, 잡보, 부산 상황(商況), 원산통신(元山通信), 독자투고인 기서(奇書), 물가표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조선의 개화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 많다. 1882년 3월 25일자 제7호 잡보에는 조선의 정세를 일본어로 싣고 한글 번역문도 동시에 게재했다.

<조선신보> 잡보란에 실린 조선의 정세(한글 번역문)

‘근래 조선 완고당(頑固黨·수구파를 지칭하는 듯)은 다시 세력을 얻어 앞서 일본과 화친하던 조약을 거절함만 못하다고 대단히 요란한 모양이니 차라리 큰 싸움을 시작하면 더러는 개화도 하고 또 양국의 교의도 옛날보다 후히 될까 생각하노라.’

<조선신보>의 편집노선을 엿보게 하는 기사이다. 이 기사를 굳이 한글로 번역하여 실었다는 것은 <조선신보>가 반개화적 세력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일본의 관점에서 조선의 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조선인들에게 국제정세 등 일본의 관점을 주입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신보> 광고와 연재소설도 게재

<조선신보>에는 광고가 등장하며 연재소설과 유사한 형태의 신문소설이 등장했다. 1882년 4월 15일자 제9호에는 약(藥) 광고가 실렸다. 광고 안내문은 이미 5호부터 게재했다. 연재소설은 제8호부터 금화산인(金華山人) 원작의 임경업전(林慶業傳)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연재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 신문에 연재소설이 도입된 것은 이미 1875년의 일이다.

1881년 12월 10일에 조선 땅에서 최초로 제작된 신문 <조선신보>가 조선의 조정에 전달되지 않았을리 없다. 훗날 <한성순보> 창간진도 이 신문을 여러 각도에서 참조했을 것이다.

<한성순보>의 경우 1883년 9월 7일에 장박, 오용묵, 김기준이 사사로 발령받아 창간진에 합류하고, 9월 20일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신문 발행의 고문으로 실무를 지휘하면서, 꼬박 1개월 11일이 지난 10월 31일에 <한성순보>를 창간한 것으로 보면, 비록 유길준 팀이 창간 예비준비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창간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신문 제작에 대하여 아무런 경험도, 숙련된 기술도 없었던 창간제작진이 역사상 최초로 신문을 창간하는데 소요한 기간으로는 너무도 단기간이어서 믿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 숨겨진 시간 속에 <조선신보> 제작의 노하우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한성순보>의 창간사

<한성순보>의 창간사인 순보서(旬報序)는 김윤식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순보서 역시 순한문이다. 김윤식은 신문관련 부서 어느 곳에도 함자를 올리지 않은 당시의 실세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성순보> 창간의 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한성순보> 창간사 '순보서(旬報序)'

“우(禹)임금은 구정(九鼎)을 만들어 구주(九州)를 형상하였고, 주관(州官)을 두어 국토를 구분하였으나 요복(要服), 황복(荒服) 이외에는 조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예전에는 산천이 막혀있고, 문물과 제도가 서로 달라서 덕을 베풀어도 힘이 먼 곳에까지 미치지 않기 때문에 먼 곳에까지 경략하는데 마음을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풍기(風氣)가 점차 열리고 지교(智巧)도 날로 발전하여 선박이 전 세계를 누비고 전선(電線)이 서양까지 연결되었으며, 공법(公法)을 제정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항만·포구를 축조하여 서로 교역하므로 남북극, 열대한대 할 것 없이 이웃 나라와 다름없다. 사변(事變)과 물류(物類)가 온갖 형태로 나타나고 거복(車服), 기용(器用)도 일만 가지로 다양하니 세상 일(世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를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정에서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국 소식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소식까지 게재하여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배포하기로 하고 그 이름을 순보(旬報)라고 하였다. 견문을 넓히고 여러 어려운 점을 풀어 주고, 상리(商利)에도 도움을 주고자 했으니, 중국과 서양의 관보·신보를 우편으로 교신하는 것도 그런 뜻에서이다.

세계 속의 방위진침(方位眞針), 정령(政令), 법도, 부고(府庫), 기계, 빈부, 기근에서 인품의 선악, 물가의 고저까지를 사실대로 정확하게 게재하여 밝히 알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행간에는 포폄권징(褒貶勸懲)의 뜻도 들어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독자들이 먼 장래를 외면하고 가까운 현실에만 집착해 휩쓸려 걷다가는 자기의 나갈 방향을 잃게 될 것이고, 새 것에는 어둡고 옛 것만을 고집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 격이 될 것이니 반드시 때와 형세를 잘 살펴 무작정 남만 따르거나 자기 것만 고집하지 말고 취사(取捨)와 가부(可否)를 반드시 도(道)에 맞도록 하여 정도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박문국을 개국(開局)한 본래의 뜻이다.”

순보서(旬報序)의 내용을 줄이면 아래와 같다.

 ‘예전에는 산천이 막혀 있고 문물과 제도가 서로 달라서 다른 나라 사이에 교류가 없었으나, 이제는 세계 각 나라가 이웃과 같이 교류가 빈번해졌다. 따라서 우리 조정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외보(外報) 즉 외국 소식을 폭넓게 번역하고, 내사(內事) 즉 국내 사정을 자세히 게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외국에도 배포하기로 했다. 이름을 순보라 하고 국민의 문견을 넓히려 한다’

<한성순보>의 기사는 국내 관보(國內官報), 국내 사보(私報), 각국근사(各國近事), 해설기사(解說記事), 시치탐보(市値探報·물가정보)와 기타 잡보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