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 [다시 쓰는 징비록 50]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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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 [다시 쓰는 징비록 50]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킨 7년 전쟁의 왜군 총지휘관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이다. 하지만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켜 1910년 한일합방의 토대를 닦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저격당해 숨진 것처럼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7년 내내 ‘괴로움’을 당하다가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조선을 빌려 명나라를 치겠다는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 꿈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신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다리가 되었던 조선반도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바다가 된 시산혈해(屍山血海) 대참극의 무대가 되었다.

만고(萬古)의 역사를 보더라도 가까이 있는 나라치고 원수(怨讐)가 되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측근에 의해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영웅들도 헤아릴 수가 없다.

 

자칭 태양의 아들, 정명가도로 피바다를 준비하다

7년 동안의 왜란에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일까.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는 1585년 천황으로부터 관백(關白), 1586년에는 풍신(豊臣)이라는 성(姓)을 하사받고 1587년 규슈 정벌을 끝으로 일본 전국을 통일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 교토(京都)의 새 저택인 주라끄테이(聚樂第)에서 전국 다이묘(大名, 영주)들과 함께 천황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그는 스스로 천황(태양)의 신하라는 뜻에서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 천황(태양)의 신하라는 뜻에서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히젠 나고야성 박물관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모형상. ⓒ김동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 천황(태양)의 신하라는 뜻에서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히젠 나고야성 박물관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모형상. ⓒ김동철

히데요시는 유교나 불교보다 신도(神道)가 우월하다고 했고 신사(神社)를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유럽에서 전파된 기독교가 발붙일 땅이 없었다. 칼을 찬 무사 한 사람이라도 어딜 가나 신사를 세우고 신국의 정신이 붉은 태양처럼 세상에 널리 뻗어갈 것을 굳게 믿었다. ‘신국인(神國人) 절대 우위론’이나 ‘일본 절대 불패론(不敗論)’ 등은 신도 우위사상에서 비롯된다.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대륙정벌론(大陸征伐論)이나 정한론(征韓論)으로 구체화되었다. 임진왜란만 하더라도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명분을 세웠다. 그러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링 법칙대로 약한 조선을 먼저 삼킨 후 명나라와의 일전은 기회를 보아서 한다는 속셈이 있었다. 정한론자들은 끊임없이 조선을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다. 1587년 일본 국내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 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조선사정에 밝은 소 요시토시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해줄 것을 건의했다.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가신(家臣)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 국왕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해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불손하다고 해서 조정에서는 상종 못할 오랑캐로 취급해버렸다.

이즈음 충북 옥천에서 은거해 있던 중봉 조헌(趙憲)은 왜란 전 일본 사신이 와서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떼를 쓴다는 사실에 분개해 도끼를 들고 한양 대궐문 앞에서 부복(仆伏)하며 상소문을 올렸다. 일본 사신을 베어 죽여야 하고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선조에게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자신을 도끼로 찍어달라는 극한 표현이었다. 이를 지부상소(指斧上訴)라 하는데 중봉의 소는 일만 자가 넘었다 해서 ‘만언소(万言疏)’라 부르기도 한다. 조헌(趙憲)은 왜란이 발발했을 때 700여 명의 의병들을 모아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했다.

조헌은 정명가도라고 표현한 일본 사신을 베어 죽여야 하고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김동철
조헌은 정명가도라고 표현한 일본 사신을 베어 죽여야 하고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김동철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 즉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통신사 파견을 거절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소 요시토시 대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해왔다. 그리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정은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하는 통신사 일행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이듬해인 1591년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드러났다.

 

죽음을 앞둔 권력자의 회심

이어 3차 일본 사신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 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 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그제야 놀라 그 해 5월 일본의 서계(書契)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소상하게 명나라에게 알리는 한편, 일본 침공에 대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명가도(征明假道)니 가도입명(假道入明)이니 하는 말은 선조와 조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경한 말이었다.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 이 말은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최대 철학으로 삼고 ‘소중화(小中華)’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선조와 조정대신들에게 씨가 먹히지 않는 도발적 언사였다.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린다는 황제가 있는 천자(天子)의 나라, 조선의 상국(上國)인 명나라를 치러간다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히데요시는 통일된 일본 내 반대세력인 규슈지역 다이묘(大名)들을 잠재우려는 책략으로 조선침략을 구상했지만 그때까지 일본에는 세력이 만만치 않은 대영주(大名)들이 있었다. 이들은 1598년 8월 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死後)에 힘의 공백 상황에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여 또 한 차례 전국통일 전쟁을 했다.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도 1598년 사망을 앞두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의 허무함을 담은 소회를 사세구(辭世句)에서 밝혔다. 당시 나이 63세였다.

“이슬처럼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내 몸이구나! 나니와(難波, 오사카의 옛 지명)의 일은 꿈속의 또 꿈이었구나!”

천하통일을 이룬 영웅의 인생도 여느 삶과 다르지 않았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무사(武士)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다하여 출전하여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공명(功名)을 세워 입신출세(立身出世)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석고(石高, 쌀 생산량)가 많은 영지(領地)를 가진 일국일성(一國一城)의 영주(領主)가 되는 게 꿈이었다. 무사들은 전투에서 자기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햇볕 아래 이슬처럼,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미련 없이 버렸다. 버리는 자 앞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은 할복을 꽃에 비유해서 아름답게 미화한다. 영화 속 할복을 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모습. ⓒ김동철
일본은 할복을 꽃에 비유해서 아름답게 미화한다. 영화 속 할복을 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모습. ⓒ김동철

일본 무사(武士)가 할복자살(切腹自刀)을 할 때 먼저 지세이구(辭世句, 사세구·유언장)를 써서 남기고 작은 칼인 와끼자시(脇差, 협차)로 배를 가르는 하라기리(切腹, 절복)를 한다. 이 때 고통 없이 빨리 죽도록 다른 무사가 까따나(刀, 큰 칼)로 목을 쳐주는 가이샤끄(介錯, 개착)를 한다. 일종의 안락사(安樂死)이다. 이 때 사무라이는 바람에 날리는 사꾸라(櫻, 앵) 꽃잎처럼 목숨을 버렸다고 하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쓰바끼(椿, 춘) 즉 동백꽃이라고 했다. 주군(主君)을 위해서 목숨을 한낱 꽃잎처럼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목숨을 꽃에 비유해서 아름답게 미화한 대목, 그것이 바로 할복의 예와 미덕을 존중하는 전국주의 시대 충성심의 표현이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쟁 후유증과 영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죽은 히데요시의 배를 가르고 소금을 넣어 방부처리한 뒤 관복을 입혀 관속에 뉘여 놓았다. 또 때로는 통나무 위에 앉혀놓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죽음이 외부로 알려지자 ‘새로운 권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회(大老會)에서 사망을 공식 선포하고 1598년 조선에서 왜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KBS 의 한 장면. 수은 강항의 주자학을 배운 일본 후지와라 세이카의 모습. ⓒ김동철
KBS <역사스페셜>의 한 장면. 수은 강항의 주자학을 배운 일본 후지와라 세이카의 모습. ⓒ김동철

시마즈 히사미찌(島津久通)는 왜란이 끝난 뒤 1670년에 쓴 <정한론(征韓論)>에서 “신공(神功) 황후의 삼한(三韓) 정벌 이래 조선은 일본의 조공국(朝貢國)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조공을 이행하지 않아 히데요시(秀吉)가 출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시마즈 히사미찌는 임진왜란 때 강원도를 장악했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후손인데, 요시히로는 1595년 3월 조선의 호랑이 고기(虎肉)를 염장처리 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치기도 했다.

 

깊은 악연, 같은 해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임진왜란(1592~1593년)을 일본에서는 당시 천황의 연호에 따라 분로쿠 노 에키(文祿の役), 정유재란(1597~1598년)을 게이초 노 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혼내준다’는 뜻을 담은 역(役)은 우리의 해석으로는 정벌(征伐) 또는 난(亂)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세종 때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 출병을 ‘대마도 정벌’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중국은 어떻게 불렀을까.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신종(神宗)의 연호를 따서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고 부른다. 또는 ‘항왜원조(抗倭援朝)전쟁’으로도 부른다. 즉 ‘왜구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중국이 6·25전쟁을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북한)을 도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1597년 정유재란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에게 “다 죽이고 다 불태우고 적국(赤國, 전라도)을 완전히 텅 비워라”고 명령했다. 남해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연전연패한 후 제해권을 빼앗긴 데 대한 분풀이었다. 또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함으로써 왜군 20여만 명의 먹거리를 공급할 요량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동해지방의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단 부하가 되었을 때 겨울에 친방(親方, 오야가타 사마)인 노부나가의 짚신을 가슴에 품었다가 내놓는 등 하급 무사, 즉 아시가루 노부시(足輕 野武士)였다. 풍신(豊臣)이란 성을 얻기 전이었으므로 그의 이름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서 절대 신임을 얻었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당시 농민출신의 히데요시는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루(猿)’라고 불렸다.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불평이 많고 반골기질이 강한 규슈 남쪽지역의 다이묘(大名)들을 선봉장으로 조선침략에 동원했다. 1591년 8월 전국 영주(大名)들에게 조선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리고 1592년 2월 초순 규슈에 전진기지인 나고야성(名護屋城)를 축조했다. 3월 26일 교토(京都)에서 이곳에 온 히데요시는 1593년 7월 11일 진주성 승전보(勝戰譜)를 받고 8월 20일 교토로 돌아갈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조선침략전쟁을 총지휘했다.

히데요시는 부산포에서 이틀 만에 들어오는 급행통신연락선 하야부네(早船)를 통하여 조선에 있는 왜장들의 현지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명령했다. 성격이 급한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에 건너가 지휘하려 했으나 조선의 바다는 이순신(李舜臣)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만약 대선(大船)인 아타게 부네(安宅船)를 탄 히데요시가 발견되면 필사의 공격을 받을 것이 우려된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극력 만류로 끝내 조선땅을 밟지 못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두려워 조선땅을 밟지 못했다. 히젠 나고야성 박물관의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 ⓒ김동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두려워 조선땅을 밟지 못했다. 히젠 나고야성 박물관의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 ⓒ김동철

1598년 8월 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병사(病死)했다. 이어서 11월 19일 파란만장 삶을 산 이순신(李舜臣)이란 큰 별이 노량 앞바다에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명나라, 왜 등의 동북아 7년 동안의 국제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틈을 탄 만주의 여진족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어 마침내 대륙의 중원(中原)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