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의 발상지 탑골공원, 그 역사의 거리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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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의 발상지 탑골공원, 그 역사의 거리

서울 종로 탑골공원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저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 당시 선포한 독립선언서 전문의 앞부분이다. 육당 최남선이 초안하고 만해 한용운이 다듬은 명문장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일제 만행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발상지는 바로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이다. 뼈 모양의 탑이 있어 탑골(塔骨)공원이라고 불린 곳이다.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던 3·1 운동이 시작된 곳,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이곳은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였는데 탑이 생기면서 탑동(塔洞)으로 불리다가 탑동공원(塔洞公園) 일명 파고다공원이 되었다.

공원 면적은 1만 9599 m², 수도권 전철 1, 3, 5호선이 만나는 종로 3가역과 가깝다. 탑골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으로 국내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며, 한국인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공원으로 그 역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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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塔骨公園)은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위치한 공원으로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내 최초 도심 내 공원이며 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Wikimedia Commons

일제에 항거한 최대 시위

‘대한 독립 만세’가 천지를 진동했다. 일제 강점기 35년간 벌어진 민족 독립 운동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만세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3·1운동은 그해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먼저 일어났다. 일본 유학생인 이광수, 김도연, 송계백, 최팔용 등이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것이 2·8 독립선언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독립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국내 항일운동 인사들이 일어선 것이다. 해외에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여기에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본을 향한 시민들의 저항 심리에 불을 붙였다. 일본이 우리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지난 10년 간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인한 국민감정이 폭발 상태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결국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3·1 운동 준비가 진행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도 함께 인쇄했다. 장소는 탑골공원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자 자칫 폭력 투쟁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해서 태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를 알 수 없던 학생들은 33인을 기다리다가 정오에 스스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

평화적인 만세 시위에 일본은 헌병과 경찰들을 동원해 총칼로 무자비하게 만세 시민들을 살상했다. 국민들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고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갔다.

3·1 운동이 독립으로 연결되진 못했지만 결실은 엄청났다. 일제 통치는 문화통치로 바뀌었지만,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국외내적으로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원각사 터의 10층 석탑

태종이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를 눈치 챈 큰아들 양녕대군은 미친 체하며 방랑을 즐겼고,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가출하여 불사(佛寺)를 베풀고 불심에 귀의하였다. 양녕은 사냥을 하여 동생 효령이 있는 원각사로 가서 사냥한 짐승을 구워 주색판을 벌였다. 그러면서 “나는 복도 많다.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말이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탑골공원 원각사 터의 10층 석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며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다. 대리석으로 세운 이 탑은 수법이 세련되고 화려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시대에 아이러니 하게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1464년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이때 공사에 동원된 군사는 2100명이었고, 13인의 부장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근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완공된 원각사 규모는 도성 안에서는 제일의 대사찰로 중건되었다. 특히 10층 석탑 안에는 전국에서 동원한 구리 5만 근으로 주조한 대종(大鐘)과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원각경(圓覺經) 경전을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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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안에는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며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Wikimedia Commons

연산군 때는 기생방으로 삼아

세조 이후 숭불(崇佛) 정책이 고개를 들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철저한 억불(抑佛) 정책으로 바뀌고, 그나마도 연산군 시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년(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못했다.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 명과 악사 1000명,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고,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이라 하였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514년(중종 9) 호조(戶曹)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사찰 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10층 석탑과 비(碑)만 덩그러니 남았다.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이 1897년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어서 1920년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브라운은 1893년 조선에 들어와 총세무사, 도지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과 관련한 일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폐허로 변한 원각사 터를 공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여 허락을 받은 것이다. 김홍집 내각 때부터 서울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가 논의되었다.

 

황실 관현악단 연주 장소로 인기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붙인 탑골공원 팔각정(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위하여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인데, 이후 황실 관현악단의 음악 연주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일요일에 한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어 관현악을 듣고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평일에도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7월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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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사진은 3.1운동 서판. ⓒWikimedia Commons

지폐와 동전에 등장한 국보

한국은행권 50원 지폐 앞면과 10원권 동전에 나온 탑골공원 팔각정 모습이 바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이 건물은 건물 내부의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고 기둥열을 구성하여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한 변의 길이는 12자, 평주의 높이는 11자, 내진을 이루는 고주의 높이는 14자이다.

대들보와 직각방향으로 단면이 작은 부재로 보를 걸었고, 그 상부에 동자주를 세우고 상중도리를 얹었으며, 고주와 상중도리 사이에는 각 서까래를 사용하여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구성한 독특한 건물이다. 일반적인 단청과는 달리 한국적인 정서가 강조된 문양들로 시대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외관상의 비례가 훌륭하여 남산 팔각정의 모본(模本)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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