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침실, 궁정동 주한 ‘교황청 대사관’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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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침실, 궁정동 주한 ‘교황청 대사관’

청와대 인근에 위치한 로마 교황청 대사관

서울 종로 효자동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주한 로마 교황청 대사관이 있다. 청와대 서편 궁정동에 자리한 조경수가 아름답게 가꿔진 주한 교황청 대사관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종교와 종파를 떠나 소탈한 사랑의 실천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1년 만에 세상을 바꾼 사람’으로 존경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하여 환영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주례하고 이어서 대전교구에서 개최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였다.

주한 교황청 대사관 안의 ‘교황의 침실’은 경호 문제로 공개되지 않았다. 숙소 내부는 침대와 옷장, 탁자 등 최소한의 가구만 갖춘 모습이라고 천주교 관계자들은 전했다. 교황청 대사관 측은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치안과 경호 문제가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2층으로 된 주한 교황청 대사관은 지은 지 50년이 넘은 낡은 건물”이라고 밝혔다.

 

교황의 한국 방문 역사

로마 교황의 한국 방문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이었다. 제264대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시상식 때에 처음 방한한 뒤, 1989년 상체대회 때에도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리고 2014년 8월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한국 가톨릭 역사와 함께 길이 빛나는 이정표를 세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은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세 번째 일로 매우 역사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기간 중에 청와대를 예방하고 한국주교회의에서 강우일 베드로 의장 등 주교단과 만남의 행사를 가졌고,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자와 일반 신자 등 5만여 명의 환영을 받고 격려의 말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로 1845년 상해에서 서품을 받은 뒤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충남 당진 ‘솔뫼 성지’에서 청년들과 문화 프로그램을 함께 하였고, 광화문에서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집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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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프란시스코 교황은 청와대 서편 궁정동에 자리한 주한 교황청 대사관을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다. ⒸFtdelusion66/Shutterstock

교황의 역사

교황 제도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교황은 성 베드로였다. 제1대 성 베드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의 열쇠’를 받고 교황에 취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즉위 연도 기록은 분명하지 않으며 64년에 교황이 되고 68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이한 점은 로마 교황마다 라틴어를 공식 명칭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라틴어 교황명은 St. Petrus. 제2대 성 리노 교황(67~76년), 제3대 성 아나클레토 교황(76~88년)으로 이어진 뒤,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2013년~현재)에 이르렀다. 교황을 ‘파파 Pope’라고 호칭하는 것은 5세기 중엽부터 ‘믿음의 아버지’로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파파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파파스 Papas(아버지)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로마 주교 이외에 다른 주교가 ‘파파 Pope(믿음의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여성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교황 역사에 등장한다. 존경받던 한 수도사가 요한나라는 이름으로 여성 교황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아직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교황의 통계도 무척 흥미롭고 다양하다. 역사상 266명의 교황이 탄생하였지만 정식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황임을 주장했던 대립 교황도 39명이나 된다. 역대 교황 가운데는 4명이 사퇴하고 5명은 감옥에 갇혔으며 5명은 살해되었다. 1명은 파면되고 1명은 대중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

역대 교황 중 가장 오랫동안 교황을 지낸 사람은 제255대 비오 9세로 31년 7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임하였다. 재임 기간이 가장 짧았던 교황은 제92대 스테파노 2세로 단 4일이었다. 그는 교황에 선출된 뒤 뇌출혈로 사망했다. 가장 젊은 나이에 교황이 된 사람은 제138대 그레고리오 5세로 24세 때에 교황이 되었으나, 2년 9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서울에서도 소문난 명당, 교황청 대사관

주한 교황청 대사관 자리는 조선시대 세도가(勢道家)였던 안동 김씨의 인맥 중에서도 최고 정점을 이루었던 김번(金璠)의 집 터였다. 그는 중종(中宗) 때의 명신인데, 평양에 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시체가 길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그런 난시에 평양 감사로 부임한 김번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단시일 내에 전염병을 퇴치하고 평양을 예전대로 복구시켰다. 그런 연고로 평양 시민들이 ‘잊을 수 없는 감사’라 칭송하며 대대로 그의 제서를 받들었다고 전한다.

김번의 이 집터는 서울에서도 최고의 명당 터로 손꼽혔다. 김번은 숙부인 학조 대사의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태극의 괘 원리에 따라 집을 지었다. 그런 명당 덕분에 조선시대 때 명신과 학자들을 무수히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김번의 증손자 김상용이 우의정을 지낸 것을 필두로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 김조근은 헌종의 장인, 김문근은 철종의 장인이 되었고, 김좌근, 김홍근, 김병시는 영의정, 김홍근은 우의정, 김병덕과 김이소는 좌의정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특히 우의정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왕족을 보호하여 강화로 피신하였다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폭한 충신이요,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를 배척한 척화 충신 제1호로 지목되어 청나라로 잡혀가 유폐를 당했던 인물이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병자호란 때 충신이자 문인으로 애절한 시조를 남겼다. 형 김상용은 왕족을 보호하면서 ‘어버이 자식 사이’를 읊었다.

어버이 자식 사이 하늘 섬긴 지친(至親)이라
부모 곧 아니면 이 몸이 있을소냐
오조(까마귀)도 반포(어린 새끼를 양육)하니 부모 효도하여라.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단장의 ‘가노라 삼각산아!’를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첩까지도 벼슬 장사

안동 김씨의 세도는 궁정동에 이어 종로 경운동에서도 대를 이어가며 위력을 떨쳤다. 더구나 경운동 안동 김씨 가문에서는 첩까지도 벼슬 장사로 한 밑천씩 꿰차며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왕을 사위로 둔 김조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딸을 순원왕후 왕비로 맞아들인 열두 살 소년 왕 순조(純祖)는 장인 영안 부원군 김조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섭정을 받아들였다.

결국 세도정치의 원조는 김조순인 셈이다. 그는 조선 영조-정조 시대에 문신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정조 9년 문과 병과에 급제해 출사했다. 그 뒤 1800년 정조와 사돈의 연을 맺어 사이가 돈독해지면서 세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친인척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해 ‘세도정치’를 연 첫 인물로 표현된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 김조순의 초상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왕을 사위로 둔 김조순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후기 문신 김조순의 초상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왕을 사위로 둔 김조순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조순이 국정을 잡으면서 조정은 물론 전국 360 방백 수령들이 안동 김씨와 연계하지 않고서는 벼슬자리를 지탱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 세도의 중추적 핵은 역시 김조순이 쥐고 있었다. 그 세도의 맥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으로 세습되었다. 특히 김좌근은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연임하면서 경운동 안동 김씨의 세도를 하늘의 새들도 두려워하였다고 윤효정의 <한말 비사>가 전한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 360주의 방백들과 수령의 봉물짐이 도로에 연락하여 교사동 솟을대문 안 누상별고(樓上別庫)로 들어와 쌓였다. 이 세도가에서 연회가 있을 때에는 육산주림(肉山酒林)과 주지 과산을 이루고 종들이 아부하고자 약과와 약식을 가져다가 그 세도 댁의 나귀와 말에게 먹이는 고로, 혜당 댁 나귀는 약식을 마다하고 호판 댁 큰 말은 약과가 맛이 없어 물린다는 동요를 길거리의 아이들이 노래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그뿐이랴! 김좌근의 첩 나합은 뇌물을 챙기고 주무르는 솜씨가 대단하였다. 귤을 한 수례 끌고 오는 미남에게는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대과에 급제시켜 주고, 허리에 만관의 전대를 두르고 오면 양주 원님을 즉석에 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첩 나합에게 줄을 대는 사내들이 줄을 이었다.

나합은 본 이름이 아니라 정승의 존칭인 합(閤)자를 붙여 나합(羅閤)이라 일컬은 것이다. 어느 날 김좌근이 첩을 불러 이르기를 “너를 두고 나합이라고 부르니 어찌된 연고인가?”하고 묻자 첩이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조개 합(蛤)이라 하나니 나합의 합은 조개 합일뿐 정승의 합(閤)이 아니오니 개념 하지 마옵소서!”

이를 두고 세간 사람들이 ‘우문현답’이라 조롱했다고 전한다. 이 안동 김씨의 세도는 김문근이 딸을 철종의 왕비로 들여보내면서 3대째로 이어졌다. 그러나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고 조 대비와 내통한 흥선대원군이 왕정을 복고하면서 순조→헌종→철종으로 내려오는 안동 김씨의 3대 세습은 5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안동 김씨 가문에 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준 김조순은 생전 정조(正祖)의 사랑을 많이 받은 충신으로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역사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