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영웅, 충무공을 기리며 [다시 쓰는 징비록 53]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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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 충무공을 기리며 [다시 쓰는 징비록 53]

지금도 하고 있을까. 해병대를 전역한 예비역 해병들은 대한민국 중심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전역신고를 한다. 대개 군 생활을 마치면 ‘지긋지긋한’ 그쪽을 보고 실례도 안 한다고 하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은 군생활의 피날레를 이순신 장군 앞에서 장식한다. 400여 년 막강한 왜적(倭敵)을 막아낸 장군의 불굴의 투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젊은 해병들의 불타는 애국심! 가히 ‘충무공(忠武公)의 후예(後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상. ⓒEverything/Shutterstock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상. ⓒEverything/Shutterstock

1592~1598년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그리고 여진(후금, 청나라) 등 4개국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일어났던 국제전이었는데 지금도 그 형세는 여전하다. 한반도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보면 주변국가에 고립되어 있는 형상이다. 100여 년 구한말 때는 물론이고 오늘날도 주변 강대국(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들은 작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까.

지난 1년 동안 이순신 장군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얻은 사실 하나는 ‘난세(亂世)는 영웅(英雄)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요즘 같은 시대에 걸출한 영웅 한 명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분명 난세는 아닌 것 같다. 경세가(經世家)입네 하는 자들의 올망졸망한 요설(饒舌)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시대다. 장군은 여전히 광화문 광장에서 시대의 파수꾼으로 나라의 불침번(不寢番)으로서 그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 가닥 위안과 희망을 얻을 수 있음은 행운 그 자체일 것이다.

 

역대 왕의 찬사를 받은 이순신

그런 장군에 대한 후일담을 다시 들어본다.

장군과 애증(愛憎)이 교차했던 조선 14대 왕 선조는 말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이어 조선 19대 숙종은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라는 소감을 밝혔다.

조선 22대 정조대왕은 200여 년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이순신(李舜臣)이란 세 이름 자를 세상에 꺼내놓은 주인공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끔찍한 비극을 목도(目睹)했던 정조는 여전히 당파싸움에만 몰입하는 대소 신료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야 했다. 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찾아주어야 했다. 파당으로 흐트러진 조정의 의견을 한 군데로 모아 진충보국(盡忠報國)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 표상으로 이순신 장군을 택한 것이다.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정조는 1792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발간을 지시했다. 그리고 내탕금(內帑金, 왕의 사적 금고)을 내서 발간비용을 지원한 결과 1795년 마침내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었다. 정조는 1793년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1794년에는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이 직접 지은 어제신도비를 세웠다. 또한 치제문을 직접 지어 통영 충렬사에서 제사하게 했다.

정조 때 편찬된 . ⓒ김동철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김동철

정조의 현양(顯揚)사업 못잖게 이순신 장군을 세상에 부활시킨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순신 장군의 현창(顯彰)사업을 1965년부터 시작했다. 정치판은 엉망진창이고 보릿고개에 먹고 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반드시 이뤄야 할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였다. 멸사봉공(滅私奉公), 선공후사(先公後私), 애민(愛民)과 창의(創意)정신을 가진 이순신 장군의 경세가적 정신 고양이 절대 필요했다.

1965년 4월 22일 남해 충렬사 경내 이순신장군 가묘 옆에 기념 식수(植樹)를 시작으로 노량해전의 전사지인 관음포 이락사 내에 친필휘호인 대성운해(大星隕海) 현판을 걸었다. 대성운해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휘오 '대성운해'. 남해 이락사 현판으로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김동철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휘오 ‘대성운해’. 남해 이락사 현판으로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김동철

이어 1967년에는 1706년(숙종 32)에 세워진 아산 생가터의 조그만 사당인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보수해 오늘날의 면모로 갖춰놓았다. 그리고 1968년 4월 27일 광화문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국가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형상화시켰다.

 

명나라 장군이 될뻔한 이순신

임진왜란 7년 내내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묵묵히 지켜봤던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은 <충민사기(忠愍祠記)>에서 이순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丈夫出世 用則效死以忠(장부출세 용즉효사이충) 장부로 태어나 세상에서 나라에 쓰이면 최선을 다할 것이며

不用則耕野足矣 若取媚權貴(불용즉경야족의 약취미권귀) 쓰이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와 부귀에 아첨하여

以竊一時之榮 吾甚恥之(이절일시지영 오심치지) 한때 이(권세와 부귀)를 도둑질하여 일시적으로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명나라 지휘관들의 갑(甲)질은 유명했지만 점차 이순신의 진면목을 보고는 생각을 달리했다. 명수장(明首將)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1598년 4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리분부왈(經理分付曰) 양호가 말하기를

이순신용력살적(李舜臣用力殺賊) 이순신이 그처럼 전력을 다해 왜적을 참살하니

이차아심가희(以此我甚嘉喜) 나는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겨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급속장상고무(急速獎賞鼓舞) 급히 명황제 포상을 요청하고 사기를 고무시킬 것이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전 명수군(明水軍) 도독(都督) 진린(陳隣)은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한 통의 편지를 올렸다.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明國)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 국토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진린은 고금도에 진을 쳤을 당시엔 이순신 장군에게 온갖 횡포를 부렸지만 1598년 11월 노량해전 때 장군의 지략가(智略家)적인 모습을 보고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칭송하는 말을 전했다.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즉 해를 목욕시키고 구멍 난 하늘을 깁는 재주와 지혜를 가졌다고 극찬을 한 것이다. 그 욕일보천(浴日補天)의 글씨 현판이 남해 충렬사에 걸려 있다.

진린의 청에 의해 명황제는 이순신 장군에게 팔사품(八賜品)과 수군도독(水軍都督) 임명장을 내렸다. 그러나 장군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평가가 이어진다. 이순신 장군의 평생 멘토였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길렀으며, 무릇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이순신 친필. ⓒ김동철
이순신 친필. ⓒ김동철

한산도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패했던 왜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들은 지금도 한산대첩 기념행사 때마다 그곳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동양의 위대한 장군

다음은 세계인들의 평가이다.

영국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의 평이다.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Nelson, 1758-1805)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 전승 축하연에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는 인터뷰하던 미국 기자에게 이순신 장군을 이렇게 추앙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순신의 하사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동철
도고 헤이하치로는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순신의 하사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동철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순신의 하사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10분의 1전력을 가지고 명량(鳴梁)에서 승리한 장군이다.

또한 일본 해군준장 사토 데쯔라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넬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루이터 미첼(Ruyter Michiel, 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라는 일본의 석학(碩學) 토쿠토미 테이이찌로의 말처럼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마다 장군은 부활(復活)했다.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징비를 정의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하여야 하며

즉유비무환(卽有備無患) 그것이 곧 유비무환 정신이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과 맥이 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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