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68년, 독일 통일에서 배우자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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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68년, 독일 통일에서 배우자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보도한 TV 장면. ©김준범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분단으로 인해 생긴 각 분야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루 빨리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진은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보도한 TV 장면. ©김준범

통일 위해 정부 어떤 노력했나?

‘통일’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따라 불렀던 ‘우리의 소원’이 그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통일이야말로 온 민족의 염원임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 노래는 1947년 3월 1일 서울 중앙 방송국 어린이 시간에 처음 발표된 이후 통일을 염원하는 온 국민의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게 됐다. 8분의 6박자 내림 마장조의 느리고 서정적인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될 당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노랫말이 지금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뀐 것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이었다. 그 때는 이미 분단(分斷)이 기정사실이 상태에서 정부는 노랫말 ‘독립’을 ‘통일’로 바꿔 교과서에 싣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한 사회에서 국민 애창곡으로 불리던 중 1989년 전대협(全大協) 소속 대학생 임수경 씨가 평양에 가서 이 노래를 부르자 북한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2000년 5월 서울에서 열린 평양 어린이 예술단 공연에서 예술단은 마지막 순서에 ‘우리의 소원’을 열창했다. 북한 공연단이 서울에 와서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우리의 소원’이 민족의 대합창으로 울려 퍼진 역사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은 역시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였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사적인 남북 공동 선언문에 서명한 후 참석한 관계자들과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남한과 북한, 그것도 두 정상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노래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오래 전부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2009년 김 대통령 국장(國葬, 8월 23일) 영결식 때 이 곡이 연주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본래 ‘우리의 소원’을 작사하고 작곡한 것은 천재 예술인 안석주(安碩柱·1901~1950)와 그의 아들 안병원(安丙元, 1926~2015)이다. 안병원은 당시 서울대학교 음대에 다니면서 이 곡을 만들었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로 시작되는 동요 ‘구슬비’도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이다.

올해로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68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민족의 염원이자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해 왔는가?

1970년대 초 △남북 공동 성명(1974년)을 시작으로 △남북 기본 합의서(1991년)에 이어 △남북 정상회담(2000년)에 이르기까지 남북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격랑을 헤쳐 왔다. 특히 개성 공단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어렵게 합의해 이룩해 낸 남북 경협의 상징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분단으로 인해 생긴 각 분야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루 빨리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과 북이 아무리 ‘우리의 소원’을 한 목소리로 부른다 해도 실천이 없으면 통일은 오지 않는다. 통일을 위한 실천 사항으로는 역시 쌍방 간의 다각적인 교류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인적 왕래(사람) △물적 교류(물자) △통신 교환(전화, 통신, 편지) 등 이른바 ‘3통’(三通)이 최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잠시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이 ‘3통’만 꾸준히 지속되어 왔어도 지금쯤 통일을 얘기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을 것이다.

사진은 이산 가족 상봉 현장을 보도한 TV 장면. ©김준범
이산가족의 만남을 정례화하고, 이산가족 면회소를 설치해 언제든지 그곳에만 가면 면회할 수 있도록 남북이 합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보도한 TV 장면. ©김준범

말보다 실천, 교류 지속한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가 통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반드시 독일에서 배우고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은 벌써 통일 2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동독 정부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서독 정부는 시민 및 학생 교류 프로젝트를 과감히 제의해 합의를 이룬 다음 이를 꾸준히 실천에 옮겨 나갔다. 그러자 동독도 조금씩 호응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서는 서독 학생 5000명이 동독을, 동독 학생 1250명이 서독을 방문하여 호텔이 아닌 가정집 민박을 통해 서로를 피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김영희 대기자(중앙일보, 2014.1.17)에 따르면 1983년 동독을 방문한 서독 학생이 1만 3000명에 이르자 위기를 느낀 동독 정부가 학생 교류를 중단했다가 2년 후 재개해 통일 때가지 계속됐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1988년까지 50개 이상의 동독과 서독의 도시들이 자매 관계망에 편입됐는데, 특히 서독의 지자체들은 동독 자매 도시 주민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인적, 물적 교류가 지속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경우 이산가족의 만남을 정례화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분단 이후 처음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것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두 달 후인 2000년 8월 15일에서 18일이었다. 같은 해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두 번째 상봉이 이어졌다. 지난해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제20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을 때도 남북의 흩어진 가족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보였다.

이산가족 정보 통합 시스템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남한 측 가족은 13만 838명이다. 이 중 50.4%인 6만 6922명이 사망했고, 6만 4916명이 생존해 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사망자 수가 생존자 수를 처음으로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이산가족 정보 통합 시스템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사망자 수는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 봤다. 연령대별로 보더라도 80대(43.1%)와 90대(13.5%)가 전체의 56%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의 만남을 정례화하고, 이산가족의 면회소를 설치해 언제든지 그곳에만 가면 면회할 수 있도록 남북이 합의해야 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호로만 통일을 외칠 게 아니라 진정으로 통일에 필요한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속 있는 정책들을 꾸준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독일은 분단 과정에서 국민(서독)들이 “통일, 통일” 하다보면 자칫 통일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희석되지나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통일’이라는 단어조차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악수하는 손. ©Arthimedes/Shutterstock
구호로만 통일을 외칠게 아니라 진정으로 통일에 필요한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속 있는 정책들을 꾸준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Arthimedes/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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