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조선의 인쇄문화 [신문야사 11]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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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의 인쇄문화 [신문야사 11]

미국 보빙사 민영익, 신식 교육에 눈 뜨다

조선 정부가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개화에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대두된 문제가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사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개화된 인적 자원의 수급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역관들을 양성하는 동리기무아문산하의 동문학이었다. 그러나 동문학으로는 쏟아지는 개화의 물결에 인재를 공급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1882년 미국과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주년을 맞은 1883년 7월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보빙사절로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은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교육제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보빙사(報聘使)란 “먼저 방문해 주신데 감사드리는 사절”이란 뜻이다. 보빙사의 전권대신은 민영익(24세), 부대신 홍영식(29세), 종사관 서광범(25세),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덕, 최경식이었다. 이들은 1883년 7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해 미국공사에게 부탁하여 안내인 퍼시벌 로웰을 구했다. 퍼시벌 로웰은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후에 애리조나주 프래그스테프에 로웰 천문대를 세우고 명왕성의 위치를 발견한 천문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친절한 안내로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민영익은 1885년 그의 노고에 감사하여 조선에 3개월 간 초청했는데, 로웰이 방문 기간 중 고종의 어진(御眞·사진)을 최초로 촬영하였고, 한양의 여러 곳을 카메라로 촬영하여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라는 화보집을 발간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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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일본에서 찍은 미국 보빙사 일행 사진. 앞줄 앉은 이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황인환

민영익과 감리교 거물 가우처 목사와의 조우

그들이 한 달이 넘는 항해 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위싱턴으로 갔는데 한복에 갓을 쓰고 위엄을 부리면서도 갓 속에 비치는 얼마간 당황한 듯한 모습이 같은 기차에 동승한 미국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승객 중에 미국 감리교회의 거물급 목사 존 가우처(1845~1922)가 있었는데 그가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가우처는 미국 볼티모어 시 가우처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미국이 첫 수교를 맺었고, 조선에는 개신교인이 전혀 없다는 데 흥미를 느끼고 이 나라에 선교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다.

동양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우처 박사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이상한 옷차림의 한국사절단에 호기심을 느껴 통역을 가운데 놓고 민영익과 대화를 나누었다.

가우처 박사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코리아의 역사와 사상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과는 자주 왕래가 있는 편입니다. 국제정치적 교류만이 아니라 우호 관계로 서로를 이해하길 원합니다.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교류 말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관계라는 것은 통상을 통한 어떤 것입니까? 문화 교류를 말합니까? 아니면 민간인끼리 오고가는 것을 뜻합니까?”  민영익은 가우처 목사의 의중을 떠보았다.

가우처 목사는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네, 말하자면 그런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의사가 병을 고치는 그런 일을 인간의 양심 이상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이 코리아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우처 목사는 대화를 통해 민영익의 밝은 심성에서 한국인의 순박함을 발견한다.

그는 민영익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민영익은 미국의 학교와 병원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사실 학교와 병원은 기독교 선교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만 개화를 위한 조선에는 절실히 필요한 기관이었다. 가우처 목사는 목사대로 이 불쌍하고 미개한 나라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긍휼의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후 가우처 목사는 조선의 선교자금으로 2000달러를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기부하면서 미국 감리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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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대학교의 총장이자 미 감리교의 거물 목사 존 가우처. 보빙사 민영익 전권대신과 워싱턴행 기차에서 우연히 조우하여 조선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게 된다. 조선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신식학교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인환

민영익 보빙사, 美 아더 대통령에게 조복 입고 큰절

1883년 9월 18일 오전 11시. 예복을 갖춘 아더 대통령은 피브스아베뉴 호텔의 홀에서 오른편에 프렐링휴젠 국무장관, 왼편에 데이비스 국무차관보 등을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식 궁중 조복(朝服)을 입은 민영익 정사를 선두로 입장한 사절단 일행은 민영익의 지휘로 함께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큰절을 올렸다. 아더 대통령과 배석한 미국 관리들도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서 프렐링휴젠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민영익 정사를 비롯한 조선의 사절단 일행을 소개했고, 미국 정부 관리들도 소개되었다.

소개가 끝난 후 민영익정사는 한국말로 “조선 정부를 대표해서 미국 대통령과 국민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한미 두 나라가 영원한 친선관계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고종 황제의 국서를 아더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아더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사로 “미국은 다른 국민을 지배하거나 그 영토를 차지할 의사가 없고 오직 우호관계와 교역을 맺고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때 민영익의 말은 유길준이 일본어로 통역하고 다시 일본인 통역 미야오카에 의해 영어로 통역되었으며, 아더 대통령의 말은 그 역순으로 통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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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발행되는 주간지에 실린 보빙사절단 전권대사 민영익 일행이 미국의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는 모습. 조정에서 입는 조복(朝服)차림에 큰절을 하여 화제를 낳았다. Ⓒ뉴스페이퍼 1883년 9월 29일자

민영익 일행 유럽 순방하고 귀국

보빙사절단은 뉴요크와 보스턴 지방을 시찰하고, 9월 29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위싱턴에서 미국 문물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수집했으며 미국인 고문의 초청 문제도 교섭을 벌였다. 민영익은 미국의 상업기술과 제품에 대한 수입의사를 밝히고, 저울과 탈곡기 등 농기구를 실제로 구입했으며, 최경석은 미 농무성에서 각종 종자와 재배법을 얻어왔다.

이들은 10월 13일 고별인사를 위해 워싱턴을 다시 방문했고, 미국 정부의 호의로 민영익, 서광범, 변수 등은 포크 소위의 안내로 뉴욕에서 미 해군 트랜턴호를 타고 유럽을 시찰하고 수에즈운하를 거처 귀국하기로 하고, 홍영식 부사와 나머지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하기로 했다. 이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허락으로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현지에 남기로 했다.

홍영식 부사 등의 귀국은 그해 12월이었고, 민영익 일행은 유럽과 인도 등지를 거쳐 그 이듬해인 1884년 5월 31일 인천에 도착했다.

조미수교 1주년 기념 보빙사 파견은 조선근대외교사에서 조선이 서양에 접근한 효시였다는 의미가 컸으며 고종 황제도 미국의 우의에 감복하여 미국을 신뢰하게 되었다. 최경석은 서울근교 토지를 고종에게 하사받아 미국에서 얻어온 종자를 새로운 농업기술로 재배하여 거기서 생산되는 좋은 채소를 궁중에 먼저 보급하고 나머지는 외국 공관에도 나누어 주었다.

민영익은 귀국한 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왔다. 가우처 목사의 주도로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도 절차에 따라 착실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프랑스 천주교 신부 9명과 조선인 신도 수천 명이 순교한 나라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탐색을 하는 등 접근해 오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교육기관, 원산학사 · 육영공원

조선의 최초의 교육기관은 1883년에 세워진 원산(元山)학사였다. 그 후 미국의 도움으로 1886년 최초의 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세워졌는데 이 학교에 미국인 교사로 헐버트, 빈커, 길모어 등 3명을 초빙할 수 있었다. 육영공원에서는 영어를 주로 가르쳤다. 그러나 이 두 학교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원산학사에서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꾸준히 요구하다가 관철되지 않아 스스로 폐교되었고, 육영공원은 양반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가 문제가 되어 폐교되었다. 가마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 담뱃대를 꼬나물고 수업 받는 학생, 집안에 일 있다고 수업 중 조퇴하는 학생, 장기 결석하는 학생 등 도무지 수업 받는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아 폐교되었다.

조선이 제도로서 구(舊)교육을 청산하고 현대식 교육을 실행한 것은 그 10년 후인 1894년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부터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국 교육기관이 들어선 것은 민영익 보빙사의 미국 방문 후인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과 1886년 미국 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정동에 세운 이화학당(梨花學堂)이 한국 근대식 학교의 효시였다.

배재학당은 1888년 교내에 삼문(三文· 한글, 한자, 영어)출판사를 설립하여 서적을 자체 인쇄할 수 있었다. 1896년에는 서재필의 <독립신문>도 이곳에서 인쇄했던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규모였던 것 같다. 삼문출판사는 1900년까지 무려 20만여 권의 서적을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스도 회보>와 <협성회보> 등도 인쇄했다.

 

최초로 일본 인쇄소 견학한 수신사 김기수

일본의 발달된 인쇄기술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던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이다.

“인쇄의 일도 날마다 쉴 여가가 없으며 또한 교묘하고 민속하여 비록 많은 서적이라도 하루 동안에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서적을 오는 대로 곧 간행하게 되니 서적을 구득하고자 하면 북경서포(北京書舖)에 갈 필요도 없으며 인쇄도 선명하고 종이도 질겨서 중국 것보다도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서양의 활판술이 처음 전해진 것은 1590년 포르투갈 선교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인쇄기 한 대를 가져와 일본야소교학림에 설치하고 서적 인쇄를 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250년간 인쇄술이 사장되었다가 1870년 명치유신 초기에 연(鉛·납)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하면서 근대식 인쇄술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그래서 조선이 일본으로 보낸 신사유람단의 탐방 코스에는 반드시 조지소(造紙所·제지공장)와 인쇄소, 도서관, 신문사 등도 포함되었다. 인쇄소 방문은 어윤중의 인솔로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김양한 등이 탐방했다.

1881년 박정양,신사유람단 일원, 어윤중,인쇄소, 출판 시찰
1881년 박정양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 인쇄소, 출판사 등을 직접 시찰하고 돌아왔다. Ⓒ황인환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인쇄소, 박문국

금속활자의 나라 조선 개화기 때의 인쇄문화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한성순보> 창간호의 목판 컷 등의 정밀도를 보면 그 제작기술이 탁월했음을 한 눈으로 짐작케 한다. 여기서 인쇄문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인쇄문화는 곧 신문문화의 발전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쇄사>에 따르면 조선 개화기에 근대적 인쇄술의 도입은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다. 1883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인쇄기계와 장비를 들여와 설립된 박문국(博文局)은 <한성순보>를 발행하기 위한 인쇄소였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로도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문국을 통한 서적의 대량생산과 서적의 대중화가 가능하게 되자 민간에서도 인쇄업이 하나의 사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더불어 서포(書舖·서점)도 등장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문국은 <한성순보> 발행 이외에 일반 출판 사업도 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세하게 알아보자.

1882년 2차 신사유람단 때 박영효가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으로 수동식 활판기와 활자를 구매하고, 더불어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비롯한 인쇄 기술자 3명을 조선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물론 <한성순보>를 간행하기 위해서였다.

박영효와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조언으로 조선 최초의 신문을 국한문혼용체로 창간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완료했었다. 그러다가 3월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좌천되자 창간 작업은 그들의 손을 떠나 수구파(온건개화파)에게 넘어갔다.

수구파의 창간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1883년 7월 15일(음력) 고종의 명으로 박문국이 설치되었고, 박문국 총재에는 외아문독판 민영목, 부총재는 한성판윤 김만식, 고문에는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초빙되었다. 박문국의 위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남부 저동(苧洞)집(현재 명동성당 건너편)으로 이곳에 박문국 청사와 인쇄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883년 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될 예정이었으나 활자 준비가 여의치 않았고, 수구파의 반대로 인해 한문전용신문으로 발간되었던 것이다. 당시 박문국이 갖추고 있던 인쇄 시설은 한문 활자와 문선, 식자 및 정판에 필요한 공기구와 활판 인쇄기 1대가 고작이었다고 전한다.

박문국 인쇄소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 성난 수구파 군중들이 신문도 일본 개화의 산물이라고 하여 인쇄기를 부수고 청사를 방화하여 결국 <한성순보>도 발행을 중단했다. 고종은 신문이 없어 답답해지자 민간 인쇄소에서 발행하면 어떤가라고 하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명령은 이행되지 못했다. 그 후 1885년 9월 일본으로부터 한문과 한글활자를 구입하여 중부 경행방(慶行坊) 교동(校洞)에 다시 재건하여 국한문혼용체의 <한성주보(漢城週報)>를 발간하고 1888년 7월 신문사 자체 경영난으로 <한성주보>가 폐간되면서 박문국 인쇄소도 문을 닫았다.

정부에 의한 인쇄소는 그 후 1896년 농상공부가 우표와 엽서를 인쇄하기 위해 직영 인쇄소를 설립할 때까지 중단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박문국에서 신문 이외의 출판물 인쇄를 했다는 설은 약간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서적 구입

그렇다면 박문국 개설 이전에는 서적 출판을 어떻게 했을까? 조선이 근대식 인쇄 기술에 접한 것은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였다. 조선은 대부분의 서적을 북경을 통해서 구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어서 독해가 쉬운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인쇄술 지식에 대한 언급은 드물다.

중국 봉천은 조선에 천주교 성경을 보급하는 선교본부가 있었다. 당시 천주교 신부들도 혹독하게 조선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그 탄압을 피해 만주 봉천에 선교회본부를 마련하고 한글성경을 출판하면서 보급에 나섰다. 그들은 조선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 목활자를 개발하고 이를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관계자들에게 보내 납활자(鉛活字)를 주조하여 다시 봉천으로 가져와 인쇄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조선에 몰래 들여와 신도들에게 성경을 배포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급속도로 전파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글 성경 덕분이었다. 한자문화권의 조선사회에서 한글 성경은 아녀자는 물론 일반 천민들에까지 신앙을 빠르게 전파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남녀노소, 상하귀천이 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성경은 탄압 받는 조선민중에 대한 구원이자 축복이었다,

인쇄문화가 전파된 또 하나의 루트는 일본을 통해서이다. 당시에는 일본 인쇄소에서 간행된 조선 서적이 상당량 유통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조선의 한글과 한문 활자를 개발하여 상용화하고 있었다. 조선과 이미 서적 무역을 상당량 해오고 있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1895년 일본 도쿄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하여 조선에서 유통한 것이다.

활판인쇄, 활자를 넣어두는 곳, 문선대,
활판인쇄에서 사용되는 활자를 넣어두는 곳, 문선대. Ⓒ황인환

민영 인쇄소, 광인사(廣印社)

민간인이 경영하는 인쇄소는 박문국이 설립된 1년 후인 1884년에 설립된 광인사(廣印社)가 최초이다. 광인사는 근대식 민영 인쇄소 겸 출판사였다.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버리자 고종은 광인사에서 <한성순보>를 속간하라고 하명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광인사 인쇄소는 아마 반관반민의 형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규제가 풀리자 순수 민영 인쇄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영인쇄소의 증가는 당시 애국 선각자와 유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각급 학교의 설립과 관련이 있다. 육영공원의 신식교육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 신식 학교가 설립되었고 따라서 여러 방면의 지식을 담은 교과서와 서적의 수요가 증가했다.

<황성신문>은 ‘書籍印佈爲開明之第一功業(서적인포위개명지제일공업)’이라는 논설에서 인쇄소 설립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전국에 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총명한 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하고 있으나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소학교에 이르기 까지 교과서 구비가 충분치 못하고 완전히 정비된 책도 없으니 교육이 부진할 수밖에 없다고 개탄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우리 동포들은 서적의 발간에 힘쓰고 새로운 서적을 구람하여 지식을 넓히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업에 뜻이 있는 자본가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인쇄사업을 장려한 기사가 황성신문에 ‘활판소의 관념’이라는 논설로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프랭클린대통령은 열두 살 때부터 신문사 활판 공장에 다니며 활판술을 배우고 이곳에서 많은 서적을 대하면서 문장과 사상을 단련하였는데, 그 후 뉴욕 근처에 활판소를 세워 전기의 성질을 밝혀 낸 바 있다. 독립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프랑스와의 법미동맹(法美同盟)에 수훈을 세우게 되며 그 결과 독립을 맞게 되었는데, 그의 이러한 높은 학문과 사업상의 명예가 모두 활판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쇄는 문화 발전과 밀접하다. 인쇄는 신문의 발전과 불과분의 관계이다. 인쇄문화의 발전 없이 신문과 출판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서적의 보급은 문화발전의 척도이다. 일본이 한글 활자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는 것은 조선에게 시사(示唆)하는 것이 많다. 일본 인쇄출판문화 시장이 조선까지 장악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상술을 뛰어넘어 조선 문화의 후진성과 그에 따른 문화잠식이란 측면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이 한글 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한글 문자에 대한 연구도 그만큼 진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자 하나를 만들려면 그 글자의 속성과 디자인과 가독성 등 많은 분야의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인쇄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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