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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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2016.04.15 · 이영란(전 매일경제 기자) 작성

“그..그..그건 배배배신이야”

영화 ‘넘버 3’의 이 대사는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말 그대로 배신이 일상인 정치를 빼놓더라도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배신은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이름만 대면 “아, 그 사람” 하고 끄덕거리게 되는 만화가 A씨. 몇 년 전 A씨의 만화가 대박을 치면서 그는 무지하게 바쁜 사람이 됐다. 나는 만화도 좋았지만 A씨, 더 정확히 말하면 A씨의 부인이 부러웠다. 그의 부인은 실명으로 만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만화대로라면 평범한 외모에 약간 통통한 편이었지만 A씨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건 분명했다. 만화에 이어 펴낸 수필집에서 A씨는 부인에게 구구절절한 사랑편지를 보냈다. 더욱 부러웠던 것은 A씨의 인터뷰에서였다.

“저는 40대 중반까지만 돈을 벌 겁니다. 그때까지만 열심히 하면 평생 먹고 살 만큼 모을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는 아무 욕심 없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정말로 행복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살 겁니다.

모든 주부들의 로망이 그 인터뷰에 담겨 있었다. 평생 먹고 살 돈에, 가족들만 바라보는 남편이라니… A씨는 인터뷰에 불려 다닐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최근 문득 A씨가 드디어 자신이 은퇴한다던 40대 중반이 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가족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겠지. 돈도 무지 벌었을 테고.. 여기 저기 찾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일을 그만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필집 이후에 대중들과의 교류를 끊은 그의 근황을 어렵사리 알아본 바, 필자의 상상이 배신했다. 그토록 부인을 사랑한다던 A씨는 여대생과 살림을 차렸고, 그의 재산을 나눠가진 부인은 아이들과 해외로 도피하듯 떠나버렸다.

“이런, 배, 배, 배신…”(왜 내가 차인 느낌이지?)

 

생각의 배신, 씁쓸한 일상의 순간들

최근 우연히 좋은 옛날 팝송을 하나 듣게 됐다. 가사가 말 그대로 ‘예술’이다.

“ 태양이 바다를 모두 마르게 하는 그 때까지 난 그대에게 언제나 헌신하겠어요.
   난 영원토록 당신의 사람이거든요. 제가 당신만을 위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당신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 출신의 여가수 카릴 시몬은 26살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팝송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972년, 전설적인 팝 싱어인 제임스 테일러를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된다. 이들은 곧바로 결혼으로 직행했고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노래가사에 담아 ‘Devoted to you’(당신에게 헌신할게요)라는 제목의 곡을 같이 불렀다. 바로 위의 가사가 그 노래의 일부다. 지금까지도 영원한 사랑을 굳게 믿는 커플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양이 바다를 마르게 할 때까지 헌신하겠다던 그들의 약속은 10년 동안만 유효했다. 노래를 뒤로 한 채 그들은 갈라섰다.

“이런 배,,배,,배신…”(가사를 믿었던 사람들은 뭐냐?)

 

한때는 아주 친한 후배였다. 고갈비에 소주를 기울이고, 대학교 잔디밭에서 운동가요를 불렀던 시간을 합치면 한 트럭도 넘을 것이다. 회사를 옮기면서 연락은 뜸해졌지만 서로가 잊지 않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필자가 마라톤을 한다고 하자 “선배가 뉴스에서 보는 그 마라톤을 한단 말인가요?” 하고 되물으면서 큰 관심을 가졌다. 내친 김에 100㎞를 뛰겠다고 약속했고, 완주하면 후배가 술을 사기로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100㎞ 도전을 미루게 되면서 후배가 생각났다. 얼마나 소식을 기다릴까 싶어 전화로 먼저 알렸다.

“미안해, 내가 100㎞ 뛴다는 약속 못 지켰어.”
“어, 선배가 그런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바빠서, 이만 끊어요.뚜….”

벌써 그는 필자를 잊었나 보다.  “이런 배,,배,, 배신…” (나만 기억했던 거냐?)

그러나 어쩌랴, 작은 배신을 당해도, 큰 배신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모질게 견뎌야 하는 게 우리 삶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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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삶이란 늘 우리를 배신한다.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함은 당연하지만,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게 삶임을 받아들이는것도 필요하다. ⓒ Valery Sidelnykov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