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부림친다, 고로 존재한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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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부림친다, 고로 존재한다

화려했던 ‘소영웅’ 아버지의 환갑

어느덧 만 60세가 됐다. 환갑(還甲)이다. 참으로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속내는 그 ‘불편한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싫건 좋건 간에 인생사에서는 받아들여야 하는 게 많다.

나는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기억한다. 코흘리개 10대였으니 거의 50여 년 전 일이다. 그것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한 잔상(殘像)으로 기억 저편에 숨어 있었다. 환갑날에 큰 잔치가 벌어졌다. 기와집 대청마루에서 위로 큰형님, 둘째, 셋째, 넷째, 누나 내외가 차례대로 큰절을 올렸다. 10대였던 바로 위의 형과 나는 맨 마지막 차례였다. 부엌에서는 숙수(熟手)인 어머니의 지휘 아래 며느리들과 동네 아줌마들이 갖가지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지지고 볶고 찌고 굽느라 맛난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다. 구경 온 동네사람들은 다복한 일가(一家)를 이룬 것(최소한 외형적으로는)에 대한 놀라움과 부러움을 한껏 표시했다. 보릿고개 시절 구경꾼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기며 어서 빨리 맛난 음식과 대면하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변두리 금호동 3가 산동네 피난민촌에서 호사스런 잔치가 열린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잔치 모습.
한국의 전통적인 잔치 모습. 큰 천막 밑에 둘러 앉아 풍성하게 차려진 잔치 음식을 먹으며 무용수들의 춤을 감상하고 있다. 아버지의 환갑잔치가 실제로 이렇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그날의 기억은 이렇게 떠들썩하고 풍성했다. ⓒ김동철

아버지의 생신날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오작교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는 음력 칠월칠석(七月七夕) 즈음이었다. 그 시절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여름철 장마와 폭염에 음식이 채 반나절도 못 되어 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약간 쉰 내나는 밥은 찬물로 헹구어 먹어도 별탈이 없었다. 그 무엇이라도 그저 많이 먹고 배만 부르면 ‘만사 끝!’인 고난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 제2 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다니다 일본 규슈의 한 침술의료전문학교에 유학갔다 돌아와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6정목, 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침술을 업으로 삼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인 충남 예산을 거쳐 전북 군산까지 피난을 갔다. 다시 서울에 올라온 뒤부터는 슬하의 대가족들을 뼈 빠지게 벌어 먹여 살렸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피난민과 시골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게딱지 같은 블록, 판잣집이 오밀조밀한 산꼭대기 동네였다.

기와집 지붕들. ⓒT.Dallas/Shutterstock
옛날 내가 살던 곳은 산꼭대기 동네에 있는 기와집이었다. ⓒT.Dallas/Shutterstock

단칸 셋방에 살던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 집은 기와집이었고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형들은 장가갈 때마다 아버지가 마련해준 새집을 한 채씩 받아 분가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내리사랑에 그저 먹먹할 따름이다. 두 명의 자식을 키우는 데도 힘이 들어 쩔쩔매는 나와 비교하면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소영웅’이었다.

 

홀로 소주 한 잔으로 맞은 나의 환갑

지난 2월 구정 며칠 뒤 나는 환갑을 맞았다. 환갑날에도 여전히 나 홀로 식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와 유학중인 아들은 일본에 있고, 딸은 나와 동선(動線)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친척이나 친한 친구에게 “벌써 환갑 맞았다”고 드러내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자녀들로부터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하는 카톡 문자인사를 받았으니 다행이었다. 게다가 반주로 소주까지 곁들였으니 크게 부러울 것이 없었다.

술잔과 무언가를 적는 노인의 손. ⓒRawpixel.com/Shutterstock
얼마전 나는 홀로 소주 한잔을 마시며 환갑을 맞았다. ⓒRawpixel.com/Shutterstock

어쨌든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수년 동안 반신불수가 되어 중풍을 앓던 어느 날 “애들아! 애들아!” 외치면서 자식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향년 67세로 세상을 등졌다.

오늘날 환갑잔치라는 말은 사전에만 있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100세 시대가 도래했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댄다. 허나 그 백세시대가 과연 축복(祝福)이 될지 재앙(災殃)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수명의 연장에 따른 치매나 암 같은 어두운 그림자는 호시탐탐 노인들을 노리고 있다. 독거노인과 1인 생활자의 증가로 고독사(孤獨死)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조만간 고령사회(65세 인구가 전체인구의 14% 이상)로 돌입하는 우리는 초고령사회(노인 20% 이상)의 일본을 벤치마킹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그들의 노인복지 시스템과 연금제도 등 보고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평민들의 평균수명은 32세 정도로 추정된다.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영아사망률이 높았고 영양과 위생, 의료의 열악함 및 외침(外侵) 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던 암흑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 평균 수명은 46.1세였다. 영조가 81세로 최장수를 기록했다. 그러니 평민 사이에서 만 60세의 환갑을 맞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고 장수자(長壽者)는 최대 축복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축하잔치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과학과 의학의 급격한 발달과 삶의 질의 향상으로 현재 나이에 곱하기 0.7을 해야 과거의 어느 시점과 비슷한 건강나이가 나온다는 항설(巷說)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60세×0.7=42세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과거에 비해 건강상 나이가 42세 정도라고 보는 것이다. 지하철 요금이 공짜인 ‘지공족’은 65세부터다. 그런데 그 나이에 경로당을 무단출입하다가 80, 90세 고참 선배들에게 자칫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환갑날 ‘혼밥(홀로 식사)’을 먹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다 너무나 짧은 우리네 인생에 대한 화두(話頭)에 사로잡혔다. 60대는 시속 60km, 70대는 70km, 80대는 80km로 달릴 것이라는 것과 영시(永矢) 등.

화살표시가 된 보도블럭 위를 걷는 사람. ⓒaslysun/Shutterstock
세월은 화살처럼 가고 있다. ⓒaslysun/Shutterstock

설악산 백담사 위쪽에 영시암(永矢庵)이 있는데 영시(永矢)라는 뜻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을 말한다. 집 샤워실에 걸려있는 기념 수건에 박힌 지난 연도를 헤아려 보면 정말 세월은 무상(無常)하다는 게 절감된다.

“아! 우리는 지금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등나무 줄기처럼 얽히고설킨 사유(思惟)는 마침내 한 점으로 귀결된다.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일이다. 밥을 벌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잘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행복도 찾고 돈도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보로, 에르고 숨(Volo, ergo Sum), 나는 원(願)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맹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의 명제다. 그는 선배 철학자 데카르트의 “고지트 에르고 숨(Cogit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한 단계 뛰어넘은 이 명제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표상으로 꼽힌다.

지금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독수공방을 채워줄 여자? 언덕위의 하얀 집?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 모두 다 웰컴이다. 하지만 난 낙지가 더 좋다.

낙지자(樂之者)! 공자가 일찍이 갈파한, “호지자 불여 낙지자(好之者 不如 樂之者)” 즉 그것을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는 말. 이 만고불변의 진리에 나는 죽을 때까지 충실한 노예로서 살아갈 자세가 되어 있다. 다만 노익장(老益壯)을 빙자해서 망구(望九, 81세)의 탐욕(貪慾)은 금물일 것이다.

“막내야, 그 어지러운 말 그만 좀 하고… 환갑날 밥도 못 얻어먹었다니 그게 정말 걱정이로다”

오래전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사진 속 표정이 꽤나 불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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