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상륙, 서구식 학교와 병원 개설 [신문야사12]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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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상륙, 서구식 학교와 병원 개설 [신문야사12]

가우처 목사, 매클레이 선교사 조선에 첫 파견

민영익을 만났던 미국 감리교 거물 존 가우처 목사는 동양의 은둔국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뉴욕의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자금 2000달러를 헌금하며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는 감리교의 기관지 편집장을 설득하여 조선 선교의 당위성을 지면으로 설파토록 하고 스스로는 직접 편지를 보내 즉각 조선 선교를 개시해야 된다고 압박했다. 그 결과 뉴욕 감리교 선교부는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 Mclay 1824~1907)에게 조선에서 선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토록 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조선은 천주교 박해국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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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최초로 방문하여 선교의 문을 연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조선 선교의 문을 열었다. ⓒ황인환

가우처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는 부인과 일본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1884년 6월 8일 영국 상선 테헤란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의 일행은 조선인 통역을 구한 후 난징호를 타고 6월 20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하루 낮을 머문 뒤 43시간의 항해 끝에 6월 23일 오후 1시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으며, 이튿날인 24일 아침, 일행은 4인교 가마를 타고 40km나 떨어진 서울 정동 미국공사관에 오후 6시에 도착했다. 가마꾼들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곳에서 함께 출발한 기병들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이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조선의 수도 한양에 들어온 첫 번째 공식 기록이다.

 

조선통 매클레이 신부, 김옥균 통해 고종에게 청원

매클레이는 누구일까? 그는 동양에 파견된 선교사 중 유일한 조선통 선교사였다. 매클레이는 이미 1840년경에 조선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조선의 난파선 선원을 통해서 조선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 때 알았었다고 한다. 신미양요 이듬해인 1872년에는 미국에서 머물렀는데 ‘조선원정대’의 귀한 소식을 접하고 감리교 본부에 조선 선교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가 요코하마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하던 중인 1882년에는 그의 부인이 조선사절단(신사유람단)의 일원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인연이 있었으며, 그 일에 감사를 표하려고 사절단 대표격인 김옥균이 이들 부부를 찾아와 인사를 나눴는데 김옥균과의 인연이 매클레이에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누가 그녀에게서 영어를 배웠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6월 30일 매클레이는 김옥균을 만나 서양식 학교와 병원을 무상으로 세울 수 있도록 조선 정부가 허락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서신을 건네면서 고종황제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발행 중이던 <한성순보>는 서양의 앞선 학문과 기술·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는 논설을 자주 게재하고 있었다. 서양의학에 대해서도 ‘서양은 의술이 탁월하여 군사들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운다’는 식으로 논설을 썼다.

당시는 이런 식으로 실용성 있게 논설을 써야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궁중의 일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사실 실용 면에서 따진다면 수만리 떨어진 미국이 조선이 만일 위기에 처하면 돕고, 또한 아무런 대가 없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준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호의를 왜 자진해서 베풀려고 하는가? 여기에 숨겨진 속내는 과연 무엇인가? 그건 묻지 않아도 기독교 선교였다.

7월 3일 아침 매클레이는 서한을 보낸 후 도무지 궁금하여 김옥균의 집을 직접 방문했다. 김옥균은 그를 반가이 맞으며 차를 권했다. 김옥균은 “간밤에 고종황제께서 신중히 검토하신 후 사업계획을 승인하시고 통보하라고 하교하셨다”며 희색이 만면해했다.

 

고종 황제, ‘기독교 선교 공식 승인도 않되, 전면 금지도 않겠다’

고종이 신중히 검토한 사안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독교의 포교문제였다. 이들의 사업을 승인하면 곧 포교를 승인하는것과 같다. 만일 포교를 승인하면 이전의 천주교 박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런 고민 때문에 밤늦도록 갑론을박을 했으리라.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조선은 서양식 교육과 의술을 무상으로 받아들일 아까운 기회를 한동안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조정은 기독교의 포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되, 전면 금지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 방침은 김옥균 등이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후에도 변함없이 지켜졌다.

7월 3일 오후 김옥균은 매클레이 집을 공식 방문하여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기 위해 먼 길을 왕림해준데 대하여 깊은 사의를 표하고, 고종도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적극 돕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전했다. 매클레이는 이 허락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고 기술했다. 이 기독교(천주교) 박해의 나라가 드디어 하늘로 문을 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7월 8일 매클레이는 서울을 떠나면서 자기가 머물던 집을 구매해달라고 미국 공사관에 부탁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는 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에 자초지종을 알리고 교육과 의료사업을 담당할 선교사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들이 선정되어 파견될 때까지 일본에서 조선인 기독교도인 이수정과 함께 조선 선교에 필요한 성서번역을 착수했다. 9월 8일에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교사들의 안전 보장과 학교와 병원 사업을 적극 돕겠다는 양해각서도 받았다.

 

미공사관 무급의사 앨런, 갑신정변 밤 칼 맞은 민영익을 치료

그러나 감리교의 조선 파견 선교사 선정은 지원자가 없어 조금씩 지연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9월 22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호리스 N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미국공사관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에 임명되어 입국했다. 무급의사란 종교의 자유가 없는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붙여준 직위였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앨런은 12월 4일 밤 파울 게오르크 폰 뮐렌도르프(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1901) 조선국 외교고문의 급한 호출을 받는다. 뮐렌도르프는 한국이름은 목인덕으로 독일 출신의 외교관이자 조선의 외교고문이었다. 그는 1882년 12월 26일 조선에 들어와 외교부에 임명되었고, 조독수호통상조약, 조영통상조약, 한로수호통상조약, 한이수호통상조약 등의 체결에 공헌했다. 그는 임오군란 사후 처리비용과 개화정책 추진 재정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당오전을 추진하여 김옥균 등에게 당오전은 악화로 재정파탄을 가져온다고 지적 받는 등 개화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인플레와 갑신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는 수구파에 협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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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급의사 앨런과 부상당한 민영익을 엮어준 뮐렌도르프 외교고문. ⓒ황인환

앨런은 호출을 받고 뮐렌도르프의 집에 달려갔더니 그곳엔 뜻밖에 민영익이 등과 목에 큰 상처를 입고 출혈이 심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갑신정변 현장에서 칼을 맞은 것을 뮐렌도르프가 들쳐 업고 자기 집으로 피신한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의 앨런은 시술 경험이 일천한 초급의사였지만 사력을 다하여 치료하여 민영익을 살려내는 행운을 얻었다. 민영익이 누구인가. 그는 왕후의 조카이자 고종의 총신이었다. 그는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3일 천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등 일행은 일본으로 망명해버렸다. 김옥균과의 연결고리로 묶여 추진된 매클레이의 자선사업도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반면 매클레이가 추진하여 이루어놓은 사업을 호리스 앨런이 고스란히 이어받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맥클레이가 공사관에 구매를 의뢰했던 집도 앨런의 차지가 되어버린다.

 

조선 정부, 서양식 병원 제중원 설치

민영익은 상처가 아물자 앨런에게 10만 냥의 사례금을 하사했다. 10만 냥이란 매클레이가 사려고 했던 집을 8채나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앨런을 불러들였다. 고종은 그의 의술을 치하하며 국내에서 병원을 지어 치료할 것을 부탁했다. 앨런은 “만약 병원을 지어주면 무료로 진료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맥클레이는 병원부터 진료 전부를 무료로 하겠다고 했는데, 앨런은 병원은 조선에서 지어주기를 바랐고 그대로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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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당시, 큰 자상을 입고 앨런의 도움으로 회생한 민영익. 그를 치료한 인연으로 알랜이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설립하게 되고, 개신교의 선교가 허락된다. ⓒ황인환

고종은 1885년 4월에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처벌된 홍영식의 집을 몰수하여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치하여 앨런으로 하여금 진료토록 했다. 그는 고종의 어의(御醫)로도 활약했다. 고종은 처음엔 광혜원(廣惠院)으로 명명했다가 곧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제중원은 통리교섭사무아문 소속이었으며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은 앨런 등 선교부 의사들이 맡았다. 이 후 1886년 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서 명동성당 방향 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앨런 이후 스크랜턴, 헤론, 하디, 빈턴, 에비슨 등 선교 의사들이 부임하여 진료했으며 개원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자 병원에서 진료를 할 의사들을 자체 양성하기 위해 의학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1885년 12월부터 일기 시작하여 1886년 2월 8일 외아문이 8도 감영에 관문을 내려 각 도에서 3, 4명씩, 14세에서 18세의 총명한 청년을 발탁하여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3월 26일 제중원의학당을 세웠는데 입학한 학생들은 양반집 자제는 한 명도 없었고,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妓女·기생)들 뿐이었다. 그러나 앨런은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었다”고 회상했다.

제중원의학당은 1890년경 조선 정부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은 예산 부족과 앨런의 외교관 전직에 따른 학생들의 이탈로 의학교육은 중단되었고, 제중원도 1894년 미국 북장로 교회로 이관되었다. 의학교육은 1897년부터 비로소 재개된다. 이후 1899년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이 미국의 대부호 L. H.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얻어내 숭례문 밖 복숭아골(서울역 앞 연세 재단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했다. 그러나 제중원이란 이름은 1920년대까지도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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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가 복원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 ⓒ황인환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배재학당 창설

미국 감리교선교회는 한발 늦은 1884년에야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목사를 보냈다. 그는 부인 엘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8월 3일 영어교육을 위한 작은 학당을 설립하여 초창기 학생 2명을 교육했다. 이듬해에는 20명으로 불어났다. 최초의 체계적인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이에 고종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여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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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목사. 감리교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 선교를 개척했다. ⓒ황인환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도 같은 시기에 입국하여 조선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고, 1887년 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성경번역에 주력했다. 1890년 영한사전을 편찬했고 뒤에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으며 연희대학을 설립할 준비를 했다.

1886년에는 미국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한 메리 F. 스크랜톤 부인이 황화방(정동)에 이화학당을 세웠다.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으로 민비가 ‘이화(梨花)’라는 교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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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F 스크랜톤 여사. ⓒ황인환

아펜젤러는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한편 1895년 월간잡지《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를 복간하여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암기식으로 진행되는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변경하는데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년)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 (두산백과 참조)

 

민영익·김옥균, 기독교 선교의 숨은 공신

결국 한국 기독교의 선교는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 감리교 거물목사 존 가우처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갑신정변 때 칼에 찔린 민영익의 치료가 직접적인 인연이 되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김옥균도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의 부탁으로 고종과의 밤샘 토론 끝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되, 전면 금지도 않겠다’는 절묘한 정책을 이끌어냄으로써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의 선교에 공헌도가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종은 김옥균이 반역자로 낙인찍혀 추방되었음에도 이 약속은 계속 지켜주었다. 그리고 비록 교육과 의료사업이지만 김옥균은 고종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장본인이다. 그것은 곧 기독교 선교의 허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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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을 치료한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어의로 발탁되고, 조선 최초의 병원 제중원을 설립했으며, 개신교의 조선 선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인환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비록 박문국이 폭도들에게 불타버려 <한성순보>가 종간되었고, 일본의 정한론에 불을 댕겼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기독교 선교의 계기가 되었고, 이 사건 이후 조선의 개화는 물론 봉건 조선의 붕괴도 급물살을 타게 된다. 갑신정변은 무엇이며, 왜 실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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