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종간 [신문야사 13]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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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한성순보> 종간 [신문야사 13]

청국, 조선을 속국화 하려하다

조선 개화기의 사회정치세력은 1.급진개화파 2.온건개화파 3.민씨 수구파 4.대원군 수구파 5.위정척사파 등 5대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갑신정변은 이들 세력 중 급진개화파와 민씨 수구파의 충돌로써 발발한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은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임오군란은 일단 민씨 외척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 여파로 흥선대원군이 집권을 하게 된다. 그러자 민씨 외척들은 은밀하게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윤식에게 전보를 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토록 한다. 이 때의 일화 한토막이 전한다. 김윤식이 청국 북양대신서리 장수성(張樹聲)을 만나는데 그가 물었다.

‘조선의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인재가 누구인가?’

김윤식이 홍영식, 민영익, 김홍집이라고 3인을 지목했더니 장수성이 여기에 어윤중과 당사자인 김윤식도 포함시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일화이다. 이들이 조선을 짊어질 인재로 당시에 소문났음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청나라는 조선 파병과 더불어 한림원 학사 장패륜의 동정선후육책(東征善後六策)이란 건의를 채택하게 되는 데 이것은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을 속방화(屬邦化)하려는 계책이었다. 청국은 군인 3,000명을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대로 조선에 주둔하면서 대원군을 납치 유폐시킨 후 민씨 정권을 다시 세우면서 적극적인 간섭을 통해 속국화(屬國化) 작업을 진행했다.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장수 오장경과 위안스카이(遠世凱)에게 조선의 병권을 장악토록하고, 재정고문으로 진수당(陳樹棠)을 세워 재정권을 주무르게 하며, 이홍장이 파견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로 하여금 해관과 외교권을 움켜쥐게 했다. 그리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는데 그 전문에 아래와 같이 명문화했다.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니 무릇 외교에 관한 일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

나아가 그들은 급진개화파를 포함하여 개화정책을 펴는 개화파 전체는 물론 김옥균 일당을 특별히 지목하여 철저하게 감시했다. 나이가 24세인 김옥균과 혈기 왕성한 급진 개화파들은 조선을 아예 속국 취급하는 중국의 이런 횡포와 개화당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견딜 수 없었다. 거기에다 나라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권력 유지에만 급급하여 여기에 순응하는 민씨 수구파들까지 가세했으니, 이건 마치 불꽃 앞의 화약의 형국이었다.

 

갑신정변, 거사를 위한 사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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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좌로부터). 이들이 가슴에 오른손을 넣고 사진을 찍은 것은 한낱 평민 출신으로 구라파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꿈도 가졌다고 전한다. ⓒ황인환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우선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후 위로부터의 일대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김옥균은 1880년경부터 정변을 위해 43명의 비밀 결사체인 충의계(忠義契)를 조직하여 신복모에게 관리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1884년경에는 1,000명에 달했다.

그리고 1883년 서재필과 서재창 등 14명의 사관을 일본 도야마 육군사관학교에 보내 단기 군사훈련 교육을 받도록 유학을 보냈다. 이들은 1884년 7월에 귀국하여 고종의 명으로 신식 군대를 결성했다. 서재필은 사관장을 맡았다. 박영효는 1883년 광주유수로 좌천됐지만 그곳에서 장정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군대로 양성하며 시기를 기다리기로 했고, 윤웅렬은 함경남병사로 북청지역 장정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군대 훈련을 시키고 있었으니 대략 1,000여 명의 무장 세력이 확보된 셈이었다.

1884년 봄,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베트남)문제로 충돌하여 청불(淸佛)전쟁이 발발했다. 청국은 5월 23일 한양에 주둔하던 군사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급파함으로써 한양에는 나머지 1,500명의 병력만 잔류하게 되었다. 1884년 8월,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푸젠함대를 격파하여 청국이 수세에 몰렸다. 개화파는 청국이 이제는 병력이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차 9월 중에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개화파가 본격적으로 정변 준비를 진행하던 중인 10월 30일, 서울로 돌아온 다께조에 신이치로(竹添進郞) 일본공사가 김옥균을 만난 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김옥균은 개화당의 무력 보충과 청군을 견제하려면 일본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옥균은 일본 측 공사관 수호 병력 150명과 소요자금 300만 엔 차관을 다께조에 공사에게 의뢰하여 적극 돕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거사 당일 일본군이 궁궐을 수호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배신

김옥균은 다께조에 공사와 약속했던 300만 엔의 차관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본의 실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만났다. 이노우에는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쌍벽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는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일본 측 피해보상을 위한 한성 조약을 체결했으며, 청일전쟁 때 주 조선공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이또 내각의 대장대신으로 금본위제를 단행했던 자이기도 하다. 이노우에는 300만 엔을 빌리려는 김옥균에게 고종의 친서를 가져오면 빌려주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으로서는 그만한 자금을 빌려줄 능력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거절할 핑계를 찾았다. 그것이 국왕의 친서이다. 이노우에는 설마 이 젊은이가 국왕의 친서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옥균이 고종의 친서를 가져오자 이노우에는 내심 무척 곤란해졌다. 차관 300만 엔이 워낙 거금이어서 자기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개화로 인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오전을 발행할 계획이었는데, 김옥균이 당오전 발행은 인플레의 악순환을 불러 온다고 주장하며 차라리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재정 위기를 돌파하자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외교 채널을 통해 김옥균이 가져간 고종의 친서는 위조문서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노우에는 이 소문을 핑계로 차관을 거절했다. 일설에는 만약 300만 엔을 차관해주면 조선이 개화를 신속하게 완성하여 일본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는 일본 관료들의 우려에서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

김옥균은 낙담했다. 마침 보빙사로 미국에 갔다가 귀국하던 중 일본에 머물고 있는 홍영식을 만났는데, 그는 차라리 미국에서 차관을 빌리면 어떻겠느냐고 하여 미국 공사에게 문의했는데, 미국 역시 조선도 안남(베트남)처럼 중국의 속국인데 안남이 프랑스에 넘어가듯 조선도 같은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 때문에 거절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조선에게 300만 불을 차관해주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미국 문을 두드렸으면 가능성이 더 컸을 수 있었다. 김옥균은 영어를 몰라 미국을 가지 못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차관 실패는 개화파의 입지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고종의 신임도 잃었다. 이것도 갑신정변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다.

 

갑신정변 3일천하

♦ 1884년 12월 4일: 척신 및 수구파 대신들 피살과 개혁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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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현장인 우정국.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때 개화파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사진은 복원된 우정국 청사의 모습. ⓒ황인환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고종과 왕후 민비를 납치하여(사실은 청군과 수구파가 역모를 꾸몄다고 거짓 고했다)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재동 현대건설 자리)으로 옮겨 호위했다. 수구파의 거물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등을 고종의 명으로 불러들여 처단했다. 이때 민영익도 칼에 찔려 중상을 입지만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피신했다. 정변의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12월 3일 다시 한 번 거사를 확인한 뒤 좌석 배치도를 확인한다. 그리고 앞뒤 입구 쪽에는 개화파의 군사를 매복시켜두었다. 저녁 7시, 조선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 연회가 열렸다. 민영익을 비롯해 이조연, 홍영식, 김홍집, 한규직,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독일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 그리고 미국 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 영국 총영사 애시턴, 청국총판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壽棠),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 등 각국 외교관이 참석했다.
연회가 무르익은 밤 10시 경,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영익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그는 피를 흘리며 들어와 바닥에 쓰러졌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개화파 행동대원의 칼에 맞은 것이다. 민영익은 서재창이 지휘하는 한 병사로부터 얼굴과 목이 칼에 찔렸다. 민영익이 땅에 쓰러지자 묄렌도르프가 그를 부축해서 달아났다.
연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혁명 요인들은 계획한 대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때맞춰 대궐 곳곳에서 화약이 터졌다.”

김옥균 일행은 사대당과 청국 군대가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를 하면서 고종을 규모가 작아 수비하기에 편리한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빌딩 부근)으로 피신시키고 일본공사에게 군대를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연이은 폭발음 속에서 고종은 일단 이들의 말을 따랐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日本公使來護我)”고 쓴 친서를 요구하였고, 고종은 흰 헝겊에 이를 써서 전달했다. 이 친서에 의해 일본영사관 군 병력 1개 중대와 일본경찰 병력 1개 중대가 즉각 출동하였다.

곧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이끄는 일본군 200명이 경우궁을 에워쌌다. 사전에 약속된 일이었다. 개화파는 저녁 11시경 국왕의 소명이라 하여 대신들을 급히 소집했다. 이에 따라 입시하던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을 타살하고, 이어 판돈령부사 겸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의정부 좌찬성인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등의 사대당 일파를 창덕궁 궐문 앞에서 차례로 타살 또는 총격을 가해 죽였다. 이 때 정난교 등 사관생도들은 서재필 등의 지휘 하에 도성 주변 인가와 숲에 불을 지르고, 대궐을 점령한 이후 나머지 수구파 및 척신 대신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민씨 세력을 제거한 뒤 그 동안 민씨 정권에게 소외되어 왔던 왕실 인사로 고종의 사촌 형인 이재선(李載先)을 12월 5일 자정, 궁으로 불러들여 부패관료와 척신 세력을 제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이니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며,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였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 정부의 각료 선정에 착수했으며, 미국 공사관을 비롯하여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성공 소식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개각을 발표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새로운 개각의 명단은 영의정 이재원(고종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 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 영사 겸 대리 외무독판·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이재면(고종의 사위), 이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신기선, 예조판서 김윤식, 병조판서 이재완, 형조판서 윤웅렬, 공조판서 홍순형, 호조판서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 등이다.

개각의 특징은 개화당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 성격을 띠었으며, 개화당 대표로는 좌의정인 홍영식을 세웠고, 재정 김옥균, 군사 박영효 서재필, 외교 서광범, 국왕비서실장 박영교가 맡았다.

 

♦ 1884년 12월 5일: 14개조 개혁 강령 공표

개혁정부 수립을 내외에 공포했다. 그러나 같은날 12월 5일 청국은 개화당으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잠입시켜 민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여 경우궁이 좁으니 더 큰집으로 옮겨 달라고 조르도록 하여 계동궁을 거쳐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12월 5일 오후 5시경이었다. 개혁정부는 14개조에 달하는 개혁 강령을 공표했다.

1. 청국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고, 조공의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3.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재정을 넉넉히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탐관오리 중에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환곡)을 영원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외척 세도의 기반)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보부상 특권 기구)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하거나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1영으로 합하되,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재정 일원화)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군주제)
14. 의정부와 6조 외에 필요 없는 관청을 없앤다.

 

♦ 1884년 12월 6일: 청국 공격으로 패퇴

오후 3시. 청나라 군대 1,500명이 2개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창덕궁을 수비하던 일본군은 약속과는 달리 총 한 발 쏘지 않고 미리 철수해 버리고, 개화당 수비대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 등 9명은 몸을 빼 일본으로 망명을 했고,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던 홍영식과 박영교 등 사관생도 7명은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국왕을 호위하여 끝까지 안전하게 수구파에 인계할 때까지 곁을 지키기로 하고 남았다가 고종을 넘긴 후 그 자리에서 청군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죽음에 군주를 향한 충절단심(忠節丹心), 조선 선비의 숭고한 기개가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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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대표로 선임되었던 홍영식. 개화의 스승이었던 박규수는 홍영식을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 그는 정변 실패 후 피신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고종을 수구파에게 안전하게 인계하고 그 자리에서 척살 당한다. ⓒ황인환

이것이 국가를 개조하려는 드높은 이상이 한낱 백일몽으로 끝나버리는 삼일천하(三日天下)의 순간이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개화파 일원이나 일가 친척들은 민씨 일파에 의해 철저하게 색출 당해 무참하게 도륙되었다. 오죽이나 잔인하게 도륙했는지 조선의 개화를 순수하게 돕던 일본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잔인한 세력으로부터 조선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일본이 반드시 정복해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펴게 되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그는 아까운 젊은이들을 상실한 조선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예견하고 가슴을 치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일본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방탕하게 지내다 홍콩으로 망명처를 옮긴 후 그곳에서 민씨 일족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러나 비록 망명객의 신세였지만 고종에게 서한을 보내 함께 도모했던 동료들의 사면 복권을 상소했다. 그들이 너무나 훌륭한 인재들이므로 반드시 재등용하기를 바라는 서한이었다. 갑신정변의 충신들은 1894년 7월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들어선 후 김홍집 총리의 상소로 사면, 복권된다. 이들에 대한 인물평도 이 연재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을까?

역사학자들은 김옥균 등 개화당이 정변에 성공하자마자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 청국의 불법적 궁궐 침법과 군사적 공격
2. 일본 수비대의 철병 등 일본의 배신·일본의 차관 거절
3.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민중과의 소통부재로 지지 결여
4. 정변 수행 등에 대한 준비 부족, 반면 갑신정변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있다. 
5.청국의 속방화(屬邦化) 정책을 정면에서 부인한 반침략 조선독립운동의 효시였다. 
6. 조선의 개화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7. 신분제 폐지 등 만민평등주의를 일깨웠다. 
8. 개혁 14개 강령은 이후 농민운동 등 민중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우매한 민중들이 개화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민중에 의해 박문각이 습격당하고, <한성순보>가 개화파와 양반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민중들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성순보>가 순 한문으로 제작되어 일반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백성의 개화를 위해 시작된 신문이 백성이 읽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사회상을 보여준다. 내용은 모두가 백성들의 개화를 위한 기사들인데 정작 그것을 읽어야할 독자들이 읽을 수 없었다니 아쉽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