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실패 후 박문국 피습과 의 폐간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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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실패 후 박문국 피습과 <한성순보>의 폐간

성난 군중들의 박문국 습격

<한성순보>는 1883년 박문국에서 10일마다 정기적으로 발행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하지만 창간 1년 후인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성난 군중이 박문국을 습격하여 인쇄시설을 모두 부수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정변이 3일로 끝났으니 아마 12월 7일쯤일 것 같다. <한성순보>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그런데 군중의 공격목표가 왜 하필 신문을 발행하는 박문국이었을까?

<한성순보>는 수구파의 총애를 받던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들이 주체가 되어 한문으로 창간된 신문이다. 온건개화파는 민씨 정권의 수구파와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는 엘리트 세력이었다. 그러면 개화의 대변지로 발행된 <한성순보>가 군중으로부터 공격당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개화의 의도와 목표가 민중들에게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민중 대다수의 인식은 <한성순보>가 순 한문 신문이고, 독자가 너무 양반계급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내용도 너무 서양소식이 많은데 불만이 있었다. 또 하나는 편집고문으로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기용하고 있고, 박문국도 그의 집에 설치했다는 등 너무 친일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판단했던 때문이다. 개화파의 개화정책은 우선 위로부터의 개혁을 도모하고, 차츰 저층 민중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정책을 내세웠던 점도 민중들의 시급한 욕구와 괴리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움트고 있는 저층 민중세력의 신분제도 탈피와 인간으로서의 자립 욕구는 폭발 직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성순보 마지막 호,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제41호발행,현존하는 마지막 호는 제36호
<한성순보> 마지막 호. <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제41호까지 발행되었지만 현존하는 마지막 호는 제36호이다. (1884년 10월 9일) Ⓒ황인환

 

청나라와 수구파에 비판적이던 <한성순보>

<한성순보>는 창간호부터 얼마간 청나라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첫째 신문의 발행날짜를 표기함에 있어서 당시 공식 연호로 사용되던 청나라의 연호 광서(光緖)를 1면 좌측 난외(欄外)에 표기하고, 조선 개국 연호인 ‘조선 개국(朝鮮 開國)’과 음력을 공식으로 표기하였다.

둘째 ‘지구전도’, ‘지구도해’, ‘지구론’ 등 지구 전체에 관한 내용을 창간호부터 게재하여 정부와 양반 지식인들의 뇌리에 뿌리박힌 중화(中華) 중심적 사고방식을 타파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한성순보>의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수구파와 청국의 반발이 심했다.

이런 압력에 못이겨 결국 제4호부터는 좌측에 조선개국 연호와 청국 연호 광서를 병기하고, 좌측의 난외에 서력(西曆)을 표기하는 식으로 후퇴했다.

뿐만 아니라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필화사건 기록도 세웠다. <한성순보> 제10호에 게재된 ‘화병범죄(華兵犯罪)’ 기사와 제11호에 게재된 ‘화병징판(華兵懲辦)’ 기사를 통해 청나라 군대의 횡포와 추행을 보도한 것도 청국의 항의를 받은 기사들이다. 이 기사는 청나라 군인들이 서울의 약방에서 약값 때문에 시비를 벌이다 약방 주인과 그 아들을 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이다. 후속 기사는 이들을 붙잡아서 처벌했다는 내용이었다.

<한성순보>의 편집 태도에 불만이던 청나라에게는 이 기사가 좋은 빌미가 되어 신문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기사가 게재되면 청나라 군인들이 박문국을 습격하고, 우리 정부에게도 강력하게 항의하므로 하는 수 없이 정부가 나서서 박문국의 잘못을 시인하고 이들에게 사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일본인 편집 고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결국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성순보>는 청나라는 물론 조선 수구파에게도 우호적이 아니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화병범죄(華兵犯罪),청나라 군사, 한양의 약방에서 약값 시비가 붙어 약방 주인과 아들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
화병범죄(華兵犯罪). 청나라 군사가 한양의 약방에서 약값 시비가 붙어 약방 주인과 아들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을 고발한 기사. (<한성순보> 제10호 1884년 1월 30일자) Ⓒ황인환

개화파를 친일파로 착각한 군중

학자들 간에는 청나라 군대의 박문국 습격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라 생각된다.

임근수(林根洙) 전 서울대 교수는 <한성순보>의 편집고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김옥균과 내통하여 갑신정변에 사용할 무기 등을 박문국에 숨겨두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최준(崔埈) 전 중앙대 교수와 안종묵(安鍾黙) 청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박문국이 일본과 가까운 개화파의 아성이었기 때문에 습격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주장했다.

일본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명확한 이유는 박문국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 소유의 사진관이 이 혼란 중에 습격당했던 점으로도 증명된다고 최인진(崔仁辰) 한국 사진사 연구소 소장은 주장했다. 당시에는 사진술이 일본에서 건너온 문물이라고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박으면(찍으면) 수명이 단축되고,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삶아서 사진약(현상액)으로 쓴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민중들은 외국인들을 얼마간 두려워했고,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지 않아 단순히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 없는 세상의 답답함을 고종께 토로

박문국이 불탄 것은 비단 <한성순보>의 폐간을 불러온 것만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활판 인쇄소를 잃음으로써 그만큼 문화적 손실이 컸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박문국의 소실과 <한성순보>의 종간은 얼마간 신문에 익숙해지려던 지식층에게 정보 공급을 단절시켜 뉴스의 결핍증에 시달리게 했다. 세상사에 답답증을 느낀 대신들의 불평에 고종도 또 다른 인쇄소인 광인사에서 <한성순보>를 속간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낼 정도였다. 그러나 이 하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성순보>는 결국 폐간되었다.

박문국의 소실과 더불어 <한성순보>의 폐간은 후속 신문이 나올 때까지 관민 모두에게 눈과 귀가 없는 암흑시대를 불러왔다. 이 말은 <한성순보>의 발행기간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문이라는 매체를 접한 이들에게는 벌써 신문 없는 세상의 답답함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결국 그들은 후속신문의 발행을 국왕께 호소하고 다음 신문을 발행토록 하라는 고종의 윤허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현존하는 <한성순보>는 창간호부터 제36호까지 총 36권이다. 그러나 제36호의 발행일자가 1884년 10월 9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박문국이 불탄 12월 6일까지 약 50여일의 신문 발행 공백 기간이 생긴다. 그래서 이 50일 동안 신문을 무슨 사정으로 발행을 못했는지, 아니면 제36호로 미리 종간을 했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제36호부터 박문국이 소실되었던 12월 6일까지 적어도 5호가 더 발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한성순보>는 제41호가 종간호가 될 터이다. 그러나 나머지 5개호의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성순보, 신문인가? 잡지인가?

<한성순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이했던 1983년 1월 <한성순보>가 신문이 아니라 잡지라는 주장이 나와 국내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사건의 발단은 고서동우회(古書同友會)에서 <한성순보> 100주년은 ‘근대 신문 100주년’이 아니라 ‘근대 신식 출판 100주년’으로 자리매김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신식 출판 100년 100선 도서전’을 열며 <한성순보>를 잡지로 등재하여 전시한데서 비롯됐다.

 신문인가,잡지인가, 논쟁 기사, 언론학자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
<한성순보> 신문인가·잡지인가 논쟁 기사. 언론학자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는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신문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1983년 2월 7일자) Ⓒ황인환

이러한 주장을 선도한 학자는 안춘근(安春根)으로 1983년 1월호 문학사상(文學思想)지에도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주장의 요지는 ‘<한성순보>는 신문이라기보다 10일 만에 발간되는 잡지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10일 만에 한번이라는 것과 간행물의 형태가 책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서동우회는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가 발행하는 팸플릿 크기의 책방소식 2월호 표지에도 <한성순보>의 사진을 싣고 ‘신식출판 100년의 회고’라는 제하의 좌담회를 개최하여 <한성순보>가 잡지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좌담회 참석자는 안춘근 고서동우회 회장, 하동호(河東鎬) 공주사대 교수 겸 고서동우회 부회장, 신영길(辛永吉) 경제평론가 겸 고서동우회 이사, 박영돈 고서동우회 이사, 여승구(呂承九)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 사장이었다.

많은 신문은 이 새로운 주장을 아무런 비평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임연철(林然哲) 기자가 이 주장이 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언론학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에게 전화로 의견을 구했다. 그랬더니 정진석 교수는 “<한성순보>는 신문이 틀림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진석 교수는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성격으로 규정하면 신문이다. 잡지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관보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당시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데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분명히 신문이라는 인식에서 제작되었으며 내용 면에서도 잡지 또는 관보가 아니라 신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임연철 기자는 동아일보 1983년 2월 7일자 6면에 ‘한성순보 신문인가 잡지인가’라는 타이틀로 최준 중앙대 교수와 정진석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한성순보>는 신문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7단으로 크게 보도했다.

이로써 촉발된 논쟁은 그 해 가을 중앙대 신문대학원에서 <한성순보>가 잡지라는 주장을 편 안춘근 고서동우회 회장과 신문이라고 주장하는 정진석 교수를 발표자로 한 세미나를 개최하여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사회는 최준 교수, 신문이라는 주장측의 토론자로는 청주대 박정규 교수, 잡지라는 주장측 토론자로는 이중환 서울신문 논설위원이 각각 참가하여 자기들의 견해가 옳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에도 양측은 한동안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초창기 신문이 <한성순보>와 같은 뉴스북 형태로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한성순보>는 잡지가 아니라 신문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