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천하로 끝난 개혁의 열망, 개화당의 갑신정변과 ‘경우궁’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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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천하로 끝난 개혁의 열망, 개화당의 갑신정변과 ‘경우궁’

개화당의 변란

고종 21년인 1884년 12월 4일 저녁 갑신정변(甲申政變 : 일명 갑신혁명)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이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일본군과 교전 끝에 12월 7일 오후 진압되었다. 갑신의거, 갑신전란 등으로 불린 변란은 ‘3일천하’로 끝났다. 서울 종로, 지금의 조계사 옆에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청인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당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고종과 왕비 등이 경우궁(景祐宮)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개혁정책을 발표하였다. 주요 골자는 이렇다.

*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사민 평등권 확립
* 지조법(地租法) 개혁, 조세 제도 개선 등

개화당 일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은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하고,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하며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그리고 순사(巡査)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았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우편행정관청인 우정국(郵政局). 이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당 일파가 정변을 일으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한민국 최초의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우편행정관청인 우정국(郵政局). 이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당 일파가 정변을 일으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청군과 일본군의 교전

수구당의 민씨 정권은 1884년 12월 4일 청나라 장군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12월 7일 오후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다. 개화파는 사전에 치밀하지 못한 준비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청년 개화파의 구체제에 대한 급진적 개혁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지만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지원에 의존해 실패했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고종은 1884년 12월 말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 삼았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 1월 9일 김홍집은 전권대신으로 일본 측의 특파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인 피해자 보상금 11만원과 공사관 건축비 2만원을 지불하는 부담을 짊어지고 말았다.

 

갑신정변의 원인과 결과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 뒤에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 남해, 서해로 들어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되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이른바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제물포항이 개항되었다. 그 뒤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그러자 위정척사파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한 조선 조정에는 불만이 고조되면서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드디어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피신하도록 하였다. 이때 민씨 정권 측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고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렵다며 반대했지만,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스카이의 청나라 군대 1500명이 들어와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는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는 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이 함께 찍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이 함께 찍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일천하 역사의 현장, 경우궁

서울 종로 계동 146번지에는 조선 순조(純祖)의 생모 원빈 박씨의 혼백을 모신 경우궁(景祐宮)이 있다. 고종 21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김옥균 등이 고종을 이곳으로 피신시키고 수구당을 살해한 뒤 개화당의 3일 정부를 세웠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계동 147번지 일대에는 홍문관과 일구대(日咎臺)가 있었으며 언신군(彦信君)의 사당터였다. 충정공 민영환의 동상도 서 있다. 그는 조선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장으로 1905년에 일본 제국주의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함에 우국충정을 못 이겨 2000만 민중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매일신문에 남기고 자결하니 45세 장년이었다.

-경고문(警告文)-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다 죽게 되었구나. 대개 구차히 살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도리어 살아날 길이 있는 것이로다. 동포 여러분! 어찌 이를 모르리오! 영환은 한갓 죽음으로 새 임금의 은혜를 갚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기필코 여러분을 지하에서 도울 것이로다.
바라건대, 동포 형제여! 아무쪼록 더욱 분투노력하여 뜻과 기운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나도 지하에서 기뻐하겠노라. 동포여!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그가 호신용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 큰 별이 서쪽 하늘에서 떨어지고 까치가 무리지어 와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결한 뒤 그의 피 묻은 옷과 칼을 산정 마루방에 두었는데 이듬해 5월에 문을 열어보니 네 줄기의 대나무가 그의 피 묻은 옷을 뚫고나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세상 사람이 “충정공의 혈죽(血竹)이 나타났다”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 혈죽은 박제되어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 경우궁은 순조의 친어머니를 모신 사당이다. 갑신정변 때 개화당 김옥균 등이 3일 정부를 세웠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 경우궁은 순조의 친어머니를 모신 사당이다. 갑신정변 때 개화당 김옥균 등이 3일 정부를 세웠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갈림길의 선택 그리고 편견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은 혁명가로 인정받는 반면에 그를 죽인 홍종우는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남겼다. 갈림길에서의 선택 차이 때문일까?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의 명칭에 대해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 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개혁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면 김옥균과 대비시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홍종우(洪鍾宇 ; 1850~1913)는 많은 사람들이 갑신정변의 주도 인물인 김옥균을 암살한 범인이자 독립협회와 대립각을 세웠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여겼다. 그렇다면 홍종우가 과연 그런 인물일까?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 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으로 돌렸다. 몰락한 선비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일본 도쿄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유학하고 <춘향전> <심청전> 등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심청전> 서문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 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 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에 우리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그는 귀국길에 도쿄에서 고종의 밀명으로 온 이일직과 만나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았다. 그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설파하고 상하이로 가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에게 세 발의 총탄을 퍼부어 즉사시켰다. 편견은 금물이다. 소아적 견지를 넘어 대승적 차원에서 넓게 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