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숨 쉬는 민본주의 공간, ‘사직단’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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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숨 쉬는 민본주의 공간, ‘사직단’

조선 개국 때 태조가 설립

서울 종로 사직공원의 단군성전(檀君聖殿)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뜻을 품고 우리나라를 처음 열어준 나라의 국조(國祖), 단군을 모신 사당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단군(檀君) 또는 한자가 다른 단군(壇君)으로도 표기한다.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을 세운 분으로 추앙 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 곧 단군이다. 단군성전(일명 사직단)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설립한 곳이다. 사적 제121호인 사직단은 한양에 수도를 정하면서 궁궐 및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곳이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神)인 ‘사(社)’와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신(神)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말한다. 태조 3년에 고려의 예를 따라서 토신(土神)을 제사하는 국사단을 동쪽에 놓고, 곡신(穀神)을 제사하는 국직단을 서쪽에 놓고, 신좌를 북쪽에 모시고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단군성전에는 단군의 표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삼국의 초대 왕들의 신위(神位)도 모셔져 있다. 매년 개천절(開天節)이면 이곳에서 단군왕검에게 제향을 올리는 석전대제가 거행된다. 성전의 규모는 아주 작다. 정문으로 쓰이는 입구와 조그만 관리사무실, 그리고 성전이 전부이다.

 

일제 때 훼손되었다가 복원

1911년에는 사직단 자체가 일본의 조선총독부로 넘어감에 따라 사직단을 헐어내고 1922년에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사직단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사직단 역시 일제 강점기 때에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훼손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사직단을 복구하면서 현재의 단군성전으로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사직단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7.4평으로 단층맞배지붕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사직단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입구에서 안을 쳐다볼 수 있다. 몇 개의 단상이 보이는데 사각으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문(神門)과 신단(神壇)을 설치한 모습이다.

하지만 단군성전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배달민족의 시조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성을 지닌 역사적인 곳이다. 단군성전에서 산길을 타고 조금 올라가면 황학정이라는 활터가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활이 주요 무기로써 사용되었다. 당시 한양에는 활을 쏠 수 있는 곳이 다섯 곳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활터로서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황학정이 유일하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매년 전국 규모의 활쏘기 대회가 열린다.

사직공원은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인왕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산행 출발지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총독부, 사직단,1924년사직단 주변 공원
1911년에는 사직단 자체가 일본의 조선총독부로 넘어감에 따라 사직단을 헐어내고 1922년에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사직단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Wikimedia Commons

한국 사직단의 역사

한국에서 처음 사직단이 세워진 때는 삼국시대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고국양왕 8년(391년)에 사직단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개로왕은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백제의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에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면서 “나는 마땅히 사직단 앞에서 죽을 것”이라고 명언을 남겼다.

신라는 선덕왕 4년(783년)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중국식의 종묘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신라천년사>에 전하는 만큼 그보다 앞서 사직단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고려는 성종 10년(991년)에 수도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전해지나, 이미 성종 2년(983년)에 박사 임노성이 송에서 태묘당과 사직당의 그림을 가져와 왕에게 바쳤다고 전한다.

고려를 멸망시킨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듬해인 1393년에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고, 1394년에 경복궁 서쪽에 사직단의 터를 정하고 1395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조선왕조는 사직단의 기본 형식이나 제례 방식을 고려 때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였다. 사직단에서는 봄과 가을에 큰 제사인 대향사(大享祀)를 지냈고,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 가뭄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거행했다.

 

하늘 아래 땅은 임금의 토지 

고대 중국의 경서인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이르기를 ‘왕조는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라’고 했다. 사직단 위에는 오색토(五色土)를 각 방위 주변에 뿌렸는데, 오방사상에 따라 가운데는 황색,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을 뿌리도록 했다. 이러한 이유는 음양오행 사상에 연유한 것이다. 오색은 만물 곧 천하의 모든 토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 아래 있는 토지는 하나같이 왕의 땅 아닌 곳이 없다는 뜻의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 莫非王土)’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전한다.

중국 원나라 때에는 대도(大都)의 태묘를 당시의 제화문(齊化門) 안에 세웠고, 사직단은 평칙문(平則門) 안에 세운 것으로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사직단은 명-청 시대에 세운 것이다. 오늘날 관광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는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 남쪽, 톈안먼(天安門) 서쪽의 중산공원(中山公園)에 세워져 있다. 중산공원이라는 이름은 1914년에 신해혁명을 이끌어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국부(國父)로 칭송받는 쑨원(孫文)의 운구를 공원 안에 안치하던 1928년에 쑨원의 호인 중산(中山)을 붙인 것이다. 중국 황제는 모두 이곳 중산공원에서 천명(天命)을 받았다 하여, 오늘날에도 천지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여기는 수령(樹齢) 천년생 잣나무 거목이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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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21호인 사직단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에 수도를 정하면서 궁궐 및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곳이다. ⒸWikimedia Commons

비운의 역사가 서린 곳

사직공원 위에 있는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은 대한민국 어린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방 후 사직공원 내에 전쟁고아를 위한 임시 소년수용소가 있었다. 그때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시립아동보건병원이 1956년에 들어섰고, 1978년에는 시설을 확대하면서 병원이 강남으로 이사를 가자, 다음 해에 한국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이 같은 건물에 들어온 것이다.

본래 이 터는 비운의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의 생가로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古宅)이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지만,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은 왕후였다. 그런데 친일파 윤덕영의 집이며 심하게 훼손되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문화재 지정을 해제해버렸다.

그뿐인가? 100년을 바라보던 한옥도 본래 일제에 항거한 저항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상(李箱) ; 본명 김해경)이 살던 집이 아니라며 헐어내려다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기존 한옥을 ‘이상의 공간’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속세와 성계 구분하는 곳

사직단 정문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담장과 붉은 색 홍살문들이 있다.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는 붉은 색 북신문(北神門) 쪽으로 걸어가면, 신문 안쪽에 푸른 잔디밭이 펼쳐지고, 돌길 가운데 제일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 오른쪽의 조금 낮은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의 더 낮은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였다. 

또 속세와 성계(聖界)를 구분하는 토담 울타리 유원(壝垣)도 있다. 유원 가운데 북유문을 들어서면 울퉁불퉁한 박석(薄石)이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면 신의 영역에 들어온 셈이다. 어떤 건물도 없는 그곳에는 두 개의 네모반듯한 돌 제단만 남아있는데, 이 네모난 형태는 땅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사직단은 본래부터 백성을 섬기는 ‘민본주의’의 공간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었다. 왕과 왕후의 조상을 섬기는 종묘나, 천자만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는 환구단(圜丘壇)과 달라서, 사직단은 천자와 제후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도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