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부안과 삼변,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길지(吉地)로 등장한 변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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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부안과 삼변,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길지(吉地)로 등장한 변산

53개의 경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바다를 끼고 있는 국립공원 변산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으레 붙어 다니는 8경이니 9곡이니 하는 것을 모두 합하면 무려 53개나 된다. 변산 8경이 있는가 하면 내변산 12경, 외변산 12경, 해변산 12경에다 봉래 9곡이 있다. 그밖에 노래로도 변산가(邊山歌), 변산 8경가가 있다.

변산반도는 남서부의 산악지대를 말하는 내변산과 서해 쪽의 해안반도를 일컫는 외변산으로 나뉜다. 내변산은 외변산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명소가 많다.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509m)을 비롯해 쌍선봉(459.1m), 옥녀봉(433m), 관음봉(424.5m), 비룡상천봉(440.4m), 쇠뿔바위봉(465m), 우금산(331.5m) 등 산세가 웅장한 기암봉이 여럿 솟아 있고, 직소폭포, 분옥담, 선녀당, 가마소, 와룡소, 내소사, 개암사와 울금바위 등의 명소가 있어 요즘 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격포리와 도청리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천연기념식물 후박나무(왼편 사진)와 호랑가시나무. Ⓒ최병요
격포리와 도청리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천연기념식물 후박나무(왼편 사진)와 호랑가시나무. Ⓒ최병요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 

옛 기록을 보면 변산은 아주 오래 전부터 길지(吉地)로 여겨왔다. 내변산의 주류성(周留城 혹은 위금암산성)은 삼한시대 마한의 궁성 터였던 것을 백제 무왕이 묘련 왕사에게 명해 절(개암사)로 고쳤던 곳으로 지금도 산성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660년(경신년)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의 황산벌 전투에서 패해, 멸망한 후 귀실복신, 사타상여, 흑치상지, 지수신, 승려도침 등이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면서 저항 근거지로 삼은 곳이 바로 주류성(위금암산성·부안군 상서면 개암로)이다. 백제부흥군은 왜에 망명해 있던 풍 왕자를 이곳에 데려와 3만의 군세로 나당 연합군에 맞섰으나 663년 8월 백산전투에서 완패함으로써 678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백제부흥군 3만여 명이 진을 쳤던 주류성 터. 개암사 뒤편으로 울금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최병요
백제부흥군 3만여 명이 진을 쳤던 주류성 터. 개암사 뒤편으로 울금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최병요

백제의 한이 서린 이곳 변산은 1300년 쯤 지나 다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최후 결전지로 등장한다.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한국전쟁)은 3년여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지만 남로당 빨치산 잔당의 저항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우리 국군과 경찰은 잔당토벌에 많은 애를 썼다. 2,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남로군 잔당은 지리산 일대를 거점으로 저항하면서 야간에 민가를 급습, 가축과 생필품을 약탈했다.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기 전인 휴전 직후에는 저들의 기습출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낮에 경찰이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밤이면 빨치산 잔당의 노략질로 양민들의 고생이 심했다.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된 것은 1953년 9월 18일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빨치산 잔당은 세 갈래로 나뉘어 흩어졌다. 제1대 200여 명은 전남 총사령관인 김선우를 따라 광양 백운산으로 숨어들었다가 54년 2월 일망타진되었고 제2대 100여 명은 외팔이 장윤형의 인솔아래 변산으로 잠입했다. 나머지 제3대 1,000여명은 그대로 지리산에 남아 버티다가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민이 54년 2월 토벌대에게 사살되자 지리산 가마골에 은신하다 55년 3월 모두 사살되었다.

우리 전사의 기록에는 55년 3월 가마골의 일망타진으로 토벌작전이 마무리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아직 변산에는 장윤형이 이끄는 제3대 50여명이 버티고 있었다. (참조: 위의 내용은 전사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했으나 이하의 기록은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직접 목도한 내용이다.)

 

빨치산 잔당의 저항이 마침표를 찍은 곳

1956년 5월이라고 분명하게 기억한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었고 그날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작고한 날이어서 5월이라는 기억에는 틀림이 없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의 일이다. 점심 때가 지나 새참 때쯤 경찰 50여 명이 무장한 채 우리 집 앞을 지나 뱁재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뱁재를 넘어가면 입암리이고 그곳에서 계곡을 따라 곧장 더 들어가면 버드재를 지나 세봉과 용각 가마소가 있는 깊은 골이다.

그러고 나서 또 얼마 뒤 동무들이 구경거리라며 학교운동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필자도 뒤따랐다. 운동장 한편에 거적으로 덮어놓은 20여구의 시체가 줄지어 있었다.(잔당 50여 명 중 일부는 그간의 소탕작전으로 사살되고 나머지는 귀순하거나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어른들이 다가서지 못하게 막아 접근은 어려웠으나 가마소에서 소탕한 빨치산 잔당인데 그 가운데는 대장인 장윤형도 있다고 했다.

 

한과 원을 다 품어 안고도 내색하지 않는 곳

장윤형은 팔 하나가 없는 외팔이(장애인의 의미와는 다름)로 더 유명하다고 했다. 그는 이곳 진서면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 머슴살이를 하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인민군을 따라나섰다.제법 똑똑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총사령관 이현상의 눈에 들어 100여 명을 거느리는 지구대장이 되어 보급투쟁을 열심히 벌이던 중 왼팔에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상처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자 마취도 없이 톱으로 팔뚝을 잘라냈다고 한다. 생 팔뚝을 잘라낼 만큼 충성을 바치고자 했던 김일성 도당은 김일성이 그들의 월북을 막고 개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홀로 남은 그의 어머니가 달려와 거적때기를 들추어보며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특이한 것은 산속에 숨어 3년을 저항하면서도 양민은 한 사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장인 장윤형이야 태생마을이란 연고 때문이었겠지만 부하 50여 명도 지휘자의 뜻을 어기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름대로의 리더십이 상당했던 것 같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6년 5월이 돼서야 총성이 멎었고 변산은 6.25 동족상잔의 마지막을 장식한 역사적인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아픔을 겪은 변산이 여전히 길지로 여겨지는 것은 한과 원을 다 품어 안고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변산의 매력은 바로 그런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서해에서 주류성으로 이어지는 동진강의 나루터. 왜에 있던 백제 왕자 풍의 귀국로였다. Ⓒ최병요
서해에서 주류성으로 이어지는 동진강의 나루터. 왜에 있던 백제 왕자 풍의 귀국로였다. Ⓒ최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