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거나 혹은 현명하거나? 여성을 멀리한 ‘제안대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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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거나 혹은 현명하거나? 여성을 멀리한 ‘제안대군’

예종 승하 후 왕위 승계에서 밀려나

제안대군 이현(齊安大君 李琄 ; 1466~1525년)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왕비인 장순왕후 한씨의 장남이다. 한씨는 바로 영의정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는 단종애사 때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로 등극하게 한 1등 공신 재사로 <세조실록>을 편찬하고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연산군이 등극한 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 폐사에 관련하였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이다.

제안대군은 아버지 예종이 임종할 당시, 왕위 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겨우 4살이라,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큰손자 의경세자 자산대군 이혈(李娎)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바람에 왕위 승계에서 밀려났다. 세조의 장남으로 추존왕이 된 덕종의 큰아들이 바로 이혈이다. 예종은 조선 역대 왕 가운데 불우한 임금이었다. 세조의 둘째아들로 16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27살 때에 아버지 세조가 위독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관제를 개혁하고 세조가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였으나 남이, 강순 등의 옥사, 민수의 사옥이 연속 터지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혈은 제10대 성종으로 즉위한 뒤 이현을 제안군(齊安君)으로 봉하고 이듬해 성종 1년(1470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으로 삼았다. 이현이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 장손을 대접해야 한다는 종친들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그 뒤 제안대군은 증조부인 세종의 5남인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기에 제사를 받들어 봉행하는 사람으로 제안대군을 지명하여 양손자(養孫子)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한명회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견해로 풀이된다. 제안대군은 첫 부인을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맞았으나 합방하지 않다가 1479년에 이혼당하고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재혼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는 바로 그의 집 여종이었다. 장녹수가 대군의 노비가 된 이유는 대군 저택의 가노(家奴)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제안대군이 性에 눈뜨게 하는 여자는 포상하라

세상에 성인이 된 사람으로서 전설 속의 도인처럼 여자를 멀리한 남자, 여자를 싫어한 사내가 있었다면 누가 믿을까? 정상적인 성인 남녀 간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의 이성지합(異性之合)이라 서로 사랑하고, 또 성씨가 다른 두 남녀가 결합하는 이성지합(二姓之合)이라 필연적으로 결혼하여 한 몸이 되기 마련이다. 제13대 명종 때에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에 제안대군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제안대군 이현은 예종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라는 말과 같다. 여자의 몸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하지 않았다. 예종이 승하한 뒤 장자가 너무 어려서 대신 보위에 오른 성종은 제안대군이 성년이 되었으나 여자를 멀리하 여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상궁에게 어명을 내렸다. ‘제안대군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여자는 제안대군의 첩이 되게 하고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이 어명이 나오자 궁녀들이 쑥덕거렸다. 제안대군의 사랑을 받아 원자를 낳는다면 팔자를 고치는 일이라 젊은 궁녀들의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 듯 나설 수도 없는 일이라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 궁녀는 제안대군의 숙소에서 기다리다가 밤중에 대군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궁녀는 잠든 제안대군을 끌어안았다. 제안대군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더럽다! 목욕물을 냉큼 준비하라!’고 부르짖었다. 그 뒤로 궁녀의 여색이 피부에 닿았다며 그 오염을 씻어낸다고 한 달 가까이 날마다 목욕을 하느라 야단을 떨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제안대군이 산책할 때는 5~6명의 미녀 궁녀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대군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산책길에 동행했던 몇몇 궁녀들이 수진궁에 접근하여 제안대군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제안대군의 몸에 닿기만 하면 기겁을 하는 바람에 모두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대궐 안에서는 이상한 말이 나돌았다.
“제안대군의 여색 공포증은 병이 아니며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라, 무척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다. 만약 종실의 맏아들로 장차 보위에 오를 왕세자라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여자들이 따라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늘 스스로 근신하면서 몸을 감춘 것이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반대의 말이 떠돌아 다녔다.
“청춘 남녀 사이의 사랑과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거늘, 평생토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로 극심한 여색 공포증에 걸린 것이다. 사내가 여자를 싫어하고 멀리함은 실지로 어리석거나 모자라는 바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는 조선 중기 명종 때 어숙권이 지은 수필집이다. 조선 전기의 사실(史實)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제안대군의 일화도 실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패관잡기>는 조선 중기 명종 때 어숙권이 지은 수필집이다. 조선 전기의 사실(史實)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제안대군의 일화도 실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안대군에 대한 평판제

제안대군은 성품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여색을 본능적으로 회피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날마다 풍류잡기를 즐기고 사람들에게 음식 대접을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어떤 일에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으로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안대군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어우야담>에는 ‘자식을 두면 누를 초래할까 두려워 여자를 멀리하였고 더구나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흥청(假興淸)을 두었는데, 이는 흥청(興淸)의 전 단계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정식으로 관기(官妓)를 선발하기 전에 예비 기생을 모아서 선발하는 곳이 가흥청이었다. 이 가흥청이 바로 평원대군의 사저인 수진궁이며, 제안대군이 양손자로 들어간 저택에 달린 부속 건물에 두었다.

왕실이 필요에 따라 종친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진궁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삼봉로 53번지로, 다른 종친의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며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공포증 기색(忌色)이 어찌나 유명했던지 수진궁 가흥청의 예비 기녀들은 대군을 가리켜 ‘공처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이 아뢰기를, “제안대군이 와서 말하기를 ‘종이 헌부(憲府)에서 법을 어겼다하여 붙잡아 가두었으니 놓아주라’ 합니다. 조정에서도 제안대군 등이 사사로운 일로 요청하는 일은 들어주지 말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인데 제안대군이 아직도 빈청(賓廳)에 있고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 전교하기를, “제안대군에게 민망한 일이 있더라도 법에 따라 상언(上言)을 올려야 할 것이고,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와서 아뢰어서는 안 된다. 대군이나 왕자군(王子君)이 사사로운 일을 아뢸 수 없다는 것은 <후속록(後續錄)>에 이미 그 법이 있으니, 이 뜻으로 말하도록 하라. 또 제안대군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조정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지금 이처럼 와서 아뢰는 것은 그 하인에게 청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며, 특별한 일도 아닌데 성문을 제때에 닫지 않게 하는 것도 부당하니, 형조(刑曹)를 시켜 제안대군 집의 장무 서제(掌務書題)와 사지노자(事知奴子) 등을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효(靈孝)라는 시호 내려

제안대군이 죽고 세월이 흐른 뒤에 수진방 저택은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 또는 왕자,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나 옹주들의 혼백을 모아 봉안하고 몽달귀신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합동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되었다. 제안대군에게 영효(靈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지런하지 않고도 이름을 남긴 것이 영(靈)이고, 어버이를 사랑함이 효(孝)이다. 제안대군은 언행이 엉뚱하여 자주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예종의 왕비로 홀어머니가 된 장순왕후에게는 효성이 매우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안대군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현재 성남시 분당)에 있었으나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에 이장된 제안대군 묘. 평안대군 묘도 같이 이장되어 있다. Ⓒ풍수지리학회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에 이장된 제안대군 묘. 평안대군 묘도 같이 이장되어 있다. Ⓒ풍수지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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