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과 백성의 유일한 만남의 장, 조선왕궁 ‘창경궁’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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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과 백성의 유일한 만남의 장, 조선왕궁 ‘창경궁’

역사의 비극과 수난을 겪은 창경궁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성종 때에 개축한 궁궐로, 사적 제123호이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대궐이라 하여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다.

창경궁은 숙종(肅宗)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英祖)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조선의 왕가(王家)가 이씨 문중이라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을 만들어 왕궁의 명예를 철저하게 폄하하고 훼손시키면서, 왕궁의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창경궁 전경. 조선 제4대 세종 때 상왕인 태종(太宗)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을 제9대 성종 때에 개축한 궁궐로, 사적 제123호이다. Ⓒ문화재청
창경궁 전경. 조선 제4대 세종 때 상왕인 태종(太宗)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을 제9대 성종 때에 개축한 궁궐로, 사적 제123호다. Ⓒ문화재청

세종이 수강궁으로 건립하고 성종이 확장해

창경궁은 조선왕조 시대의 최대 성군으로 추앙받는 제4대 세종(世宗)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太宗)을 모시기 위해 1418년에 지은 수강궁(壽康宮)이다. 그 뒤 제9대 성종(成宗) 14년인 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世祖)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睿宗)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한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을 비롯하여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창경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으니 곧 1만 4272.5m에 이른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제15 대 광해군 7년인 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法宮)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왕궁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빛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창덕궁과 맞닿아 있는 관계로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았다.

창경궁은 크고 작은 화재를 자주 만나면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는 불운을 겪었다. 인조 때와 순조 때에는 아주 큰 화재가 일어났다. 또한 예기하지 못한 화재뿐만 아니라 뜻밖의 사건도 자주 발생하였다.

 

일제가 마음대로 훼손하고 유원지로 조성해

창경궁은 고종황제가 물러나고 제27대 순종이 즉위하고 난 뒤부터 일제의 간섭으로 급속한 변형이 생기다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결정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구실 아래 자기들 마음대로 창경궁 내부 궁문과 담장, 여러 전각들을 훼손하고 왕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짓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바꾸어 놓았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하고, 연못가에 정자를 세웠으며,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식물관과 배양당을 지었고,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의 박물관을 만들면서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꾸몄다.

1911년에는 자경전 자리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또 짓고, 다음해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끊어 막아 버리고 도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를 완전 차단하는 등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 벚꽃 숲을 만들고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밤 벚꽃놀이가 처음 열린 때가 1924년 봄이다.

광복 후 1970년대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봄철이면 창경원 벚꽃을 보기위해 상춘 관광객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봄가을로 소풍을 가는 곳이 되었으며, 시골 어린이와 사람들이 서울 구경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골 관광지가 되기도 하였다.

 

창경궁 복원 작업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인기를 끌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일반의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다.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과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되살려 놓은 뒤 1986년 8월 23일 일반에게 다시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도 헐어버렸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쪽을 향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며, 동향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지형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 함인정·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집복헌· 영춘헌· 관덕정· 월근문· 선인문· 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 등이 있다.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 내 팔각 7층석탑(보물 제1119호)도 있다. 현재 창덕궁 경내에 있는 낙선재(樂善齋) 지역은 원래 창경궁 안에 있었다.

국보 제266호인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문화재청
국보 제226호인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문화재청

왕족과 백성의 유일한 만남 장소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은 매우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이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1484년에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영조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앞에서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왕족과 백성들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이름을 남겼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좋은 터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하였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玉川)이라 하였고, 옥천에 놓인 다리를 ‘옥천교’라 불렀다.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인데, 왕이 태학생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남아 있다. 특히 창경궁 식물원은 일본인 후쿠바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을 담당한 곳으로 당시 170여 평(570여㎡), 동양 최대 규모의 돔 모양의 온실 목조 식물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보물 제851호인 창경궁 관천대는 숙종 14년 1688년에 세운 천문 관측대인데, 그 위에 별을 관측하는 기구인 소간의(小簡儀)가 놓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또한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편하게 다니도록 설치한 월근문도 있었다. 창경궁과 국립서울과학관 사이에는 ‘과학의 문’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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