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수가 흐르는 도심의 하천, ‘청계천’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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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수가 흐르는 도심의 하천, ‘청계천’

청계천 본래 이름은 개천(開川)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앙부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청계천(淸溪川)은 본래 이름이 개천(開川)이다. ‘개천’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 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다. 길이 10.92km, 수역 면적 50.96km²,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백운동 계곡’이고,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과 합치면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내부 도심지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려 한양대학교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측정한 본류의 길이는 10.92km, 수역 면적은 50.96 km²이나,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만㎥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이룬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km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공원으로 쓰고 있다. 상류인 백운동천에서부터 중·하류에 이르는 하천은 조선왕조 내내 치수 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개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복원된 청계천 야경 모습.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삼으면서 조선왕조 시대 내내 바닥 흙을 거둬내는 준설 등 치수사업의 대상이었다. Ⓒdoopedia
복원된 청계천 야경 모습.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삼으면서 조선왕조 시대 내내 바닥 흙을 거둬내는 준설 등 치수사업의 대상이었다. ⒸChokchai Suksatavonraphan

조선왕조의 최대 치수사업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삼으면서 조선왕조 시대 내내 바닥 흙을 거둬내는 준설 등 치수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 상태의 하천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쪽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1412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 양쪽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도랑을 파서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하는 한편,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水標)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 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했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음으로써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직선으로 만들었다.

 

청계천은 1958년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복개천이 되는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콘크리트로 덮여 내부에서 썩고 있으면 도시에서 발생하는 먼지를 제거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과 도시미관 등 많은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명당이란 어떤 곳일까? 산이 포근하게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좋은 물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으로 그 터의 크기가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로 작으면 산소자리이고 조금 크면 집터, 더 크면 마을, 더 크면 도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청계고가도로 시대

청계천은 1958년부터 1977년까지 복개되었고, 이때 청계고가도로가 설치된 것이다. 이 도로는 청계천 일대를 급속하게 변화시켰다. 6.25전쟁 이후 청계천 주변에 들어섰던 판자촌이 철거되고 청계천 1~2가 구간에는 기계공구상, 3~4가 구간에는 자동차 부속품과 전기용품, 5~6~7가 구간에는 5~6층의 서민 아파트가 건설되고 의류, 신발, 헌책방, 전자대리점과 벼룩시장 및 사무실들이 들어섰다.

1990년대에 들어와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함께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시대적 여론이 점점 높아질 때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도로의 철거와 함께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까지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되고, 2005년 9월 30일 완공되었다. 복원 총비용은 3,870억원이 들어갔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하고 소독 처리한 맑은 물이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수와 폐수이다. 그러나 청계천 발원지로부터 광화문 사거리 청계광장에 이르는 상류는 여전히 복개된 채로 있어 청계천의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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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야경. 도심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는 시민들의 공간이 된 청계천. Chokchai Suksatavonraphan

 

청계천의 벽면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장식하였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는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이다.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는 옛날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를 재현한 것이고,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을 수렴하여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타일 벽 ‘소망의 벽’을 설치하였고,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 탑 작품이 우뚝 섰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광교 사거리 지하를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고 사적 제461호로 지정했으며, 영원히 기념하도록 표지석을 세웠다.

 

청계천 복원에 대한 평가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에 맞춰 여러 기관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다. 서울학연구소가 시민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 도심에서 시행된 주요 20개 사업 가운데 ‘청계천 복원’이 만족도와 기여도 평가에서 5점 만점에 4.02점을 받아 1위를 차지하였다. 청계천 복원의 최대 성과로 생태환경의 회복을 꼽았다. 복원 사업이 ‘잘 진행됐다’는 긍정적 평가이다.

복원된 청계천은 지금 시민들의 도심 속 휴식공간이 되었고 여가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청계천에 서식하는 생물 종류도 복원 전 98종에서 6.4배나 많은 626종으로 증가하였는데, 식물 308종, 어류 25종, 조류 36종으로 증가한 것이다. 특산종인 참갈겨니· 참종개· 얼룩동사리 등과 깝작도요· 알락오리· 도롱뇽 등도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복원된 청계천을 ‘인공호수’라며 거칠게 비판한 학자도 있다. 기존에 흐르는 물의 양이 적어 취수장에서 전기를 이용해 한강물과 지하수를 끌어다 청계광장에서 흘려보내는데, 이때 물을 끌어올리는 데 쓰이는 전기요금이 한해 평균 8억원에 이른다는 비판이다. 녹조 또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제거 비용도 상당하며, 청소비, 경비용역비, 토목 및 조경시설 유지관리비 등도 엄청나게 들어간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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