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이후, ‘한성주보’ 창간까지 조선의 변화 [신문야사15]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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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이후, ‘한성주보’ 창간까지 조선의 변화 [신문야사15]

한성조약과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활약

갑신정변(1884.12.4.)으로 박문국이 불에 타버려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박문국을 재건하고 <한성순보>의 속간 성격인 <한성주보(漢城週報)>를 복간(창간)하게 되는 1886년 1월 25일까지는 13개월의 신문 공백 기간이 있었다. 개화의 발걸음이 숨 바쁘게 돌아가는 세계사적 조류에 조선에서도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사건들이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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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된 부산항. 항만 주변에 일본 상인과 거류민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 사회에서 조선 최초의 일본인 신문인 <조선신보>가 <한성순보>보다 일찍 발행되었다. ⓒ황인환

맨 먼저 1885년 1월 9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으로 피해를 본 정부와 한성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조약은 갑신정변 중 배일감정으로 성난 민중에 의해 일본공사관이 불타버렸고 일본 공사관 서기관과 거류민 상당수가 사상(死傷)을 당한데 대한 배상을 일본에게 약속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일본의 대표는 공교롭게도 김옥균과의 300만 엔 차관 약속을 식언한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조선 측 대표는 의정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었다.

조선은 일본 측에 갑신정변 개입을 추궁하고 김옥균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가 오히려 일본이 조선 정부에게 일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희생자와 각종 피해에 대한 보상금 10만 원을 지불하고, 한성에 일본 공사관을 새로 건축하는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구원자로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성순보>의 편집고문이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였다. 그는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피신하여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의 시사신보(時事申報) 기자로 있다가 한성조약의 수행특파원으로 한성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한성조약 체결에서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에 유리하도록 협상을 이끌어주었다. 그는 이 공적으로 김홍집은 물론 고종과도 매우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나중에 <한성주보> 창간에도 지대한 공로를 세우게 된다.

 

서양식 의료기관 제중원 설립

1885년 2월 29일(음)에는 조선 최초의 국립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廣惠院)이 설립되었다. 갑신정변에서 칼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치료해준 미국 의사 알렌에게 보은하는 의미에서 고종이 세워준 병원이었다. 나중에 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되었고, 오늘날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이것은 병원 그 자체보다는 미국 기독교의 본격적인 선교의 문을 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중국 지배권 약회시킨 텐진조약

1885년 3월에는 갑신정변의 여파로 중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조선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한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다. 당시 청국은 원세개의 지휘로 3,000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갑신정변 후 일본도 이노우에 가오루의 지휘로 2개 대대의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켜 충돌이 우려되었다. 양국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체결한 이 조약의 내용은 ①청·일 양국은 4개월 이내 조선에서 철병할 것 ⓶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토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당사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 초빙토록 할 것 ⓷앞으로 조선에서 어떤 변란이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는 먼저 문서로써 연락하고 사태가 가라앉으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 골자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가 관철된 조약이었다.

 

거문도 사건과 러시아의 야욕

1885년 5월 15일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시에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조선에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조선 조정과 가까워지려고 하자 영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시에 점령한 사건이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는데, 러시아가 조선 함경남도 영흥만을 후보지로 정하고 점령하려 하자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은 이미 1882년 한‧영수호조약 체결 때부터 거문도 조차(租借)를 제의해왔었다. 그와 더불어 조선 조정은 갑신정변 후 급속히 제정 러시아에 접근하려고 한‧러 밀약을 체결할 움직임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약 2년간 거문도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는 등 전쟁준비를 했는데 러시아가 지례 겁을 먹고 중국을 중재자로 넣어 화해를 한 뒤 영국군과 러시아군이 동시에 철수함으로써 사건은 종지부를 찍었다. 영국이 2년 동안 주둔하는 동안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하면 반드시 대가를 주고, 주민들의 거주지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등의 신사적 배려로 거문도 주민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특히 여성들의 빨래터를 지날 때도 반드시 외면을 할 정도로 예의를 지켜주자 주민들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항의하러온 조정 관리들을 배척하고 항의할 정도로 영국 편을 들었다고 한다.

영국과 러시아가 서로 견제에 걸려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못하게 된 것은 결국 일본의 한반도 침탈 야욕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갑신정변 이후 서구 열강들은 개화에 눈 뜬 조선으로부터 각종 이권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조선은 여전히 중국의 종주국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에 전신‧우편 제도가 도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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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보> 창간호(1886년 1월 25일) ⓒ황인환

<한성순보>가 폐간되고 <한성주보(漢城週報)>가 태동할 때까지 조선에는 서구의 새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많은 신문물이 조선의 마른 땅을 적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 신문의 발달사에 크게 기여한 사건들을 열거해 보자.

첫 번째는 전기 통신의 개설이다. 일본은 1876년 1월 병자수호조약(제물포조약) 체결 이후 일본 상인들이 많이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에 우편국을 개설하고 우편업무를 시작했다. 일본은 1883년 1월 덴마크 대북부전신회사(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 Ltd.)의 청탁으로 조선과 ‘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했다. 이듬해인 1884년 2월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와 간에 해저전선을 가설하고 에 전신국을 개설하면서 최초로 조선-일본 간 전신업무를 처음으로 개시했다. 전선을 가설한 회사는 덴마크 대북부전신회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가설한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역사(電氣通信歷史)에는 넣지 않고 있다.

 

수신사 김기수 전기통신 최초 도입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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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문견 조건(日本國聞見條件) 1881년 일본 사찰단으로 파견된 12명의 조선 사신 중 박정양, 조준영, 강문형, 이헌영, 민종묵, 심상학, 엄세영 등이 기록한 견문록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을 시찰한 후 고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지리, 정치 제도, 경제 제도, 군사 제도, 사회 제도, 개항장 사정, 산업시설,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하고 있다. ⓒ황인환

그러면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사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 통신의 도입을 주장한 사람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후 1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였다. 김기수는 일본의 공부성(工部省)을 방문하여 전신기기를 둘러보고 그 신기함에 크게 놀랐다. 그는 일본 정부가 철도와 더불어 전신 시설에 주력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는데 그 자리에서 고종이 “일본 정부가 전선과 기선과 농기, 이 세 가지를 가장 급선무로 한다는 데 사실이냐?”고 하문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종은 아마 전선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1881년 일본으로 파견된 신사유람단 일행 중 박정양은 전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전선(전신)이라는 것은 전신(傳信)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무진년(메이지유신) 이후에 서양의 것을 배운 바로, 공부성 내에 전신학(電信學)이란 일 과(科)를 특별히 설치하고 또 본국과 분국을 두어 전신 사무를 관장하고 있다. 현재 관영 혹은 민간에서 사설(私設)한 것이 있는데, 도쿄의 각 관청과 상사는 서로 연결하여 마치 거미줄과 같이 얽혀 있다. 도쿄 외에도 대도시와 큰 항구 등 사람이나 사물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이를 개설하지 않은 곳이 없고 심지어 중국의 상하이나 구미 각국과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 ……구문(句文)을 치면 수십자를 넘지 않아서 곧 통신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수만리 먼 곳까지 왕복하여 그 신속하기가 마치 번개와 같다.’

 

1888년에 서울~부산 간 남로전선 개설

조선 정부도 체신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884년 3월 홍영식을 우정국 총판에 임명하고 10월 17일 우정국을 개설하여 우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때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불행하게도 우체 사업도 한동안 중단되고 말았다. 홍영식은 신사유람단 내에서도 특별히 우정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인물로 인품이 출중하여 갑신정변의 대표직을 맡았고, 갑신정변 중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다가 청군에 의해 살해됐다.

1885년 6월 중국은 본국과의 통신 연락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조선과 의주전신합동(義州通信合同)을 맺고 중국의 물자와 비용 부담으로 전신선을 가설하여 의주에서 중국 전선과 연결하였다. 이에 따라 8월 20일에는 인천~서울 간에 최초의 전신 시설이 개통되고,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1000여 리의 서로전선(西路電線)이 1886년 10월 6일 완성되었다. 서로전선을 가설한 후 중국은 한성전보총국(華電局)이라는 전보국을 설립하여 운용과 관리권을 자기들 정부 관할 하에 두었다. 조선정부가 정부직제 상 통신전담 부서를 만들고 자주적인 전선가설계획 등 통신 주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1887년 3월 1일부터이다. 정부조직 안에 ‘조선전보총국’이란 통신전담 관서를 창설하고 이 기관 최초의 수장자리인 총판(總辦)에는 홍철주였다.

1888년 6월에야 서울~부산 간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개설되어 이를 관할하는 조선전보총국(南電局)이 설립되었다. 이것이 조선 정부가 주관하는 전신사업의 첫 시작이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전보장정(電報章程)을 제정하고 국문 전신 부호를 마련하여 드디어 통신 자주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1891년에는 서울~원산 간의 북로전선(北路電線)을 개설하였고, 1893년 9월 26일에는 조선전보총국을 전신(電信)과 우신(郵信)을 합친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개화 위해 신문 재창간 본격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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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 창간호(1883년 10월 31일) ⓒ황인환

갑신정변 때 박문국 소실은 신문 발전과 인쇄문화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근대 신문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준 사건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갑작스러운 <한성순보>의 정간은 당시 주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구독자 등 지식인층에게 정보의 공백을 초래하여 매우 불편함을 체감토록 했다. 그만큼 <한성순보>의 사회적 기능이 지대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대부분 조야(朝野)의 오피니언 리더로 신문 정간의 불편함에 대한 호소는 곧 고종에게도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는 조선사회가 개화를 추진하는 대세에는 거스르지 않고 종주국 중국을 의식하여 주종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구적이면서도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구적 관계, 조공 유지 등은 젊은 엘리트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자 불만이었다.

민씨 일족의 수구파와 손을 잡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은 마음속에는 개화의 욕구가 가득했기에 신문 없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엘리트 관료들의 소원을 대신하여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자주 호소했다. 고종 역시 불편함을 느끼기는 마찬 가지였다. 고종은 박문국이 없으니 광인사(廣印社)에서 신문을 속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신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광인사에서 <한성순보>를 속간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광인사 발행 <한성순보>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조정의 여론은 신문의 재창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를 가장 빨리 입수한 이는 <시사신보>의 특파원으로 한성에 들어와 한성조약에 지대한 공로를 세워 고종과 가까워진 <한성순보>의 전 편집고문인 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였다.